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82년생 김지영〉을 책으로 봤다. 사실 〈82년생 김지영〉은 서사를 더한 근현대 여성사로 보인다. 잔잔하게 통계적 사실에 근거한 일반적인 당대의, 그리고 현대의 여성의 삶을 그려냈다. 사실 나는 이런 온건한 내용의 책이나 영화에 시비를 거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여혐민국』의 작가인 양파 님의 페이스북 글에서 어떤 힌트를 얻었다. 좋은 남편, 그럼에도 발생하는 구조적 부조리를 여성들이 발견하는 것.
기존 여성의 결혼 불행 서사는 개차반 같은 남편을 만나 얻어맞는 내용이었다. 그런 서사가 대부분을 차지하면, 여성들은 생각한다. ‘아 저런 남자를 안 만나면 되는구나’ 남성들은 이야기한다. ‘에이 저건 과장이지, 난 저런 남자 아냐.’ 하지만 〈82년생 김지영〉은 남편이 ‘좋은 사람’이어도 바꾸기 어려운 구조적 부조리를 정조준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불행의 원인이 남편이라는 개인이 아니라 구조란 것을 밝혀낸 것이다.
에이, 저거 과장 아니야?
〈82년생 김지영〉 영화나 소설을 공격할 때 많이 쓰이는 말 중 하나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하건대, 영화의 짧은 시간에 농축되어 보였을 뿐 저건 모든 한국 여성에게 굉장히 실감 나는 현실이다. 여전히 이는 1980–1990년대생 여성의 유효한 현실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나와 주변 사람들의 실제 경험과 생각을 담았다.
남존여비로 대표되는 남아선호사상
나는 진보적인 분위기의 집안에서 자라났다. 한쪽은 이제 관계를 맺지 않아 모르지만(어렸을 때 사촌 오빠들은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어린 우리 자매는 수저를 놓던 장면, 사촌 오빠가 뒤에서 끌어안고 놓지 않아서 이상하게 생각했던—지금 생각해보면 성추행— 기억만이 남아 있다) 한쪽은 오래전부터 딸에게도 공부를 시킨 나름대로 진보적인 집안이었고, 이쪽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이런 집안도 아들은 꼭 있어야 한다며 기어이 막내아들을 얻었고, 우리에게도 집에 아들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딸은 자라서 선생님이 되어서 시집 잘 가면 된다고. 하지만 나는 내가 사정이 나은 것임을 안다. 적어도 우리가 성인이 되고서는 저런 이야기를 절대 듣지 않으며, 손녀를 보신 할머니들은 딸도 똑같이 귀하다고 하시고, 가족 중에 비혼 여성들이 있어도 이에 크게 압박하지 않는다는 점만으로도.
주변의 친구들은 보통 더 심한 차별을 경험했고, 경험하는 중이다. 또한 다행히도 나는 자매가 있다. 우리 가족의 구성원인 어른들은 우리를 이해하고 지원하는, 정말 좋으신 분들이다. 하지만 만약 나에게 오빠가 있었다면? 나는 지금 우리 가족이 나를 지금과 똑같이 사랑해줬으리라고 믿을 수 있을까? 나는 100% 자신할 수 없다. 이건 아무리 교양 있는 좋은 사람들이라도 바꿀 수 없는 기울어진 운동장이기 때문이다.
경력 단절과 독박 육아
김지영의 이야기를 보면 우리 이웃에 살던 분이 떠오른다. 그분은 아마 김지영의 연배일 것이다. 알고 보니 그분은 명문 대학에서 높은 학위 과정까지 이수하신 분이었다. 당시엔 일을 그만두고 주 양육자로 지내고 계셨다.
그분이 어느 날 이야기하신 것이 기억에 남는다. 혹시 가능하다면 결혼하지 말라고. 아이들을 정말 사랑하지만, 열정적으로 열심히 공부했던 내가 종일 청소하고 기저귀를 치우다 보면 무엇을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가끔씩 이전에 공부하던 책을 꺼내 보곤 한다고. 여성들의 경력 단절이 옛이야기라며 비웃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그건 생생한 현실이며 지금도 매일 그들을 사회로부터 격리한다고.
산후우울증이나 육아로 인한 우울증이 대중에게 친숙한 개념이 된 것조차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사회는 집으로 내쫓은 여성들의 안부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여성들은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했다. 내가 문제라고, 내가 이기적인 것이라고. 여성들은 자신을 아프게 하는 구조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여성의 삶은, 엄마의 삶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온 사회가 최선을 다해서 가르쳤으니까.
맘충, 그런 말을 누가 써?
난 정확히 가장 최근에는 6개월 전쯤 들었다. 참고로 나는 반여성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과 대부분 관계를 끊어서 사실 남은 사람도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런데도 들었다. 요즘은 그냥 맘충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런 말 쓰긴 그렇지만 맘충’이라고 한다. ‘나는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그런 말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의식하고도 쓰는 것이다’라는 자기방어 차원에서.
나도 인간이라 아무 생각 없이 나뭇가지를 휘두르거나 괴성을 지르는 아이들을 보면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당신은 권력 있는 정치인이 싫으면 그를 쥐어 패줄 수 있는가? 혐오는 물처럼 아래로 흐른다. 싫어하고 좋아하고는 자유이지만, 이를 위시해 위력을 행사(이는 대상을 비하하는 언어의 직접적인 사용도 포함된다. 뒤에서 안전하게 대중 속에 숨어서 하는 나랏님 욕 말고)하는지 여부는 상대방이 약자인지 아닌지에 따라 결정된다.
노키즈존은 이 극단적 예시이다. 실제로 일해보면 당신이 만나는 진상은 아저씨들이 훨씬 많은데, 노아재존이 운영되는 것이 가능한가? 그들은 힘이 있기 때문에 이 사회가 그토록 적나라하게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노키즈존은 호오의 문제가 아닌, 권력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키즈’존을 통해 실질적으로 배제되는 것은 여성 양육자들이다.
양육자들은 때때로 자기 자식을 위해서 이기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왜 맘충인가? 이는 아이는 결국 여성이 독박육아 한다는 한국의 현실을 반영할 뿐 아니라 이기적 행위의 프레임을 두 양육자 중 약한 쪽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어머니가 주 양육자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아이의 진상짓은 어머니가 있을 때만 한정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와 버스에 탄 아이가 엎어져서 떼를 쓴다고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역시 요즘 아빠들이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가장 충격적인 반응(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은 ‘대체 애 엄마는 어디 간 거야?’라는 반응이다. 아이가 똑같이 진상짓을 하더라도 우리의 인식 속에서 아이를 우리 눈에 잘 띄지 않게 케어해야 하는 주체(혹은 그 스트레스의 화풀이 대상)는 여성인 엄마이다.
이는 또한 개별 사건이 발생했을 때 책임자가 남성일 때는 그것을 개인의 사건으로 다루지만 여성에게 비위행위의 책임이 있을 때는 마치 여성 전체의 문제인 것처럼 다루는 것(‘여자들이란!’)과도 관련이 있다. 이때 여성인 맘(mom)은 혐오의 프레임을 뒤집어씌우기에 딱 좋은 대상이 된다. (아버지에게 진상의 이미지를 씌우는 단어가 뭐가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육아에 참여하는 아빠를 추앙하는 의미로 쓰이는 ‘라떼파파’라는 단어가 장려된다는 것만 떠오른다.)
‘노 키즈 존’과 ‘맘충’을 외치는 사회에서 어떻게 저출산이 문제라는 말을 감히 할 수 있을까. 〈82년생 김지영〉이 허구라며 비웃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늘도 그 수많은 김지영은 사회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나갈 것이다.
결혼과 함께 사라지다
1990년대생 여성들은 이러한 김지영의 다음 세대이다. 이제는 ‘시집살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아무 육아하는 여성들이 모인 사이트를 켜고 고민 상담 카테고리를 읽어보라고 하고 싶다. ‘시집살이’뿐 아니라 똑같이 공부하더라도 임금을 덜 받고, 채용에서 성차별을 당하고, 결혼한 뒤에는 퇴사를 하거나 모임에서조차 사라지는 친구들을 참 많이 봤다. 비교적 평등한 관계를 만들려는 개인적 차원의 노력들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결혼은 1990년대생 여성에게도 균등하지 않은 부담을 지운다. 그리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많은 여성이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밝혔고, 결혼하고 싶지 않은 이유로 ‘그냥’이라고 답했다는 기사를 봤다. 그 기사를 보자마자 많은 여성은 박수를 보내며 공감했다. 결혼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에 ‘왜 결혼하지 않는데?’라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지친 여성들이 이제 응답을 거부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고, 그 마음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수천 번 수백 번 얘기했지만 사회가 듣지 않았기에, 자꾸 반박하려고만 해서, 이제는 설명할 가치조차 못 느꼈기에.
몰카, 디지털 성범죄
디지털 성범죄는 비교적 최근에 조명받는 문제이다. 나 또한 실제로 카톡방 성희롱을 (피해자로서) 경험했다. ‘몰카와 국산야동’과 ‘지인능욕’, 그리고 ‘N번방’까지 끊임없는 디지털 성범죄가 횡행하는 한국에서 여성들에게 안전한 공간은 없다. 우리는 정말 흔하게 피해자가 된다.
사실 이건 경험을 나누고자 함이므로 자세한 이야기를 하진 않겠지만, 사실 단순한 성욕의 결과물이 아닌 성욕과 합작되거나 성욕으로 가장한 (주로 동성 내의 경쟁에서 짓밟힌) 권력욕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약자를 망가뜨려 위에서 바라보는 서열을 공고히 하는 데서 오는 원초적이고 말초적인 정복욕에 대한 추구.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다른 약자로부터 보상받고 싶어 하는 남성들에게, 이 사회는 여성들을 피해자로 기꺼이 던져준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학습한, 익숙해져 있는 성적 착취를 자행하도록 방관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끝까지 음지에 숨어 있던 범죄자들을 찾아냈고, 앞으로도 찾아낼 것이다. 여성들은 언제까지고 약하고 어리지 않다. 여성들은 피해자 대신 가해자의 눈에서 눈물이 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연대한다. 우리는 공통의 트라우마를 가진 생존자들이다.
대한민국에서 남성과 여성은 같은 땅을 밟고 살지만, 경험하는 세상은 완전히 다르다. 〈82년생 김지영〉을 보며 공상이라고 비웃는 그들의 세상에서, 여성들은 아직도 이런 일들을 경험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의 정체를 알았다. 우리는 이제 개인적인 수준을 넘어 집단의 수준에서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는 〈82년생 김지영〉과 같은 ‘크게 자신의 경험 말하기’의 도움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여성이 스스로 자신이 겪어왔던 것이 당연하지 않으며 바뀌어야 한다고 느끼기 시작할 때, 반대편에서는 큰소리를 지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큰소리를 배경으로 유유히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그 옆에는 조금씩 다르더라도 당신과 연대할 여성들이 함께할 것이다.
원문: 익명의 브런치
함께 보면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