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20조 이상의 시장이 ‘수기 영수증’으로 돌아가는 동대문
SK텔레콤의 연 매출은 18조 원이다. 이와 비슷한 규모의 시장이 ‘동대문 도매’ 패션 시장이다. 실제로는 동대문이 훨씬 크다. 기록되지 않은 현금 거래, 그리고 소매 거래가 제외된 ‘도매시장’만의 금액이기 때문이다.
SK텔레콤 이상으로 큰 동대문 시장이 놀라운 점은, 업자들의 ‘수기’와 ‘기억’으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SK가 자동이체 없이 우리에게 매월 결제액을 간이영수증으로 써서 전달한다 생각해 보자.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동대문은 그렇게 돌아간다.
전 세계에서 가장 IT가 발전했다는 한국에서, 유독 동대문 패션 시장은 ‘손과 기억’에 의존하는 이유가 뭘까? 이는 동대문을 성공으로 이끈 ‘올인원’ 시스템 때문이다.
분업화된 글로벌 패션 시장과 달리, 제조-유통 올인원 동대문 시장
글로벌 패션 산업은 제조, 유통 등이 철저히 분리된 ‘분업’ 산업이다. 나이키의 본사는 포틀랜드 인근에 있으나 제조는 인건비가 저렴한 동남아 신흥산업국에서 이뤄진다. 밀라노에도 수많은 패션 기업이 있지만생산은 일부 명품의 중요 작업만 할 뿐 개발도상국에 아웃소싱을 맡긴다.
반대로 동대문은 디자인, 생산, 판매가 모두 한곳에서 이뤄지는 올인원 시스템이다. 꽤 이례적인 형태지만 서플라이 체인이 한곳에 있어 주문과 요청에 시시각각 대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밀집된 집적도를 바탕으로 한, 빠른 움직임으로 동대문은 성공할 수 있었다. SS/FW로 대표되는 패션 시장과 달리, 동대문은 시도 때도 없이 ‘신상’이 등장한다.
하지만 디자인, 도매, 소매, 제조 업체가 난립한 동대문은 체계적이고 통일된 거래 시스템을 갖출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현금만이 믿을 만한 수단이었고, 현금으로만 옷을 사고파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연 20조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는 낙후된 거래 방식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사입삼촌 편의를 더해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
2010년대 중반부터 동대문의 유통 시스템을 개선하려는 스타트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동대문의 도소매 시장은 매우 복잡해서, 소매 업체 1곳이 1,000개가 넘는 도매상과 거래를 하기도 한다.
이 같은 복잡한 유통을 중개하는 사람이 바로 ‘사입삼촌’이다. 동대문 스타트업들은 사입삼촌의 역할을 축소하고, 도소매 업체 간 직거래를 가능케 함으로써 유통 혁신에 박차를 가했다. 일부 스타트업은 사입삼촌이 머지않아 사라질 것으로 예상한다.
후발주자 쉐어그라운드의 접근법은 반대다. 브랜디, 에이블리, 인스타그램 등 온라인 시장을 기반으로 한 마이크로 소매업이 증가하면서 사입삼촌의 역할은 오히려 확대될 것이라는 것. 그래서 쉐어그라운드는 현장의 핵심인 ‘키맨’ 사입삼촌들을 중심으로 한 B2B 거래 서비스 ‘셀업’을 출시했다. 사입삼촌은 동대문 도소매를 연결하는 연결고리이기에, 이들을 통해 자연히 도소매로 서비스를 확대하는 전략이다.
독점이 아닌, 더 원활한 중개를 끌어내는 플랫폼 비즈니스들
인터넷은 중개상을 없앤다고 하지만, 항상 그렇지만은 않다. 빌 게이츠도 1990년대 중반 온라인이 직거래를 활성화시켜 ‘마찰 없는 자본주의’를 예견했지만, 이후 20년이 넘는 동안 중개상과 이들을 중심으로 한 플랫폼은 확대됐다.
대표적인 서비스가 바로 잡 매칭 플랫폼 링크드인이다. 구인, 구직자는 이 플랫폼에서 서로 메시지를 보내고 접촉할 수 있지만, 링크드인의 주요 고객은 전문 리크루터다. 마찬가지로 이베이의 핵심 고객은 개개인 직접 거래가 아닌 신뢰도 있는 전문 판매자다. 직접 거래의 허들이 낮아지자 중개상의 입지가 더 커진 것이다.
사입삼촌을 통한 혁신으로, 도소매 경쟁력 강화까지
쉐어그라운드 역시 링크드인과 유사하다. 기존 동대문 스타트업과는 달리, 사입삼촌의 삭제가 아닌 유통 방식을 개선해 동대문 시장의 현대화를 주도한다.
사입삼촌이 ‘셀업’을 통해 모바일로 거래 기록을 명확하게 남기며, 세금계산서 처리와 사입 업무 편의가 개선됐다. 불투명성이 사라지며, 도소매 간 갈등 역시 사라졌다. 이를 통해 도매와 소매는 더 많은 시간을 얻었고, MD와 마케팅 등 핵심 역량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게 됐다.
동시에 사입삼촌의 역할은 더욱 커졌다. 사입삼촌은 그냥 물건만 떼어다 주는 존재가 아니다. 긴 동대문 생활로 CS, 배송, 마케팅 등 소매 사장님들의 여러 문의를 받고 해결해준다. 한때는 동대문 혁신 방해 요소로 꼽힌 중개상 삼촌들이, 문제 해결사로 변모한 셈이다. 이렇게 동대문 내 사입삼촌을 중심으로 B2B 거래를 현대화하는 게 쉐어그라운드의 방향이다.
양지로 나온 동대문, 이제는 오프라인도 현대화
일각에서는 이제 동대문은 하락세라고 이야기한다. 밀리오레 등 동대문 소매상가의 공실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오프라인 중심의 소매상이 온라인으로 이동해 생긴 착시 현상이다. 동대문 도매시장은 2000년대 초반 연 매출 약 10조 원 규모에서 현재 약 18조 원으로 꾸준한 성장세를 보였다. 동대문은 여전히 성장 중이며, 단지 변화의 성장통을 겪을 뿐이다.
변하지 않던 아날로그 동대문도 변화했다. 탈세를 위해 세금계산서 발행을 꺼려했지만 지금은 법인 기업이 속속들이 생겨나고, 젊은 3040 사업가들이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투명하고 확실한 거래를 바탕으로 1금융 서비스도 확대되는 등 사금융과 지하경제로 얼룩진 동대문이 양지로 나온 셈이다.
쉐어그라운드는 동대문의 현대화를 이끄는 스타트업 중 하나다. 동대문의 도매, 소매, 사입삼촌과 윈윈하는 거래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 이제는 변화하는 동대문의 미래를 이들을 통해 엿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성공한 쇼핑몰 사장, 아예 동대문 패션 유통의 ‘판’을 뒤흔들기까지: 쉐어그라운드 이연 대표 인터뷰 ☞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