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9년 8월의 어느 날, 미국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에 국적 불명의 선원들로 이루어진 네덜란드 깃발을 단 선박이 하나 도착합니다. 그리고 선박에서 하선한 약 20명의 앙골라 출신 계약 노동자 흑인의 움직임은 곧 미국 흑인 노예제도의 ‘시작’으로 간주됩니다.
영특한 스토리텔러이자 노마딕 DJ 겸 퍼스널/패션 브랜드 컨설턴트인 트레메인 에모리(Tremaine Emory)가 이끄는 패션 브랜드 데님 티어스(DENIM TEARS)는 2019년 9월, 미국 노예제도 400주년을 기념한 캡슐 컬렉션을 선보였습니다.
트레메인 에모리는 평범한 티셔츠와 스웨트셔츠 위에 노예 제도의 시발이 된 버지니아 주의 ‘VIRGINIA’라는 레터링을 박았고, 1619년의 ‘1619’라는 숫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흔해 빠진 셔츠 위에 엄숙하고도 성찰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위팔에 새긴 ‘1619’라는 굵고 진한 검정 글자의 존재감은 흑인 노예가 짊어져야만 했던 생의 무게를 지금 여기로 데려오는 마법의 숫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너 인마, 이 숫자를 보고도 그냥 지나치려고 한 거야? 잔말 말고 지갑 열어!
그보다 앞선 2019년 5월, 트레메인 에모리는 그의 또 다른 브랜드 노 베이컨시 인(No Vacancy Inn)과 브랜드 뉴발란스의 협업을 통해 공개한 컬래버레이션 신발을 무료로 나누는 프로모션을 진행하며 굉장히 흥미롭게 접근했습니다.
뉴욕타임스의 기사 「What Reparations for Slavery Might Look Like in 2019」를 읽고 난 후, 가장 매력적인 에세이를 써서 제출한 18세 미만의 학생에게 무료로 해당 신발을 나눠주기로 한 것입니다. 패션 브랜드와 뉴욕 타임스, 그리고 에세이 콘테스트의 만남이라는 신선한 조합을 통해 그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위한 계도자(?)가 되어 보기도 합니다.
‘트레메인 에모리’는 새로운 방식의 예술적 또는 문화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흑인 아티스트이자 패션/브랜드 컨설턴트입니다. 그는 절친한 동료 에이사이트(Acyde)와 함께 노 베이컨시 인이라는 뜨내기 예술 집단을 만들어 각국을 돌아다니며 패션, 미술, 음악을 매개로 새로운 밤 문화를 기획하고 즐깁니다.
일종의 ‘월드와이드 인싸-질’을 하며 싸돌아다니는 셈인데, 이를 통해 새로운 세대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커뮤니티와 문화를 만들어냅니다. 브랜드와 협업해 옷을 팔기도 하고 아티스트와 뭉쳐 공연을 기획해 실행하기도 하는 식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영감’을 불어넣는 삶을 삽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미국 힙합 씬의 거부 JAY-Z제이지는 오제이 심슨 사건을 레퍼런스로 활용한 곡 ‘The Story of O.J.’를 통해 흑인 래퍼 후배들을 향해 아래와 같이 일갈한 바 있습니다.
스트립 클럽에서 돈 뿌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뭔지 알아? 신용이야. 유대인들이 어떻게 미국의 모든 자산을 독차지한 건지 궁금했던 적은 있어? 내가 알려줄게.
근엄한 주류의 상징적인 모습을 한 성공한 백인 사업가들 앞에서 다리를 꼬고 ‘성공’을 논하는 흑인 래퍼 겸 사업가 제이지의 성공 신화는 흑인 래퍼 후배들에게 정신적인 지향점이 되었고 새로운 세대의 성공을 끝없이 확대하고 재생산했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버락 오바마, 르브론 제임스, 카니예 웨스트, 샘 오취리(?) 그리고 트레메인 에모리 등의 흑인이 몸소 체험한 개인적 성공의 경험은 그 자체로 하나의 귀감이자 위로가 되어 그를 믿고 따르는 인생 후배들의 깜깜한 앞길을 훤히 비추는 탐조등이 됩니다.
트레메인 에모리는 1981년 애틀랜타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후 뉴욕으로 건너 가 퀸스의 자메이카 지역에서 성장한 그는 뉴욕에 위치한 라과디아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영화와 연기를 공부하지만 ‘시간이 아깝다’라는 이유로 중퇴합니다. 이후 그는 돈을 벌기 위해 페덱스(FeDex)에 취업해 1시간에 400박스의 택배 물품을 트럭에 싣는 일을 합니다. 역시 무엇보다 생활이 앞서는 것입니다…
다소 투박한 삶처럼 보이지만(실제로 외모가 실로 투박합니다), 그는 6살 때,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의 이름을 패션(Fashion)으로 짓고 학창 시절에도 에어조던 운동화를 구매하기 위해 배스킨라빈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부지런히 돈을 벌던 패션 감수성이 풍부한 사나이였습니다.
페덱스에서의 삶을 청산한 그는 빈티지 패션 스토어, 바니스 뉴욕(백화점), 버그도프 굿맨(백화점), 제이크루 등에서 재고 관리 및 판매 업무를 맡으며 패션업계에 발을 디딥니다. 이후 2006년, 그는 패션 브랜드 마크 제이콥스의 재고 관리 포지션으로 입사해 여러 지점을 옮겨 다니며 커리어를 쌓다가 2015년 마크 제이콥스 런던 컬렉션 스토어 매니저직에서 해고당합니다.
약 3만 8,000 파운드의 퇴직금을 받은 트레메인 에모리에게 주변에선 집을 사라, 저축을 해라 등의 따분한 잔소리를 던지지만, 그는 노 베이컨시 인이라는 브랜드의 결성 및 활동에 자신의 퇴직금을 모조리 박아버립니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이유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마크 제이콥스에서 일하는 동안, 사이드 잡으로 패션 브랜드 스투시, 가수 프랭크 오션 등의 브랜딩 컨설팅에 참여하고 DJ 활동도 꾸준히 하며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의 ‘가능성’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마크 제이콥스에서 30년 동안 일할 거란 생각을 안 했거든요.
- 트레메인 에모리
트레메인 에모리의 커리어를 따라가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트라이크 존을 지나치게 좁혀놓고 인생이라는 게임에 임할 필요가 있을까? 모든 경험은 연결이 되지 않을까?
그는 자신의 경험을 조금씩 확장하고 점과 점을 연결해가며 개인 브랜딩에 임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앙드레 말로 선생님의 명대사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는 성공적인 개인 브랜드의 비밀한 영업 전략을 멋지게 설명한다고 생각하는데, 트레메인 에모리의 발자취는 그것을 다시 한번 명쾌하게 증명하는 듯합니다.
인생은 당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동시에 준다. 그걸 어떻게 관리하는가가 당신을 정의 내린다.
- 트레메인 에모리
바닥으로부터 차근히 올라온 사람들의 마인드셋에는 ‘배움에 대한 열망’과 ‘열린 자세’가 숨어 있습니다. 트레메인 에모리 또한 인생을 부침의 연속으로 파악하고, 기쁜 일이건 비극적인 일이건 배우고 흡수하려고 노력하는 듯합니다. 그의 브랜드 노 베이컨시 인의 활동은 그러한 삶의 철학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냅니다.
그는 집도 없고 방도 없고 직업도 없고 어머니도 없이(창업 시기에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납니다) 각국의 길바닥에서(벼랑 끝에서) 파티를 열어 크리에이티브를 만들고 문화와 문화를 연결했습니다. 오죽하면 브랜드 이름이 ‘빈방 없음’이겠습니까.
그는 일본의 패션 브랜드(니들스, 캐피탈 등)를 소개해 주변에 유행시키며 패션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미국 흑인 노예 제도의 스토리를 담은 컬렉션을 열어 역사적인 성찰을 불러일으킵니다. 또한 버질 아블로, 사무엘 로스, 카니예 웨스트 등과 어울리며 관계를 통해 문화를 만들기도 합니다.
패션 브랜드이든 개인 브랜드이든 ‘정보’를 전달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따뜻한 진심이 담길 때, 그것의 가치가 배가되지 않을까 싶은데, 트레메인 에모리의 영리한 브랜딩 전략은 기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고 싶은 개인의 진실한 마음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소설가 알베르 카뮈 선생님은 언젠가 ‘경험’을 헛된 것’으로 이야기하며 우리는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겪는 것’이며 ‘견디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페덱스에서 박스를 옮기고 백화점에서 재고를 관리하고 물건을 판매하던 시절을 겪고 견디지 않았다면 현재의 그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겁니다.
상승이 있으면 하강이 있는 인생의 당연한 구성을 받아들이고, 겪고 견디는 순간들이 쌓였을 때 큼직하게 그려오던 이상적인 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부른 블랙 인플루언서 ‘트레메인 에모리’였습니다.
뭐, 상관없지. 나는 그렇게 생각을 맺었다. 눈앞에 어떤 흐름이 생겼다면 일단 흘러가 보면 된다.
- 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원문: 스눕피의 브런치
참고
- Tremaine Emory Shares His Metaphor for Life, HYPEBEAST RA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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