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Lookout Investor의 「Pedal Pushers: When Bikes Became the Vehicle for a Bubble」을 번역한 글입니다.
오늘날과는 다르게 우스울 정도로 앞바퀴가 큰 페니 파딩(Penny Farthing) 자전거는 1870년대 초반부터 1880년대 초반까지 영국에서 대표적인 자전거였다. 하지만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일상 교통수단이라기보다는 신기한 발명품에 더 가까웠다. 게다가 페니 파딩은 비쌌고, 불편했다. 얼마나 불편했으면 주력 모델의 별명이 “본 셰이커(boneshaker)”였다. 또한 좌석이 너무 높아서 올라타 페달을 밟기도 어려웠다.
1886년, 존 켐프 스탈리(John Kemp Starley)가 페니 파딩을 개량해 오늘날 우리가 타는 자전거와 비슷한 모습으로 바꾼 신형 자전거를 만들었고, 최초로 대량 생산 시대를 열었다. 앞뒤 바퀴를 같은 크기로 만들었고, 바퀴를 굴리기 위해 체인을 달았다. 또한, 공기 타이어를 달아 승차감을 훨씬 더 부드럽게 해주었다. 말할 것도 없이 프레임도 훨씬 작아져서 거치하고 타기도 훨씬 쉬웠다.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안전 자전거(Safety Bikes)”라는 별명을 얻었다.
닷컴 시대를 비롯한 혁신이 주도한 거품들과 비슷하게, 기술은 거품에 불을 붙이는 불똥 역할을 했다. 대다수 거품은 기술과 연관돼 있다. 기술 혁신을 둘러싼 흥분, 누가 시장을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불확실성, 기회를 놓칠 것 같은 두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금융 거품과는 달리, 기술 혁신이 주도한 거품은 신기술 생태계를 발전시키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유리할 수 있다.
“안전 자전거”의 등장으로 불꽃이 점화되었고, 자전거 붐이 진행되었다. 뉴매틱 타이어 컴퍼니(Pneumatic Tire Company)에 대해, 이코노미스트는 1896년 4월 25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난주 보도했던 뉴매틱 타이어 컴퍼니의 사업에 300만 파운드라는 엄청난 자금이 투자되자, 특히 투기성이 강한 더블린과 버밍엄에서 자전거 주식에 대한 투기를 배가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자전거 붐
기술 혁신이 자전거 붐을 일으켰다. 기존 자전거(페니 파딩)는 불편하고 페달을 밟기 힘들며 실용적이지 못했다. 안전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문제는 세 가지 핵심 기술 혁신으로 만들어진 “안전 자전거”로 해결되었다.
- 첫째, 뒷바퀴에 체인을 걸어 움직이게 함으로써, 자전거 타는 사람이 페달을 실제 밟은 것보다 바퀴를 더 많이 돌리게 했다.
- 둘째, 공기 타이어 또는 공기 주입식 타이어가 장착되어 승차감이 훨씬 더 편안해졌다.
- 마지막으로, 더 작아진 앞뒤 바퀴를 연결해 주는 다이아몬드형 프레임은 바퀴를 훨씬 더 쉽게 꼈다 뺐다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결과 “안전 자전거”는 오늘날 우리가 타는 자전거와 아주 비슷하게 되었다. 이 기본 설계는 진정한 기술적 돌파구였고, 이후 130년 동안 이어져 왔다.
자전거 산업은 조립 완제품 제작 회사에서부터 부품 제조 회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회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뉴매틱 타이어 컴퍼니와 체인 레버 컴퍼니(Chain Lever Company)처럼 자전거의 특정 부분에서 사명을 따온 많은 새로운 자전거 회사가 생겨났지만, 대부분이 완제품을 생산했다.
“안전 자전거”의 인기는 빠르게 높아졌고, 제조업체들은 19세기형 인플루언서들을 통해 가능한 한 자사 주식을 홍보했다. 1897년 5월 22일 자 이코노미스트 기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자전거 회사들이 속속 등장했고, 전국의 투자자들이 투자 설명서를 얻으려고 몰려들었다. 회사는 달랐지만, 투자 설명서에는 모두 “완벽한 자전거”라거나, “기존 자전거와는 차별된 성능 개선”이라는 주장이 담겨 있었다.
윌리엄 퀸과 존 터너의 신간 『Boom and Bust』에서는 많은 자전거 회사가 ‘인플루언서’ 즉 유명인을 고용했고, 신문사에 돈을 주고 좋은 기사를 쓰도록 했다고 설명한다. “안전 자전거”가 발명되고 몇 년 동안은 인기가 적당했지만, 1896년부터 관심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더 편안하게 타게 해준 다이아몬드형 프레임이 발명될 무렵이었다.
원래 자전거 회사들은 절대 거품을 만들어내려고 한 적이 없었다. 대다수 회사는 단지 자사 제품을 혁신하고 개선하기 위한 자본이 필요했을 뿐이다. 처음 거품을 만든 세력은 LBO(leveraged buyouts)를 통해 회사를 인수해 더 비싼 값에 되팔려는 외부의 거물/투자자들이었고, 자전거 산업의 주가 수준을 고평가시켰다. 이윽고 더 많은 자전거 회사가 나타났고, 조기에 주식을 상장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자전거 회사가 주식 상장에 성공한 이유는 일반 영국 투자자들이 과장 광고에 잘 속아 넘어가기 때문으로 보인다.
- 이코노미스트는 1896년 6월 27일 자.
1896년 중반이 되자, 이들 회사에 대한 투자는 시장의 수요와 공급 수준을 넘어섰다. 예를 들어, 인듀어런스 튜브 앤 엔지니어링(Endurance Tube and Engineering)은 지난 4년 동안 수익을 냈는지를 밝히지 않고도 19만 파운드에 거래소에 상장됐다.
어니스트 테라 훌리(Ernest Tera Hooley) 같은 수완가들은 투자자들이 잘 속아 넘어간다는 점을 알아챘고, 전술을 바꿔 소규모 자전거 회사를 사들인 다음, 제품에 대한 헛된 약속을 남발하면서, 한편으로 주식을 팔아치웠다. 종종 이런 외부 투자자들의 투자는 수익성이 별로 없는 경우도 있었다. 왜냐하면 최초 인수자가 사업을 홍보하는 데 너무 많은 돈을 썼고, 따라서 회사를 되팔 무렵에는 이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거품은 암스테르담, 런던, 파리 같은 주요 도시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자전거 광풍의 경우 175개가 넘는 자전거 회사 중 72곳이 금융 중심지가 아닌 중형 산업도시 버밍엄에 있었다. 게다가, 자전거 회사 주식 거래 대부분이 버밍엄 증권 거래소에서 이루어졌다. 동시에, 당시 등록된 모든 특허권의 15%가 자전거와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수많은 투자자를 끌어들인 주요 동력이었다.
새롭게 발명된 “안전 자전거”에 흥분한 투자자들이 자전거 회사에 투자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1895년 12월부터 1896년 5월까지, 자전거 지수(cycle index)는 258% 상승했다. 이렇게 지수는 거품 수준으로 계속 상승했지만, 많은 자전거 회사들이 다른 업종으로까지 발을 넓히면서 성공하기 시작하자 투자자들은 환호했다.
한편 인기에 힘입어 주가가 상승하자, 투자자들은 새로 설립된 회사들에 돈을 쏟아부었다. 1896년 4월 자 이코노미스트 기사는 주로 던롭 타이어 관련 특허권에 근거해 뉴매틱 타이어에 “300만 파운드라는 파격적인 금액이 투자되었음”을 지적했다. 1896년 2분기, 자전거 회사 주식에 투자된 신규 자본이 정점을 찍었고, 이는 자전거 주가 거품이 고점을 찍은 것과 일치했다. 또한 몇 달 후인 1897년 1분기 신규 자전거 회사 설립 건수가 정점을 맞았다.
거품이 붕괴되기 직전에도 투자자들은 자전거 시장에 기꺼이 뛰어들었다. 1896년, 뉴 프리미어 사이클 컴퍼니는 설립된 후, 자산이 “10만 파운드 이상”이라고만 명기된 투자 설명서에도 시가총액 70만 파운드로 증권 거래소에 상장됐다. 자본 투자와 수요는 엇갈리기 시작했다. 1897년 7월 이코노미스트 기사는 이렇게 경고한다.
우려스럽게도 자전거 주식에 투자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불행한 결과를 맞이할 것이다. 버밍엄과 코벤트리에 있는 자전거 부품을 만드는 소규모 금속 회사들은 호황을 이용해 자기 회사를 대중에게 팔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최근 설립된 대다수 회사도 해당된다.
1897년 9월이 되자 상황이 악화했고, 영국의 자전거에 대한 수요는 대부분 꽉 찾으며, 미국 및 해외 자전거 회사들이 시장에 진출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당시 높은 주가가 유지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수백만 파운드의 자본이 유입되었지만, 그 생각은 망상이었음이 드러났다. 자전거 주식에 투자해 수익을 낸 사람보다 손실을 본 사람이 훨씬 많았다.”라고 지적한다.
붕괴
1898년 4월, 이코노미스트가 살펴본 두 곳의 유명 자전거 회사의 주가는 고점 대비 60% 폭락했고, 그중 던롭은 “난공불락”의 경쟁 우위가 있는 회사로 평가되었던 곳이었다. 자전거를 팔고 배당금을 지급하던 많은 회사가 전면적인 붕괴의 길로 치달았다.
던롭이 획기적인 기술 혁신을 도입한 것은 사실이나 제품과 최근의 주가를 볼 때도 위험했지만, 과도한 부채를 포함한 부실한 재무 구조를 보면 훨씬 더 위험한 투자였음이 드러났다.
다른 많은 거품 붕괴와는 달리 자전거 광풍의 붕괴는 대부분 침착했고, 실제 다른 산업에 도움이 되었고, 소비자들이 원하는 기술 향상을 끌어냈다. 거품이 만들어진 것에 비해 붕괴는 1907년까지 10년 동안 아주 서서히 진행되었다. 거품에 동참했지만 일부 회사들은 붕괴로 입은 피해가 상당히 적었다. 일부는 다른 업종으로 사업을 전환했고, 자전거 산업이 여전히 수익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1899년으로 붕괴가 이어지며 이코노미스트는 “경상 이익으로 배당금을 지급하는 회사는 23곳에서 13곳으로 줄어들었다. 순이익과 투자 자본 규모를 비교해야 보다 정확한 업계의 처지를 파악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자전거 회사들의 평균 수익률은 3.5%로, 기술에 열광한 투자자들의 기대에는 크게 못 미쳤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1899년 자전거 회사들의 주가는 붕괴 국면에 접어들었고, 계속 배당금을 지급하지 못했으며, 자산, 특허권 및 영업권에 대한 가치를 감가 상각해 갔다고 지적했다.
자전거 광풍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영국의 경제 전반과 그 발전에 이로운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회사들은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제품을 내놓았고, 거기에 사용된 기술은 결과적으로 다른 산업들의 기반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전거 회사들은 건설, 자동차, 오토바이, 항공기, 볼 베어링 산업이 자리 잡는 데 일조했다.
기술 혁신은 사람들에게 신기술이 어떻게 한 산업을 “핫한” 산업으로 바꾸어 놓는지 알게 해주었다. 투자자들이 신기술에 지나치게 흥분해서 거품으로 변질시킬 때 위험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 기술이 합법적인 한, 닷컴 거품 속에서도 아마존이나 구글 같은 장기적인 승자를 만들어 낸다. 터지고 나면 아무런 기술 개선을 남기지 않는 순수한 금융 거품과는 다르다.
자전거 거품 이후, 유명했던 일부 회사들은 성공을 계속해나가기 위해 업종을 전환했다. 이중 가장 유명한 회사 중 하나는 던롭 타이어(Dunlop Tire)다. 이 유명 자동차 타이어 회사는 원래 뉴매틱 타이어 컴퍼니로 거품 동안 자전거 제조 회사로 출발했다.
러지 휘트워스(Rudge Whitworth)는 오토바이와 스포츠카 산업이 생기는 데 도움을 주었다. 지금까지 가장 인상적인 업력을 가진 회사는 자전거 산업 호황기에 시작해 오늘날도 여전히 자전거를 만드는 롤리 바이시클(Raleigh Bicycle)이다.
자전거 거품의 가장 흥미로운 점들 중 하나는 다른 거품과 비슷하다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것이다. 다른 거품이나 광풍과는 달리, 자전거 광풍은 약 10년 걸쳐 서서히 붕괴되었다. 일부 자전거 회사가 다른 업종으로 사업을 전환했고, 자전거의 수요가 여전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제품 없이 발생했기 때문에 변동성이 훨씬 더 강했던 사우스시 거품 같은 다른 거품과는 양상이 달랐다. 자전거 거품 또는 광풍은 기술 및 산업 발전 측면에서 영국과 전 세계에 전반적으로 유익했다. 산업계가 말 그대로 더 부드럽고 효율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준 볼베어링 같은 새로운 혁신과 창조를 가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원문: 피우스의 책도둑 &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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