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보고 왔다. 지난해엔 이 소설 흉도 좀 보고 그랬는데, 영화를 보고 와선 조남주 작가와 출판사에 새삼 고마운 감정도 드는 게 사실이었다. 한 사회가 필요로 하는 메시지를 정확히 간파하고 이 정도로 집약적인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던 건 그 자체로 굉장한 능력과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었던 게 분명하니까.
그러니… 우리 관객들은 작품의 중간중간 노골적으로 깔려있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과 결말부에서 화사한 클로즈업으로 김지영의 손에 들려있던 뜬금 《릿터》마저도 충분히 이해하고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아, 부럽다, 나는 딱 이 마음이 들었다. 저럴 만도 하지, 인정할 수 있다. 민음사의 역사가 한국 근현대사의 지성을 상징하는 측면도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김수영과 황지우와 이문열을 품어냈던 이 출판사의 오래된 힘은 2019년에도 극장을 넘나들며 저렇게 계속되고 있구나, 나는 《릿터》의 등장에 같이 영화를 보던 이와 잠깐 깔깔대며 이 생각을 했다. 민음사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부에도 꽤나 위기설이 돌고 그랬던 것도 들었던 바 있는데, 역시 시간과 전통의 힘은 무서운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내 생각엔 책과 활자의 분야에 있어선, 어느 조직에 흐르는 오랜 전통의 힘과 에너지는 거의 언제나 옳다.
그리고 소설과 영화의 차이에 관해서, ‘상업적인’ 것에 관해서 생각했다. 사회학도 출신의 작가가 쓴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그 훌륭한 모티브와 섬세한 디테일에도 근대문학적 성취의 강박과 고발문학적 메시지-과잉의 회로에 갇혀서 아무것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채 느슨하고 엉성하게 끝을 맺고 말았다. 영화는 완전히 다르다. 영화에선 아주 심플하고 기분 좋게 김지영의 미래를 긍정하고 낙관한다.
김지영은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고, 그의 서사는 새롭게 시작될 준비가 되었다. 주위 사람들은 이제야 그를 똑바로 바라볼 준비가 되어있다. 그 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다지 사악하거나 정신적으로 완고한 인간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변할 수 있다. 사람은 변한다. 그러므로 사회는 변할 수 있고, 사회는 변한다. 대다수 인간은 문학이 묘사하는 것처럼 자신의 신념에 투철하고, 선악이 뚜렷하게 갈리는 완고한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연 비현실적인가? 대중적 상업영화의 따뜻한 낙관과 긍정이 더 비현실적인가, 이른바 순수문학의 차가운 비관과 체념이 더 비현실적인가? 아니, 우리에게 과연 순수문학이라는 게 남아 있기는 한 것인가? 어쨌든 나를 포함해서 영화를 본 대부분 사람은 영화의 티 없는 긍정과 낙관에 기분 좋은 감정을 느낀 건 맞는 것 같다. 그것은 상업적인 무언가가, 또는 통속적인 영화/드라마가 줄 수 있는 굉장히 청량하고 진실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 지점이 국문과 출신의 김지영, 한때 소설가를 꿈꾸었던 김지영, 세계문학을 그렇게 집안에 쌓아두던 김지영이란 캐릭터가 문제적으로 바뀌는 지점이라고 느껴졌다. 문학은 아주 폐쇄적인 텍스트이다. 문학은 (조남주 작가 자신에게 그랬듯) 한 사람의 개인을 개인으로 독립시킨다. 그렇지만 우리는 문학적 개인보다 훨씬 더 밀접하게 주위 사람들과 영향을 미치며, 서로서로 조금씩 바뀌어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소설만 읽으며 살아갈 수는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82년생 김지영』은 모든 것의 시작이 되는 텍스트일 것이다. 김지영은 이제야 비로소 이야기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우리는 이제야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 그 이야기는 자신의 서사에 집중한다는 차원에선 폐쇄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폐쇄성의 힘은 우리 사회에 놀라운 충격을 던졌지만, 앞으로 그러한 폐쇄성과 개인성을 뛰어넘고 그 폐쇄성에 다각도의 바깥 공기를 불어 넣는 불균질한 텍스트가 계속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김지영의 집에 쌓여있는 모든 세계문학 작품은 그 뛰어넘음을 기록했던 일련의 기록적 역사일 것이다. 문학은 폐쇄적이어서 개방적이다. 독립적이어서 사회적이다. 그러므로 나도 물론 김지영 이후의 김지영, 10년이 지난 후의 김지영 같은 이들이 계속 우리 곁에서 좀 더 예측불가능하고 피아가 불확실한, 다채로운 텍스트를 선보이길 바라게 되고 그렇다. 그게 영화든 소설이든 말이다.
정유미와 공유, 특히 정유미는 연기에 접신한 것 같았다. 거의 윤리적인 책임감이 느껴질 만한 연기였다. 정말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영화를 같이 본 이가 영화 중간중간 계속 흐느껴 울어서 마음이 아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는 오직 머리로만 짐작하는 감정과 경험들을 몸으로 통과했고, 또 통과하는 중이라는 건 과연 서글프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영화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 여성과 남성의 문제에 관해선, 그간 나 또한 자주 인용하기도 했던 황현산 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이 영화를 본 나의 감상을 한 마디로 압축한 말이 아닐까 싶었다.
여전히 바뀌지 않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우리가 어머니에게, 아내에게, 직장의 여성 동료에게, 길거리에서 만나는 여성에게, 심지어는 만나지도 못할 여자들에게 특별히 기대하는 ‘여자다움’이 사실상 모두 ‘여성혐오’에 해당한다.
여자에게 기대되는 모든 여자의 일, 여성스러움 같은 것들은 그냥 그 자체로 진부하고 따분하기 때문에 진부하고 따분한 것이다. 그것을 진부하고 따분하다고 말하기엔 내게도 그런 진부함과 구시대성이 묻어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모든 여성적인 일과 남성적인 일의 구분이 흐릿해진 사회, 육아와 살림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50대 50이 자연스러운 사회, 그것을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것조차도 부자연스러운 사회를 위해서 내가 노력해야 할 것들이 더 있을 것이다.
사실 그 노력의 기록 정도만 꼬박꼬박 올려도 내 SNS는 훨씬 더 풍요롭고 진실해질 게 틀림없다. 문학과 전통과 폐쇄성 같은 어지러운 말들을 논하기 이전에 말이다. 그러니까 내게도 무언가 다른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남아 있고, 우리 삶은 문학보단 영화를 훨씬 더 닮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원문: 박성열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