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바람 이야기로 글문을 열어보겠습니다. 해와 바람이 지나가는 사람의 옷을 벗기기로 내기를 하죠. 바람은 아무리 세게 불어도 사람의 옷을 벗기지 못합니다. 바람에 추우니까 옷을 더 꽁꽁 싸매거든요. 반면 해는 손쉽게 옷을 벗깁니다. 심지어 스스로 벗게 만들죠.
옷을 사람의 의견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옷을 벗기는 방법이 두 가지인 것처럼 우리가 말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로 두 가지입니다. 설득과 공감. 상대방의 의견을 굴복시킬 것인가(설득), 자진해서 동의하게 할 것인가(공감). 해의 방식이 옷을 벗기는 더 좋은 방법인 것처럼, 설득하기보다는 사람들을 공감하게 만드는 것이 더 효과적인 말하기 방식입니다.
대표적인 공감 화법은 썰 풀기 ‘이야기로 말하기’입니다. 제가 해와 바람 이야기로 설득과 공감을 설명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설득은 ‘내 주장 옳다’이고, 공감은 ‘네 이야기 재밌다’예요. 방점은 주장과 이야기에 찍혀있습니다.
우리의 말이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다면, 우리는 주장하기보다는 이야기로 말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주장보다는 재미를 찾을 수 있는 썰에 이야기에 본능적인 흥미를 느끼는 법이니까요.
이야기로 말하기: 장도연의 경우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건 최근에 좋은 예시를 보았기 때문인데요. 몇 달 된 것 같아요. 개그맨 장도연 씨(이하 편하게 장도연이라고 부르겠습니다)가 JTBC 〈말하는대로〉에 나왔습니다. 대중 앞에서 이야기하는데 주제가 명확합니다. ‘남을 위하는 나의 배려가 이기적일 수도 있다.’ 그리고는 개그맨 양세찬 씨(이하 역시 양세찬으로 편하게 부르겠습니다)와의 일화를 말해줍니다.
개그맨으로서 오랫동안 합을 맞춰온 둘. 양세찬이 주로 아이디어를 내고 장도연은 그 아이디어를 최대한 서포트했답니다. 나름대로 배려의 아이콘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말이죠. 꽤 좋은 파트너라고 생각하던 차에, 코너 뒤풀이에서 양세찬이 그럽니다.
누나는 너무 자기주장이 없어. 모든 걸 내가 책임져야 하니까 힘들었어.
장도연은 충격을 받습니다. 나는 너를 배려한 것이었는데 그게 힘들었다니? 선의로 한 배려가 나쁜 결과를 냈습니다. 서운하고 억울했다고 해요. 그 후 장도연은 일본엘 갑니다. 시모키타자와역을 찾아야 하는데 구글 지도가 오류를 내요. 길을 한참 헤맵니다. 그러다 근처 일본인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어봅니다. 아주머니는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죠. 그런데 지도상으로 역과 점점 멀어지는 거예요.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계속 따라갑니다.
드디어 어느 역에 도착했는데, 이게 그 역이 아니에요. 알고 보니 일본인 아주머니는 시모키타자와역이 어디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냥 본인이 아는 역으로 데려간 거죠. 여기서 지하철을 타고 시모키타자와역으로 가면 되잖냐고 하면서. 아주머니는 자기 나름대로 도와준 것이지만 엉뚱한 결과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장도연은 생각하죠.
아니 처음 본 나를 왜 배려해?
이때 장도연은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무언가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양세찬과의 일화가 떠올랐거든요. 그때와는 입장이 뒤바뀐 셈이죠. 입장을 바꿔보니 양세찬의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남을 위한 나의 배려가 이기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죠. 그리고는 다른 고민에 빠집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정도로 배려해야 할까? 결론을 내리지는 못합니다. 아직도 고민 중이라고 말하죠.
그때 장도연의 이야기를 듣고는 저도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습니다. 당시 저는 영화 리뷰를 한창 쓸 때였거든요. 그래서 어떤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이고 또 매력적인 이야기인지 판단해야 했고 그 기준이 필요했어요. 그때 장도연의 이야기를 우연히 보았고 보자마자 ‘아, 저게 핵심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장도연의 짧은 이야기는 매력적인 이야기의 핵심을 잘 드러내는 좋은 예시인 것 같아요.
매력적인 이야기란 무엇일까요. 듣고 싶은 이야기를 만드는 요소들은 물론 다양합니다. 서점에 들러 시나리오 작법이나 피칭 관련 책을 펼쳐보면 정말 뭐가 많죠. 간결하게 말하기, 독자가 누구인지 고려하기, 원하는 바를 두괄식으로 말하기, 또 어떨 땐 사실 미괄식이 좋다 등등. 그런데 이런 건 그때그때 골라 쓰는 기술에 가깝지 매력적인 이야기의 핵심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매력적인 이야기란 무엇인가
1. 같은 문제를 고민한다.
제가 생각하는 매력적인 이야기의 핵심은 이겁니다. 말을 하는 나와 말을 듣는 네가 같은 문제를 고민하는 것. 모든 매력적인 이야기의 확실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그건 독자를 자기편으로 만든다는 겁니다. 매력적인 이야기는 독자도 알지 못하는 사이 공통의 문제를 설정합니다. 어느새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같은 편이 되어있어요.
‘너와 나는 의견 다툼을 하는 적이 아니라 같은 문제를 고민하는 동료다.’ 매력적인 이야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목표지점을 향해 같이 나아가죠. 일단 같은 편이 되면 중간중간 이야기가 조금씩 어색해도 괜찮습니다. 독자는 이미 너그러워요. 이미 이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장도연은 일단 흥미를 끌 수 있을 만한 양세찬과의 일화를 슬쩍 소개합니다. 어쩐지 연예인의 뒷얘기를 듣는 것 같아 쉽게 몰입되는군요. 장도연이 양세찬과의 일화를 통해 남기는 것은 다음의 질문입니다. ‘선의의 배려가 이기적일 수도 있는가?’ 그에 대해 장도연은 서운했다는 자신의 감상을 남깁니다.
여기까지 보면 장도연의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건 효과적인 시작 방식입니다. 장도연은 처음부터 무언가 대단한 것을 말하지 않고 자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내밀하고 개인적인 일화를 통해 청중의 귀에 은근히 다가가요. 매력적인 이야기는 ‘나에게 있었던 일’에서 시작해서 ‘너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로 변하는 과정입니다. 내 문제가 우리의 문제로 변하는 과정이죠.
그러면 장도연의 문제는 어떻게 우리의 문제가 될까요? 장도연은 그 뒤에 바로 일본에서의 일화를 이어 붙입니다. ‘반대의 상황을 겪어보니 선의의 배려가 이기적일 수도 있더라.’ 이때의 일화는 역지사지의 상황인바, 가해자의 입장이었던 자신이 피해자의 입장이 된 일화를 통해 장도연 자신의 입장이 청중의 입장이 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면서, 장도연의 질문을 이번엔 우리가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여지를 제공합니다.
일본에서의 일화 없이 양세찬과의 일화만 있었다면 그건 개그맨끼리의 흔한 감정 다툼으로 그쳤을 겁니다. 반면 양세찬과의 일화 없이 일본에서의 일화만 있었다면 여행지의 낯선 사람에게 봉변당한 썰로 남을 뿐이죠. 그런데 두 일화가 붙어 있습니다. 앞선 양세찬과의 일화가 질문을 전제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질문을 머릿속에 입력한 채 일본에서의 일화를 해석하게 됩니다. 이걸 전문용어로 떡밥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떡밥이 있을 때 적극적으로 상상하게 됩니다. 두 일화를 맞붙여 뭔가 의미를 만들 수 있으면 기꺼이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왠지 기분이 안 좋은 날, 집을 나서다 껌을 밟습니다. 앗 이거 뭐야. 오늘 일진이 안 좋을 것 같은데. 이렇게 생각하는 게 보통의 사람이에요. 기분이 별로인 것과 껌을 밟은 것, 사실 별 상관없는 두 사건 사이를 연결하는 사람의 생각 방식.
이야기 창작에 최적화되어 있는 것이 사람의 생각 방식입니다. 어쩌면 이야기란 인간이 기억하는 방식, 인간 생각의 건축 방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도연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로 전염되는 이유이기도 하죠.
2.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중요한 건, 장도연은 그가 얻은 해답을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남을 위한 배려는 이기적일 수 있습니다’라고 구태여 결론 내리지 않고, ‘저는 결정을 못 내리고 있어요’라고 말해요.
이건 주체의 문제로 볼 수도 있습니다. 비슷한 주제의 글을 쓴 적이 있는데요. 좋은 문학 작품일수록 주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점에 관해 썼었어요. 뛰어난 시는 슬픈 내용을 담으면서도 소리 내어 울지 않고, 훌륭한 소설은 비극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감상적이지 않습니다. 주체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이야기만 남습니다. 이야기의 자리에 독자가 들어섭니다.
장도연도 그렇습니다. 주체를 지우고 이야기를 남깁니다. 장도연은 정답을 억지로 만들어 섣부른 교훈을 주거나 서둘러 훈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정답을 말하는 순간 주장이 되고 설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계속 고민한다는 사실 자체가 장도연의 진중한 태도를 대변하기도 합니다. 사실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 것’과 ‘같은 문제를 고민하는 것’은 거의 비슷한 종류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매력적인 이야기는 선생과 학생 사이가 아니라, 학생과 학생 사이에서 만들어집니다. 화자와 청자가 서로 학생의 관계일 때, 그들은 같은 문제를 고민할 수 있고 둘 중 누구도 정답을 가르치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이 선생이 되어 정답을 제시하려 하는 순간 두 사람은 더 이상 같은 문제를 고민할 수 없게 됩니다. 이야기는 가르침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야기의 본질
인상적인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중학교 1–2학년쯤이었던 같습니다. 작은 학원에 다녔어요. 공부를 아예 못 하지는 않았지만 잘 집중하는 성격도 아니었습니다. 그때가 다 그렇듯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더 좋아했어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소금물 문제를 풀었어요. 그 왜 소금물 안의 소금의 양과 농도를 구하는 문제 있잖아요. 잘 이해가 안 되어서 몇 차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왠지 그날따라 다른 친구들도 같이 문제에 집중했어요. 한 사람이 질문을 던지면 다른 사람이 또 질문을 던졌습니다.
조금 난이도 있는 소금물 문제 하나를 부여잡고 그때 저와 친구들이 모두 매달렸습니다. 열띤 토론을 벌였어요. 그때 쉬는 시간 종이 땡 하고 울렸습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계속 서로 질문하고 정답을 찾았습니다. 그 순간이 너무 좋았어요. 등에서 작은 소름이 올라오면서 짜릿한 희열을 느꼈습니다.
어릴 적 기억이 별로 없어요. 그런데도 이때만큼은 잘 기억나죠. 정답을 찾았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 걸로 보아 아마도 정답 자체보다는 그때 우리의 우연한 유대감과 동료의식이 더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생과 학생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해봤어요. 그때 선생님은 정답을 바로 알려주지 않고 우리를 정답으로 유도했고, 우리는 같은 문제 앞에서 함께 고민했습니다. 함께 고민했던 순간의 강한 동질감은 저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습니다.
동질감과 유대감. 저는 이런 것들이 이야기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떠올려 보면 예전에 읽은 생각노트 님의 방탄소년단에 관한 리뷰는 이야기의 본질을 짚는 글인 것 같아요. 해당 글은 방탄소년단의 스토리텔링 전략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룹 성장 과정에 팬들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들어 소속감을 부여한다는 건데요. 듣는 사람을 매료하는 것, 같은 고민을 하는 것이 이야기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매력적인 이야기는 이러한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이야기를 말합니다. 독자를 참여하게 만드는 이야기, 함께 정답을 찾아가는 이야기, 그래서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이야기가 매력적인 이야기입니다. 장도연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구하는 과정에 청중을 불러들이면서도 자신의 정답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장도연 씨는 참 좋은 스토리텔러인 것 같군요.
원문: Discus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