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 누워 ‘내일 뭐 먹지?’ 고민하다 딱 맞는 메뉴를 찾아내곤 신나게 잠들 정도로 음식을 사랑하는 나지만, 사실 매일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많지 않다. 굳이 꼽아보자면 감자칩과 햄버거 정도? ‘매일 먹을 수 있다’고 했지 매일 먹는다고는 안 했다. 내가 그 정도로 사랑하는 음식은 두 대표 메뉴로 알 수 있듯이 매일 먹었다간 큰일 나는 고칼로리 고나트륨 음식이니까.
일주일 중 7일은 먹고 싶지만, 건강과 다이어트를 위해 6일은 참고 견뎌야 하는 음식을 사랑하는 탓에 매일 원하고 매일 먹는 음식은 전무하다고 할 수 있었다. ‘건강하면서 맛있는 음식은 왜 세상에 없을까?’가 인생의 화두였던 나에게 놀랍게도 4달째 떳떳하게 매일 먹는 메뉴가 생겼다.
그건 바로 그릭 요거트와 수제 그래놀라.
페이퍼넛츠 그래놀라를 처음 만난 날은 이사 후 친구들을 초대한 집들이 때였다. 오랜만에 모인 데다, 누군가의 집에 모이는 게 21살 이후 처음이라(당시 언니와 함께 살던 내 자취방에 언니가 잠깐 집을 비운 새를 틈타 잊을 수 없는 ‘걸스나잇’을 즐겼다.) 나이를 잊은 대학 동기 자매님들은 저녁 6–7시쯤 모여 와인을 각 1병씩 마시고, 수다를 왕창 떨고, 보드게임까지 하고는 아침 6시에 집으로 돌아갔다.
아침까지 먹고 마신 탓에 당일 숙취와 꺼지지 않는 포만감으로 고통받았고, 잠을 깊이 잘 수가 없어 3–4시간 자고 일어나 거실을 좀비처럼 돌아다녔다. 이제는 21살의 몸이 아니라는 걸 절감하면서 정신이 들 때쯤 믿을 수 없는 허기가 찾아왔다. 거의 12시간을 쉬지 않고 먹고 고작 5–6시간 지났을 뿐인데 또 뭘 먹겠다고…?
마음 한쪽에 새기고 있던 ‘과음/과식한 다음 날은 16시간 공복을 유지하고 유산소 운동을 해야 한다.’라는 다이어트 유튜버의 말은 개나 줘버리라는 마음으로 냉동실에 있던 순대국에 다대기를 팍팍 넣어 해장했다. (해장 방법은 21살 때와 똑같다.) 뜨끈한 국물과 적당히 씹은 밥알, 살코기와 지방이 섞인 머릿고기가 몸에 하나씩 들어오니 쓰린 속이 달래지고 살 것 같았다.
한 그릇을 해치우고 나서도 입이 깔깔했다. 보통 입이 깔깔하면 입맛이 없다고 하는데, 난 입이 깔깔하니 고소한 걸 먹어서 깔깔함을 없애고 싶었다. (대단한 식욕!) 그러다 전날 솜이 집들이 선물로 사 온 견과류가 눈에 들어왔다.
솜이 준 선물은 ‘유자 후추넛’과 ‘베이직 그래놀라’였다. 그걸 보니 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놀라는 그릭요거트랑 같이 먹어.
동시에 파블로프의 개처럼 갑자기 달짝지근하고 고소한 그래놀라를 뿌린 꾸덕한 그릭요거트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먹고 싶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집에 일반 플레인 요거트도 아니고 값비싼 그릭요거트가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먹어 본 처음이자 마지막 그릭요거트는 괜히 사치 부리고 싶던 어느 점심시간, 망원동의 한 가게에서 7,50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먹었던 것이 전부였다.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요거트볼이 7,500원이라니!) 분명 요거트 맛인데 플레인 요거트보다 적은 신맛이 아주 약하게 남아 있고, 크림치즈의 질감으로 고소한 맛이 감돌아서 ‘너 맛있는 녀석이구나!’하고 감탄했지만, 일반 요거트보다 비싼 탓에 이후로는 거의 먹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맛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더니 당장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종종 맛의 기억이 휘몰아치고 특정 메뉴에 대한 식욕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질 때가 있는데 그날이 그랬다. (이럴 때 그걸 먹이지 않으면 난폭해진다.)
재정적 궁핍 시기에 집들이를 했던 터라 잔고는 풍비박산 나 있었고, 비싼 그릭요거트를 사러 망원동까지 출동할 수는 없었다. 내가 먹고 싶은 건 농도가 묽은 기성품이 아니라 크림치즈 정도의 질감을 가진 꾸덕한 그릭요거트였는데 편의점에 그런 걸 팔 리가 없었다.
집에서 만들면 싸게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집에는 최근에 거의 쓰지 않던 요거트 메이커가 있었다. 우유와 불가리스 같은 유산균 요구르트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8시간 정도 기다리면 쉽게 900mL 대량의 요거트를 만들 수 있는 도구다. 플레인 요거트는 만들 수 있는데 그릭요거트는 어떻게 만드는 걸까…? 바로 ‘그릭요거트 만드는 방법’ 검색 시작.
일반 요거트에서 유청을 제거하면 더욱 밀도 높고 꾸덕한 질감의 그릭요거트가 된다고 했다. 유청을 어떻게 제거하지? 블로그에 나온 대로 면보를 사서 짜는 건 너무 귀찮을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던 와중에, 다른 블로그에서 내가 갖고 있던 요거트 메이커와 세트 상품인 ‘치즈 메이커’를 이용하면 그릭요거트를 만들 수 있다는 정보를 찾아냈다!
그 ‘치즈 메이커’는 우리 집 애물단지로, 거의 7–8년 전 언니와 함께 살던 시절에 구입해 혼자 살던 두 집, 그리고 결혼한 이후 두 번째 집인 현재의 집으로 총 다섯 집을 거치면서도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던 물건이었다. 이사할 때마다 버릴까 말까를 고민했지만, 왠지 ‘언젠가는 분명 내가 치즈를 만들어 먹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고 지고 와서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아이였다.
알고 보니 그 아이는 촘촘한 거름망이 있는 치즈 통 안에 요거트를 넣고 그 위에 차가운 물을 넣은 누름 통을 올려주면, 물통의 무게로 인해 요거트가 서서히 압축되면서 거름망으로 유청만 제거할 수 있는 기구였다. 레몬즙 첨가 등 다른 과정을 추가하면 치즈를 만들 수 있지만, 아주 손쉽게 유청을 제거해 그릭요거트를 만들 수 있는 엄청난 아이였던 것이다!
흥분한 나는 옷을 챙겨 입고 편의점으로 가서 우유와 유산균 요구르트를 바로 사 왔다. 주말에 집 밖으로 한 걸음도 안 나가려고 하는 내가 숙취가 해소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나갔다 오다니, 천성이 게으른 인간도 먹을 거에 꽂히면 정말 한없이 부지런해진다.
이제 금방 먹을 수 있겠다는 기대와 달리 그릭요거트 만들기는 긴 인내의 시간이 필요했다. 우유와 유산균 요구르트가 발효의 과정을 거쳐 요거트가 되려면 8시간, 또 ‘치즈 메이커’로 옮기기 전 냉장고에서 식히는 시간이 8시간, 치즈 메이커로 옮겨 유청을 제거하는 데는 최소 24시간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릭요거트는 최소 40시간 후에나 먹을 수 있었다….
나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충실히 인고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 일요일 저녁 : 우유와 유산균 요구르트를 잘 섞어 전용 용기에 넣고, 요거트 메이커에 뜨거운 물을 부은 뒤 뚜껑을 닫고 8시간을 기다리다 잠듦
- 월요일 아침(12시간 경과) : 잘 발효된 요거트를 냉장고에 넣어 두고 출근.
- 월요일 저녁(24시간 경과) : 퇴근 후 완성된 플레인 요거트를 ‘치즈 메이커’에 넣고 다시 냉장고 보관.
- 화요일 아침(36시간 경과), 그릭요거트가 완성되려면 저녁까지 기다려야 했고 치즈 메이커에 넣고 남은 플레인 요거트가 조금 있었다.
그래, 이거라도 일단 먹어보자. 그래놀라와 파인애플을 넣고 요거트 볼을 만들었다.
맛있었지만 뭔가 부족했다. 꾸덕함이 필요해. 이게 아니야. 그래, 이제 하루만 기다리면 된다. 조금만 더 참자. 유청을 더 오래 뺄수록 꾸덕해진다고 하니, 내일 아침까지 참아야겠다.
대망의 수요일 아침, 합계 60시간을 기다린 끝에 그릭요거트가 완성되었다. 그릇에 옮겨 닮으려 숟가락을 넣는 순간,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꾸덕함이라는 느낌이 왔다. 유청이 빠지며 요거트의 양은 거의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인고의 시간은 최소 3일이 필요하다는 학습으로, 만들어진 요거트의 절반만 옮겨 닮았다. 한 번에 다 먹어버리기엔 너무 소중한 양이었다. 그래놀라를 한쪽에 뿌려주고, 한쪽엔 레드키위를 올렸다.
바로 내가 원하던 맛이었다. 부드러우면서 쫀득한 크림치즈의 질감을 가진 그릭요거트. 약한 단맛이 느껴지는 그래놀라가 요거트의 신맛을 살짝 잡아주면서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그릭요거트에 콕콕 박힌 그래놀라는 시간이 지나도 눅눅해지지 않았고 입안에서 따로, 또 같이 달콤함과 고소함이 뒤섞인 채 춤을 췄다. 아침이 행복해지는 맛이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침마다 그래놀라 요거트볼을 먹었다. 그릭요거트와 그래놀라를 먹을 생각에 아침에 눈이 번쩍 떠질 정도. 그릭요거트도 맛있었지만, 이 완벽한 조화의 핵심에는 ‘페이퍼넛츠’의 그래놀라가 있었다.
시중에 파는 그래놀라도 물론 맛있지만 내 입에는 단맛이 너무 강하기도 하고 영양성분표의 당 수치가 꽤 높은 탓에 매일 먹기엔 부담스러웠는데, 페이퍼넛츠의 그래놀라는 많이 달지 않았고 보기에도, 먹었을 때도 ‘건강한 음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맛있기까지 해서 죄책감 없이 행복하게 먹을 수 있었다. 죄책감 없이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음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던 나에게, 페이퍼넛츠의 그래놀라와 그릭요거트의 조합은 신세계를 열어주었다.
솜이 사준 300g의 그래놀라를 다 비우고
결국 페이퍼넛츠 매장이 있는 증산까지 갔다. 내가 사랑하던 브런치 가게가 고대 앞으로 이전한 뒤, 같은 자리에 들어온 매장이 페이퍼넛츠였다. 이 자리의 수맥이 나랑 연결되는 건가… 이게 바로 우주의 기운?
고소한 냄새로 가득한, 작고 예쁜 가게에 들어가 그래놀라 300g을 주문했다. ‘Free Plastic Store’를 표방하는 이곳에서는 모든 포장재를 재활용 가능한 종이로만 사용했다. 음료와 요거트볼도 판매하는데, 직접 용기를 가져오지 않으면 포장이 불가능하고 매장에서만 취식할 수 있다.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는 가게였다.
페이퍼넛츠에서는 그래놀라 외에도 아몬드, 호두, 마카다미아 등 일반 견과류와 시즈닝 견과를 판매한다. 모두 당일에 깨끗이 세척한 생견과를 직접 볶은 것이다. 그래놀라 또한 미국 농무부 USDA 공식 유기농 인증 오트밀과 캐나다산 유기농 메이플시럽을 사용해 오븐에 소량만 구워 신선한 제품을 제공한다고 한다. 환경과 건강 모두 생각하는, 착하고 아름다운 가게 페이퍼넛츠는 이렇게 나의 마음을 홀렸다.
입맛이 까다로운 산까지 페이퍼넛츠의 그래놀라와 그릭요거트 조합에 빠져버린 탓에 그 둘은 우리 집 필수품이 되었다. 2–3주에 한번 자전거를 타고 증산까지 가서 신선한 그래놀라를 사 온다. 덕분에 과일이라고는 없던 우리 집 냉장고에는 언제나 제철 과일이 채워졌고(내 주변 모든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과일을 안 좋아했다. 너무 달아… 그렇지만 그릭요거트와 함께라면 요거트의 신맛이 단맛을 잡아주지!) 건강한 아침을 꼬박꼬박 챙겨 먹는 습관까지 생겼다.
성격뿐 아니라 후각과 미각까지 예민한 탓에 하루 견과를 왕창 사 두고도 왠지 모를 견과류의 찌든 냄새가 싫어 의무감에 가끔 먹었지 진정으로 즐기지 못했던 나는 신선한 견과류의 고소한 맛을 알아버렸다. 애정이 담긴 작고 소중한 선물을 계기로, 건강한 아침 식사의 습관이 생겼다.
‘그 에너지로 다른 일을 했으면 분명히 성공했을 텐데.’라고 생각했던 음식에 대한 열정이 매일 아침 먹을 수 있는 한 입의 행복을 만들었다. 생각지도 못 한 일들이 가져다주는 작은 변화가 오늘도 삶에 한 방울의 물감으로 떨어진다. 그 물감들이 오묘한 삶의 색을 만들어 가는 것 같다.
모두가 건강식품이라고 말하는 과일과 그릭요거트와 그래놀라를 4개월 동안 매일 아침 먹은 인체 실험의 결과, 과연 건강에 변화가 있었을까? 다른 건 차치하고, 성인이 된 이후 내내 3–4일에 한번 화장실에 갈 정도로 변비에 시달렸던 나는 이제 거의 매일 화장실에 간다(내내 신선한 음식 이야기로 프레시하던 글을 왜 더럽게 마무리하는 걸까… 아니 그래서 몸이 깨끗해졌다는 거죠)!
아침의 행복과 건강과 깨끗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계기를 선물해주신 솜에게 감사와 사랑을.
원문: 스키터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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