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의 일이지만 〈무릎팍도사〉란 예능 프로그램에 배우 황정민이 나와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때로는 배우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환멸이 날 때가 있다고. 어릴 적부터 가까웠던 친구의 죽음 앞에서 엉엉 울다가 문득 ‘내가 지금 어떻게 울고 있지?’ ‘엄청난 슬픔을 느낄 때 인간의 심리는 구체적으로 어떠하지?’ ‘이런 상황에서 표정과 호흡은 어떻게 되지?’와 같은 것들을 생각하는 스스로를 깨닫고 소름이 끼쳤다고.
당시에는 저럴 수도 있구나, 배우들은 저러기도 하는구나 싶어 놀랐는데 지금은 그 느낌에 대해 정확하게 안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몇 번 있다. 기쁨, 슬픔, 분노, 행복 같은 강렬한 감정을 앞에 두고 그 감정에 몰입하기 이전에 글로 옮기고 싶은 욕구가 먼저 드는 순간. 어떤 비극이나 통탄할만한 사건 앞에서 ‘이걸 어떻게 하면 글로 잘 옮길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는 스스로를 깨닫고 깜짝 놀란 적이 몇 번 있다. 물론 나에게는 황정민 정도의 재능도 열정도 없지만, 그러한 상황과 욕구가 그만큼 드물지는 않다는 이야기다.
그런 측면에서 100퍼센트 윤리적인 창작 혹은 예술이란 애시당초 불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예술이나 창작은 대개 인간의 감정을 수단으로 삼고, 그 과정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대상화’가 이루어진다. 보도 또한 마찬가지. 퓰리처상을 수상한 종군 기자들의 사진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누군가가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담아낸 사진들은 그 자체로 충격과 감동을 주지만, 동시에 사진을 찍은 사람이 위기에 처한 피사체를 구하는 것보다 사진을 찍는데 더욱 몰입했다는 잔인한 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에겐 오드리 헵번이 등장하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원작자로 유명한 트루먼 카포티는 본래 문학성이나 작품성보다는 대중성으로 더 명성이 높은 작가였다. 책도 많이 팔리고 사람들에게 인기도 있었으나, 굳이 따지자면 예술가보다는 ‘셀럽’에 가까운 인물이었달까. 하지만 그런 카포티에 대한 평가는 『인 콜드 블러드』, 우리말로 옮기면 ‘냉혈한’이라는 제목의 작품 이후 완전히 뒤바뀌어 그는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작가로 인정받으며 미국 최고의 스타가 된다. 영화 〈카포티〉는 그가 『인 콜드 블러드』를 집필한 시기를 집중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어느 날 신문에서 캔자스주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기사를 보고 ‘뭔가 있다’는 느낌을 받은 카포티는 친구인 넬(『앵무새 죽이기』의 작가인 넬 하퍼 리)과 함께 사건 현장으로 향한다. 본래 특집 기사 정도를 쓰려던 카포티는 현장을 관찰하고 범인을 만나보면서 기사가 아닌 책을 쓰기로 결심한다. 아무 죄 없는 일가족을 무참히 살해한 두 범인. 그 심리를 추적하다 보면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을 통해 엄청난 작품을 써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으로 자신은 여태껏의 커리어를 뛰어넘는 진정한 ‘예술’의 경지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카포티의 계산이었다.
물론 네 명의 일가족을 이유도 없이 무참히 살해한 범인들이 순순히 이야기해줄 리 만무하다. 온 세상이 그들을 대상으로 적개심을 보이는 당시 상황에서는 더욱더. 그런 가운데 카포티는 그들에게 호의가 있는 것처럼 접근하고, 결국 그들과 친구가 되는 데 성공한다. 범인들은 카포티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며 사건의 세부적인 사항들을 털어놓기 시작하고, 카포티는 그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하루하루 글을 써나간다.
이런 카포티를 보고 당연히 주변에서는 좋지 않은 반응을 보인다. 그가 벌을 받아 마땅한 범인들을 진심으로 옹호하고 변호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분노한 형사 한 명은 범인들이 풀려날 경우 카포티를 대신 수사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그렇다면 카포티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카포티는 사건의 진실과 자신의 작품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범인들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물론 관심이야 있었고 실제로 세간의 적대적인 반응과 다르게 여러모로 인간적인 호감을 보였으나, 그것은 진지한 애정이 바탕이 된 것이 아닌 생물학자가 기르는 세포를 관찰하는 것과 비슷한 형태의 관심이었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카포티는 범인들 이상으로 ‘냉혈한’ 모습을 자주 보인다. 겉으로는 웃으며 다정하지만 내면은 무엇보다 차가운.
실제로 모든 것을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던 범인들은 카포티와 가까워질수록 다시금 삶에 대한 욕구를 느끼고, 그러면서 카포티에게 책을 빨리 완성해 자신들의 재판을 도와달라고 조르지만 그럴 때마다 카포티는 웃으며 대답한다. “아직 아무것도 쓴 게 없어요.” 책을 절반 넘게 완성해 낭독회까지 마친 시점에서도 카포티는 아직 제목조차 정하지 못했다고 그들에게 거짓말을 한다. ‘냉혈한’이라는 제목을 들으면 범인들이 책의 방향성을 짐작하고 카포티를 원망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사형 선고를 받은 범인들의 형 집행은 점차 미루어지기만 하고, 처음에는 사건의 세부적인 사항을 듣기 전에 그들이 죽어 버릴까 봐 초조해하던 카포티는 이제 그들이 죽지 않고 계속 살아있을까 봐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살아 있을 경우 언제가 됐든 카포티의 작품을 읽게 될 것이며, 그럴 경우 그들이 느낄 감정을 마주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자신을 내내 지켜보겠다고 말하던 형사의 시선, 이제껏 완성하지 못하고 질질 끌어온 책의 결론, 모든 것이 범인들이 죽어야만 비로소 완결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카포티는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4년여의 시간 동안 비록 계산된 행동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누구보다 친밀해진 범인들이 죽기를 바랄 수도, 죽지 않기를 바랄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심지어 범인 중 한 명은 카포티만이 자신을 생각해준 유일한 인물이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들은 카포티는 어쩔 줄 모른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계산해 시작했고, 그 대상이 실제로 악독한 사람이었고, 그러므로 그를 이용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고, 모든 번뇌와 고민과 윤리의식을 뛰어넘을 만큼 카포티의 작가로서의 욕망은 강렬했으나, 그럼에도 그것은 결코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악하건 선하건 관계없이 한 생명이 아무런 의심 없이 모든 것을 의탁해 오는 순간의 느낌, 그러한 대상이 된 자기 자신, 그런 가운데 대상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된 자신, 그런 가운데에서도 예술적 욕구가 우선하는 자신,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그들의 죽음을 바라는 자기 자신.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냉혈한’ 카포티는 그 과정에서 조금씩 무너지고 만다. 실제로 『인 콜드 블러드』는 카포티의 마지막 작품으로 이 작품은 카포티에게 최고의 명성과 부, 명예를 안겼으나 이후 카포티는 무엇도 쓰지 못하게 되며, 사람들과 파티를 즐기고 늘 경쾌하던 카포티는 결국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하다 사망한다.
카포티의 사례는 말하자면 ‘악마와의 거래’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학 작품에 메타포로 자주 등장하는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행위’는 작품 속에서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위험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릇된 길을 택하는 주인공들을 지켜보며 안타까움에 혀를 차고, 그들의 어리석음을 탓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우리의 삶으로 옮겨지면 악마의 정체는 작품 속에서처럼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소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하던 것과는 다르게 아주 쉽게 유혹에 흔들린다. 부, 명예, 예술적 성취를 이루고 싶은 욕망. 인정받고 싶은 욕망. 무언가 만들어내고 싶은 욕망.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만약 카포티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그러한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만약 내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엄청난 작품을 쓸 수 있다면.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내 자신의 어떤 부분을 잃어야만 한다면. 그 과정에서 내가 망가지고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면. 머리로는 평범하고 안온한 삶을 사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에는 다른 선택을 하고야 말 것 같다. 미래는 언제나 멀리 있고 당장 눈앞에 가까이 보이는 것은 욕망이기에.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에게는 그만큼의 재능이 없고, 아마 그럴 수 없을 테지만.
위대한 작품을 읽다가 죽은 독자는 없어도 위대한 작품을 쓰다가 죽은 작가는 많다는 말이 있다. 오래전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위대한 작품을 쓰다가 왜 죽지? 재능이 충만하면 그냥 쓸 수 있지 않나? 하지만 이 세상에 ‘그냥’이라는 것은 없다. 그저 재미있는 것, 신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어떤 ‘진실’이 담긴 위대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들여다 보는 사람의 내면에서는 무언가가 반드시 부서지는 것 같다. 우리가 하는 말, 우리가 하는 행동, 우리가 맺는 관계, 우리가 받는 마음들, 그 모든 것에도 반드시 대가가 따르는 듯하다.
원문: 한승혜의 페이스북
함께 보면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