일관성, 얼마나 지킬 수 있으십니까?
1.
옛날 옛날, 그리스 남쪽 크레타 섬에는 미노타우르스라는 괴물이 살았다.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한 이 괴물은 미궁 속에 갇혀 있었는데, 생긴 것만큼이나 식성도 괴이하여 사람의 고기만을 먹었다. 그래서 크레타 사람들은 바다 건너 아테나이 왕국에 해마다 선남선녀 열두 명을 식사거리로 바치도록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런 일이 계속될 수는 없는 법, 결국 아테나이의 왕자 테세우스는 산제물로 바쳐지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미궁으로 들어가, 괴물을 퇴치하고 아테나이로 돌아온다. 더이상 산 제물을 바치지 읺아도 된 아테나이 사람들도 어지간히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테세우스의 업적을 기려 그가 타고 돌아온 배를 오래오래 보존했다. 이 배는 이렇게 천여 년을 전해져 내려왔다.
그런데, 이쯤에서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플루타르코스는 기묘한 질문[1]을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배가 낡아갔기 때문에, 아테나이 사람들은 오래된 판자를 새 판자로 바꾸는 식으로 수선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배는 정말 테세우스의 배일까? 원래의 판자를 절반 이상 바꿔도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을까? 아예 원래의 판자를 몽땅 다 새 판자로 바꾼다면? 원래의 판자들을 어딘가에 잘 보관해 뒀다가 그 판자만으로 새로운 배를 만든다면, 새 판자로 만들어진 배와 오래된 판자로 만들어진 배 중 어느 쪽이 진짜 테세우스의 배일까?[2]
2.
아마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는 게 원래 인간의 연산 과정을 자동화한 것인데, 일부 프로그램들만 특별히 취급하는 건 이유가 있다.[3] 일반적인 프로그램은 입력되는 데이터와 그 처리 과정이 엄격히 구분되어 있다. 그래서 동일한 처리 과정에 동일한 입력을 주면 언제나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프로그램들은 이 범주에 들어간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이렇지가 않다. 이들은 새로 주어지는 정보에 기반하여 스스로의 처리 과정을 수정한다. 미리 주어진 사람 손글씨들[Training Set]의 패턴을 학습하여 새로 주어진 손글씨를 읽어내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동일한 프로그램에 동일한 입력을 준다고 해서 10개를 학습한 프로그램과 100개를 학습한 프로그램이 똑같이 동작하지는 않는다.
‘인공지능’ 이라는 말 자체가 “이 프로그램은 보통 프로그램과 달리 인간의 사고 방식을 닮았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 인공지능의 특징은 바로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데 있다. 뒤집어 말하면, 인간은 계속 변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우리는 언제나 경험을 통한 학습을 하고, 판자가 교체된 나무배처럼 계속 변해 간다. 사소한 습관에서 기억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다.
우리가 평소에 이걸 잘 인식하지 못하는 건, 어떻게 보면 사람이 자기 속눈썹이 몇 개 있는지 모르는 것하고 비슷하다. 너무 작은 데다가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인지라 잘 보이지 않을 뿐이란 얘기다.
3.
흔히 하는 말 중에 일관성을 지키라는 말이 있다. 틀림없이 맞는 말이긴 하다. 어느 사람이 이 회사는 내가 설립한 회사라고 하다가 갑자기 나랑은 상관없는 회사라고 한다면 누가 그 주장을 곧이듣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그리 일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애시당초 우리 모두가 한시적 유기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예전엔 이런 문제가 그리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이런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사람은 사소한 말과 행동조차 기록으로 남는 정치인 정도였다. “정치인의 최고 자질은 말을 바꾼 이유를 설득력있게 설명하는 것이다.” 라는 블랙 유머의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있는 것이다. 우리야 이런 블랙 유머를 보면서 웃지만, 정치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행적이 기록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고도 웃을 수 있을까?
나는 컴퓨터 전공자다. 그 중에서도 데이터의 지능적 이용을 공부한다. 상품 추천이나 검색, 트위터 메시지 분석 같은 게 내 연구 주제다. 쉽게 말해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떨어져나간 산더미같은 판자 무더기를 분석하는 게 내 일이다. 옛날 같았으면 당장 버려져서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판자 조각들이다. 하지만 저장 기술의 발전으로 모든 데이터들이 bit의 형태로 저장되게 되면서, 이 판자들은 어딘가에 남게 되었다. 이걸 보고 있노라면, 한사람 한사람에게 덧대어진 새 판자들이 뻔히 들여다보인다. 당연히 하나도 일관적이지 않다.
4.
영화 추천을 다룬 논문을 읽다가 어느 패션 디자이너가 떠올랐다. 거대 패션 하우스의 수장을 수십년째 맡고 있으며 얼마 전 서울 어느 미술관에서 사진 전시회를 열기도 했던 다재 다능한 노인. 나는 언제나 선글라스 너머로 비치는 그의 안광이 참 인상깊다는 생각을 해왔었는데, 어느 날 웹을 돌아다니다 그의 거대한 책장과 함께 그가 책에 대해서 했다는 말을 접하게 됐다: “책은 산 순간 반드시 다 읽어야 합니다.”[4]
패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순간 그의 삶의 한 페이지를 슬몃 엿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내가 태어나기 반세기 전에 태어나 수많은 변화를 보면서 살아왔다. 강산이 여덟 번은 바뀌는 긴 시간, 그것도 변화가 유난히 빠른 산업의 중심에서 말이다.[5] 그만큼 인간이 낡은 나무배만큼이나 시시각각 달라지는 존재라는 걸 느끼고 체험할 기회도 많았을 게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나의 삶 자체가 회고록이다. 그것을 기록할 필요는 없다.”[6] 배에 붙은 판자 한장 한장을 바꿔간 이야기를 시시콜콜 늘어놓는 건 별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출처는 잊어먹었지만, 언젠가 들은 것 중에는 좀 더 직접적인 발언도 있었다: “제가 말한 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그건 그 때만 유효합니다. 내일이면 저는 어제와 다른 인간이 되어 있을 테니까요.”
이렇게 놓고 보면, 책에 대한 그의 발언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내가 전혀 다른 인간이라면, 지금 산 책을 내일 읽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언뜻 예술가다운 괴벽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 발언에서는 웬지 모를 겸손함이 느껴졌다. “저는 유한하며 한시적인 인간입니다. 일관성을 지킬 정도로 완벽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게 제 본질입니다.”
5.
작년 말, facebook은 기존의 프로필 화면을 교체했다. 이른바 “타임라인” 이라 불리는 것으로, 기존과는 달리 사용자의 모든 온라인 행동을 연표와 같은 모습으로 정렬해서 보여 주는 기능이다. 당연한 것이지만, 개인정보 노출을 염려한 사람들 중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일부는 페이스북을 그만두기까지 했다. 이 기능은 그만큼 논란 덩어리였다.
하지만 타임라인 기능을 개발한 디자이너 니콜라스 펠튼[Nicholas Felton]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우리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기록되고 저장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어차피 그럴 것이면, 그걸 타임라인과 같이 시각화시켜 직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게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그가 페이스북에 입사한 데는, 스스로의 행동을 기록한 데이터들을 시각화한 작품이 큰 화제가 된 덕이 컸다. 그 작품에는 그의 삶이 조금씩 변화해가는 모습이 간결하고 보기 좋게 표현되어 있었다.
그래, 맞다. 우리는 이미 거대한 데이터를 쏟아내고 있고 이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그에 맞춰서, 항상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에도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자신의 일관성에 겸손(혹은 엄격)해지는 만큼 타인의 일관성에는 더 너그러워져야 한다는 얘기다. 이렇게, 기술은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법조차 바꿔놓고 있다.
원문: gorekun.log / 관련 글: 나, 나, 나
참고문헌
플루타르코스 저, 천병희 역,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숲, 2010
: 대한민국의 그리스어 본좌 천병희 교수님이 번역한 국내 유일의 완역본. 더 설명이 필요한지?
- 사실 플루타르코스가 처음은 아니고, 이전에도 소크라테스 등의 철학자들이 여기에 대해 언급을 했다고 한다. [본문]↩
- 이 문제는 상당히 실용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지난 2008년 남대문이 불탔을 때, 기존 자재들 중에서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재수집하는 문제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을 정도다. 일정 비율 이상 새 자재가 사용될 경우 복원품으로 처리되어 문화재 지정에서 해제되기 때문이다. [본문]↩
- 정확히 이야기하면, 이 예에서 설명하고 있는 분야는 인공지능 중에서도 기계학습[machine learning]에 해당한다. 기계학습이 인공지능의 대표적인 접근 방법인 탓에 자주 동일시되지만 엄연히 다른 접근법들도 있다. [본문]↩
- 원문: With every book you buy, you should buy the time to read it. 덧붙이자면 이 문구는 그의 사진 전시회장에도 걸렸다고 한다. [본문]↩
- “나는 패션을 하는 사람이며 패션은 옷에 관한 것만은 아닙니다. 패션은 변화에 대한 모든 것입니다.” (I am a fashion person, and fashion is not only about clothes – it’s about all kinds of change.) [본문]↩
- I’m living my memoir. I don’t need to write it. [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