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일본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며 지냈던 적이 있다. 1년 동안 도토루라는 커피 전문점에서 일하며 생활했다. 한때 한국에도 명동 등지에 지점이 있었는데, 지금은 철수했지만 아마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내가 일했던 지점의 직원 수는 나를 포함해 대략 열두셋 정도로, 점장과 마스터(점포 주인)를 제외한 대다수가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었다. 시내에 국립대학이 있어서 전국 각지에서 온 학생들이 학교 공부와 아르바이트 등을 병행하다 졸업 이후 각자의 고향이나 도쿄 등의 대도시로 떠나는 것이 기본 구조였다.
가기 전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적응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일도 어렵지 않았으며, 이미 일본어 공부를 몇 년간 하고 갔던 나의 경우 다행히도 언어적인 문제가 없었기에 금방 어울려서 지낼 수 있었다. 다 같은 대학생이니 관심사가 비슷해 이야기도 잘 통하고 여러모로 좋았다.
하지만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신경 쓰이는 일이 일어났는데, 아르바이트생 중의 한 명인 O가 자꾸만 반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O는 나보다 6개월가량 먼저 들어와 일하고 있던, 나이는 세 살가량 어렸던 친구였다.
일본어 공부를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일본어에도 반말과 존댓말이 존재한다. 한국만큼 엄격하게 따지는 것은 아니나 나이의 영향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고, 존댓말과 반말의 구분이 ‘친밀감’에 따라 달라지는 등 경계가 흐릿하다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격식과 예절, 존중의 여부에 따라 사용되기에 또 한국과 완전히 다른 것만도 아니다.
아니 반말 좀 할 수도 있지, 뭐가 대수야? 하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겠으나, 문제는 O가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깍듯이 존댓말을 쓰고 나에게만 반말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O가 나를 괴롭히거나 한 것은 아니다. 사실 O는 나에게 무척 잘해주었다. 이것저것 알려주기도 하고, 같이 술을 마시러 가자고도 하고, 여러모로 친절했다. 그러니 나의 마음이 복잡할 수밖에.
당시에는 O가 그럴 때마다 생각이 많아졌다. O가 왜 저러는 것일까? 친해지고 싶어서? 하지만 이미 친하게 지내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지 않는 건 어째서일까? 특히 나와 동갑인 A, B, C 등에게는 아주 깍듯한데, 혹시 나를 무시하나? 내가 만만한가? 한번 뿌리를 내린 생각은 멈출 줄을 모르고 계속 뻗어 나갔다. 급기야는 O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스트레스를 받기에 이르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O의 입장이 이해가 간다. 사람들은 흔히 외국인을 대할 때 다소간 ‘유아’처럼 대하는 경향이 있다. 나이와 상관없이 대부분 그러한데, 일단 언어가 모국어가 아니다 보니 아무리 유창한 사람이라 해도 발음이나 구사하는 단어가 현지인에 비해 뒤떨어질 수밖에 없고, 아마도 그런 부분에서 유아적이라는 인상을 받게 되는 듯하다.
우리가 ‘비정상회담’이나 ‘미녀들의 수다’에 나왔던 출연진의 이미지를 어떻게 소비하고 그들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했는지 생각해보면 아마 쉽사리 이해가 갈 것이다. O가 아니므로 당시 O의 생각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때의 O 역시 그랬던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악의는 없이, 그저 본능적으로.
지금은 이렇듯 너그럽게 헤아리지만 당시의 나는 지금보다 이해력이 부족했고, 결국 참다못한 어느 날 매장에 손님이 없는 틈을 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O상, 나 궁금한 것이 있는데, 나에게만 반말을 사용하는 이유가 뭐야? 난 조금 신경 쓰이고 불편한데, 나도 앞으로는 존댓말로 말할 테니 그렇게 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나의 이야기를 들은 O는 깜짝 놀라 자긴 전혀 몰랐다며 미안하다고, 앞으로는 조심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O가 순순히 사과하고 납득해주어 나 역시 괜히 그랬나 싶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덩달아 사과를 해 그렇게 잘 해결되는 듯했다. 문제는 그날 있었던 일을 짤막하게 정리해 당시 사용하던 믹시라는 일본판 싸이월드 같은 SNS에 공유했을 때 일어났다. 또 다른 일본인 친구들이 이런 댓글을 단 것이다.
힘내! 난 외국인에 대한 차별은 절대 반대야! 난 재일교포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차별 금지! 화이팅!
댓글을 보자 기분이 몹시 미묘해졌다. 난 차별 받았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그냥 서로 간의 오해라고 생각했는데. 난 그저 O가 좀 무례하거나 무신경하다고만 여겼는데. 그런데 그 댓글로 인해 어느 틈에 ‘차별’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라는 개인과 O 사이의 어떤 상호작용과 무관하게 갑자기 나는 O로부터 차별을 받은 것이 되어버리고, O는 나를 차별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O와 있었던 일보다 해당 댓글이 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해당 댓글을 본 순간 오히려 ‘외국인’이자 ‘한국인’이라는 나의 벽과 한계를 명확히 깨달은 느낌이었다. 그때 알았다. 때로는 위로가 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무신경한 위로의 말이 차별 구조를 더 공고히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차별이 말을 통해 더 구체화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최근 임대 아파트를 둘러싼 각종 논란과 그에 대해 나오는 어떤 반응들을 보며, 그것을 더욱 명확히 느낀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13평에서 어떻게 애를 낳고 사느냐고.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실제 해당 아파트의 평수가 13평이었건 아니건 관계 없이, 실제로 13평이 아이들을 키우기에 빠듯한 공간이건 아니건 관계 없이, 그런 발언은 이미 그런 환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상처가 된다. 그런 환경에 처한 사람들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 되어버린다.
당연히 집은 넓을수록 좋은 것이고, 중산층에게는 중산층 나름의 욕망이 있는 것이므로 이 점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향후 자산이 상승할 가능성이 줄어든다거나, 사라진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중산층의 분노나 허탈감, 허무함 등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누군가는 그러한 발언으로부터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다.
같은 선상에서 ‘가난한 이들은 아이를 낳을 자격이 없다’거나, ‘가난한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것은 아동학대’라는 말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말이 비록 어렵고 가난한 환경에서 자신을 자라나게 한 무책임한 부모에 대한 비판이더라도, 더는 자신과 같은 아이들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이더라도, 결국 해당 발언을 통해 가장 상처를 입는 것은 이미 그러한 상황에 놓인 이들이다. ‘가난함에도 아이를 낳은 부모들’ 이상으로 그 밑의 아이들이 더욱 큰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우리의 발언이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가서 닿고 우리가 하는 행동이 어떤 효과를 일으키는지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하면 좋겠다. ‘13평이어도 충분히 살만하다’나 ‘13평에서 어떻게 사냐’ 모두 비슷한 지점에서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들이다.
세상이 지옥 같아서 아이를 낳지 않겠다거나, 이런 세상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아동학대라는 말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럴 경우 그런 말을 들은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과 무관하게 ‘지옥’을 사는 것이 되어버린다. 나름의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고통을 느끼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이 불현듯 ‘아동학대’를 당하는,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을 아이들이 되어버린다.
그럼 대체 무슨 말을 하란 말인가, 아무 말도 하지 말란 말인가, 하는 반문이 나올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처럼 어렵게 나온 말이야말로 좋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말이란 그런 질문을 통과해서 나와야만 한다고, 듣는 사람의 여러 층위를 고려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좋은 정책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원문: 한승혜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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