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TV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시선을 사로잡는 장면이 나와 리모컨 동작을 멈추었다. <오! 삼광빌라!>라는 드라마였다. 시선을 사로잡았던 이유는 드라마에 안전모를 착용한 인테리어 기사가 나왔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 건축가와 건설현장 노동자가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는 종종 있었지만, 인테리어 기사는 처음이었다.
싱크로율 몇 %?
인테리어 기사의 현장에서의 호칭은 ‘기사’이고, 공식적으로 쓰이는 명칭은 현장 관리인이다. 드라마 속 이빛채운(진기주 분)은 인테리어 현장 관리인이고 우재희(이장우 분)는 건축사사무소 대표다.
우재희와 이빛채운의 만남 씬은 굉장히 인상 깊었다. 현실과 비현실이 반반씩 섞인 느낌이었다. 현장의 여러 요소를 디테일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동시에 극적인 요소를 반영하기 위함이었는지 비현실적인 장면도 눈에 띄었다. 지금부터 드라마 속 장면들을 중심으로 현실과 드라마 간의 싱크로율을 분석해볼 것이다.
1. 현장 내 갈등과 다툼: REALITY 99%
첫째, 건축사사무소 대표 이장우랑 인테리어 기사 진기주가 다투는 모습이다. 현장은 실제로 다툼이 많이 벌어진다. 현장 사람들은 현장을 전쟁터로 비유한다. 설계자와 시공자의 다툼, 현장 관리인과 작업자와의 다툼, 그리고 현장 관리인 간의 다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언성을 높이는 건 흔한 일이다. 감정이 격해지면 연장이나 안전모를 땅에 던지기도 한다. 현장에 있다 보면 싸움꾼이 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의 현장을 담당하는 회사는 하나인 게 상식적이지만, 인테리어 현장은 그렇지만도 않다. 규모가 좀 큰 인테리어 공사나 신축 공사를 하다 보면 여러 인테리어 업체들이 들어와서 함께 작업을 하게 된다. 이 업체들은 공사 성격에 따라 건축 감리·건축 설계·인테리어 설계업체·인테리어 시공업체로 나뉘기도 한다.
필자가 동대문 apM 쇼핑몰 인테리어 공사를 맡았을 때 총 20개가 넘는 인테리어 업체들(!)이 와서 공사를 함께 진행했다. 한 건물에 20여 개의 업체들이 들어와 있고 그 업체들이 부른 기술자들이 들어와서 공사를 진행하는 것이다. 정말 난장판이다. 전쟁터다. 그러다 보니 불화가 생기고 종종 싸움이 벌어진다.
그래서 우재희와 이빛채운이 마감 문제로 옥신각신 싸우는 장면은 인테리어 기사로 일했던 내게는 매우 공감 가는 장면이었다. 전쟁터 같은 현장을 매우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장면이었다.
2. 우재희와 이빛채운의 다툼: REALITY 10%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동일한 장면이 비현실적이기도 했다. 건축사사무소 대표와 인테리어 기사의 언쟁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보기 드문 일이다. 다양한 케이스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인테리어 회사는 건축사무소로부터 일을 받는다. 인테리어 회사가 건축사사무소로 일을 공급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러한 산업 구조 때문에 인테리어 회사는 을에 가깝고 건축사 사무소는 갑에 가깝다. 그리고 인테리어 기사는 인테리어 회사의 소속이다. 그래서 ‘을’ 소속에 가까운 인테리어 기사가 ‘갑’인 건축사 사무소 대표에게 당당히 의사표현을 하는 모습은 다소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하지만 내심 통쾌하기도 했다. 이게 드라마의 역할 아닌가. 나는 속으로 우재희가 내심 이 언쟁에서 지기를 바랐다.
3. 우재희가 꺼낸 도면: REALITY 30%
우재희는 싸우는 도중 조끼 주머니에 꼬깃꼬깃 접어 넣어뒀던 도면 한 장을 꺼낸다. 그리고 도면을 확인해 보라며 윽박을 지른다. 이빛채운은 당황한다. 이 장면에서 이빛채운은 도면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것처럼 표현되었고, 그래서 우재희가 건네준 도면을 확인하고 멋쩍어한다.
건축사사무소 대표는 도면을 잘 알고 인테리어 기사는 도면을 잘 확인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한 것 같아 현장 관리인으로 일했던 나는 좀 불편한 장면이었다.
현장에서 도면은 전쟁터의 총칼이면서 현장 소통의 언어다. 설계자가 그려놓은 그림을 현장관리인이 좀 더 자세히 그려 작업자들에게 설명하고 감독·관리한다. 그만큼 현장 관리인들은 도면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우재희가 꼬깃꼬깃 접어둔 도면을 조끼 속에서 꺼내는 장면도 다소 어색했다. 건축사사무소 대표들은 도면함에 수십 페이지의 도면을 가지고 다닌다. 현장 관리인도 링으로 제본하여 한 손에는 도면을, 한 손에는 줄자를 꼭 쥐고 다닌다. 내가 첫 현장에서 기사로 일했을 적의 기억이 떠올랐다. 무언가 감독할 짬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50페이지 정도의 도면을 늘 끼고 다녔었다.
우재희와 이빛채운의 손에 도면함이 들려있고 도면의 내용을 가지고 옥신각신 논쟁했다면 좀 더 멋진 장면이 나오지 않았을까? 이건 내 욕심이다. 드라마는 지루하게 만들면 안 되니까.
4. 수도 배관이 터져 이빛채운이 급히 수리하는 장면: REALITY 90%
수도 배관이 터져 물이 분수처럼 쏟아지는 장면이다. ‘과한 거 아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물이 쏟아지는 장면 그 자체로는 전혀 과하지 않았다.
나 같은 경우에도 현장에서 소방 배관 보수 작업 중 배관이 터져서 바닥이 흥건해진 적이 있었다. 물바다가 된 현장의 물을 빼느라 온몸의 땀을 빼냈던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단독주택 공사를 진행하며 오수 배관 하나가 막혀 똥오줌이 역류한 적도 있다. 땅을 파고 배관 하나를 찾아 정화조와 연결했었다.
드라마 속 배관에서 물이 분수처럼 쏟아지자 이빛채운은 옷이 다 젖어가며 연장을 들고서 수리한다. 이런 이유로 인테리어 기사가 급한 대로 수리하는 이 장면이 매우 현실적이었다. 인테리어 기사는 현장에서 구르면서 이것저것 다 할 줄 아는 ‘다기능공’이 된다.
5. 사다리에서 작업하는 이빛채운을 끌어내리려는 우재희: REALITY 0%
사다리에서 작업하는 이빛채운을 무턱대고 우재희가 끌어내리려 한다. 말도 안 되는 장면이다. 굳이 작업을 하는 이를 끌어내릴 이유도 없고, 끌어내리는 행위 자체도 살인행위에 가깝다. 내가 사다리 위 사람이었다면 사다리에서 내려와 우재희 턱에 원투 스트레이트를 꽂았을 것이다.
사다리는 주의를 해도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는 위험한 장비다. 실제로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1월부터 공사·작업 용도의 사다리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 작업용 사다리로 인한 사고 건수가 10년간 3만 8859건에 이르는 만큼 안전을 위한 조치라는 이유였다. 이런 현실에서 2인 1조가 원칙인 사다리 작업을 혼자 힘겹게 하고 있는 사람을 무턱대고 잡아당긴다?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REALITY 0%다.
최근 부동산이나 인테리어 관련 예능과 다큐가 많아졌다. 집을 대신 구해주는 프로그램 <구해줘 홈즈>이 인기를 얻고 있고, 필자는 EBS의 <건축탐구, 집>을 즐겨 보고 있다.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전문가는 전부 인테리어 설계자 혹은 건축가다. <극한직업>에 시공기술자들이 나오긴 했지만 현장관리인은 어디에서도 소개해주지 않아 아쉬웠던 참이었다. 인테리어 기사가 드라마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반가운 일이었다.
드라마 속에서 이빛채운이 오랫동안 인테리어 기사로 일하며 인테리어 기사의 모습이 드라마를 통해 대중들에게 입체적으로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원문: 이현우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