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이 글은 고려 말, 조선 초 혁명과 문명 전환을 다룬 “건국의 정치” 저자 김영수 교수님의 강의를 정리한 것입니다. 교수님의 강의는 6월 7일 토요일 신촌 미플에서 정도전과 세종을 주제로 한 차례 강의가 더 열리니, 많은 참석 부탁 드립니다.
민족주의와 식민사관에 2중으로 까이는 조선
조선이 아주 흉악하다는 개념은 민족주의를 정립한 신채호 선생이 제시한 것이다. 그는 19세기말의 시대적 위기를 보며 무엇으로 극복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는 먼저 유교사관을 비판한다. 한국역사를 볼 때 노예의식이 문제인데, 유학의 사대의식이 그런 노예의식이란 것이다. 그는 당대의 문제는 조선 유교의 사대주의 때문이라고 결론짓고, 조선을 우리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대라 규정했다. 당연히 성리학도 부패한 걸로 이야기된다.
식민사관도 조선을 흉악한 나라로 이야기했다. 조선 역사는 고대에 정체된 나라이고, 스스로 발전할 동력이 없다고 비하했다. 그래서 우리가 구해준 거라고;;; 신채호 선생은 의도는 달랐지만, 결과적으로 이상하게 자기 부정한 꼴이 됐다.
여기서 반전을 이끌어낸 학자가 한영우 교수다. 요지는 조선이란 나라가 고려 말 위기를 개혁하며 등장한 국가며, 정도전이 그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마르티나 도이힐러라는 학자 역시 조선은 11세기 이후 동양에서 가장 개혁적이고 야심찬 프로그램과 국가 혁신을 통해 나타난 국가라 주장했다.
실제로 그렇다. 정도전의 생각을 보면 매우 과격하다. 그러니 우왕 원년 신진성리학자들이 다 유배 갔지만, 정도전만 10년 동안 복직이 안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밑바닥까지 가는 경험을 하다 보니 당시로서는 나올 수 없는 생각이 나왔다. 왕이 백성의 호적 장부를 받을 때 절을 하고 받으라는 거나, 민심이 떠나면 천명도 떠난다는 것은 왕정 하에서 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러다 이방원한테 죽은 것이겠지만…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는 왕에 대한 조항도 있지만, <경국대전>에는 다 빠졌다. 왕은 법률 외적 존재, 신성한 존재로 취급된 것이다.
한반도 역사상 최대의 토지해혁을 이룬 조선
겉으로 보이는 개혁부터 보자. 최영과 이성계는 우왕 14년 무술정변 때 권문세족을 대대적으로 숙청한다. 권문세족과 그 수하 천 명 이상을 싹 죽여 버린다. 위화도 회군 이후 조민수도 자른다. 토지를 다 몰수해서 재분배하려 하니, 특권 세력은 심각했다. 워낙 개혁의 강도가 크다 보니 이성계를 암살하려는 음모도 있었다. 토지개혁은 사회전체의 게임 규칙을 바꾸는 것이다. 결국, 1390년에 개성에서 모든 공사 토지문서를 불 지르고 리셋해 버린다.
고려의 토지 제도가 근본적으로 엉망이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시스템이 기능부전에 빠지는 것이다. 전시과 제도에서 관료들은 국가로부터 받은 땅에서 생산량의 1/10을 거뒀다. 수조권만 있고 소유권은 없다. 퇴임하면 반납해야 한다. 그런데 퇴임 후 먹고 살 길이 없으니 그 토지를 반납하지 않는다. 그러면 퇴역 관료와 신임 관료가 함께 1/10씩 세금을 거둔다. 시간이 흐르면 하나의 땅에 7~8명으로 수조권자가 늘어난다. 농민은 수확량의 70~80%를 바쳐야 했다.
이 때문에 먼저 자식을 팔고, 다음에는 스스로 노비가 되는 길을 택했다. 노비로 들어가면 밥은 먹여 주고 세금도 면제 되니 죽지는 않기 때문이다. 점점 사전이 확대되고 끝내는 수십 개 가문이 전국의 토지를 겸병한다. 이러면 국가재정이 문제가 된다. 신임 관리들에게 줄 땅이 없어 행정체계가 무너지고, 군인을 부양할 재정이 없으니 국방이 무너진다. 이게 고려말 상황이다.
고려말에 토지개혁을 했다고 해서 농민에게 땅이 돌아간 거는 아니다. 왕실, 관청, 군대에 토지를 배분하고 나니 남은 땅이 없었다. 모든 농민은 원칙적으로 땅이 없고, 모두 소작인이다. 원칙적으로 사전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세습을 허용하는 공신전도 있었다. 정전제같이 농자유전의 이상적 제도는 아니지만, 1/10세만 내면 됐으니 어쨌든 삶이 개선된 건 사실이다. 이상적이지는 않아도 백성들이 참을 수 있는 정도였다.
이는 인사제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려말기에는 학문적 교양이 없는 신흥가문이 인사 시스템을 장악했다. 합격자 조작은 물론이고, 어린 아이가 이미 관직에 오르는 게 결정되어 있었다. 고려는 과거제를 운영했지만, 음서제라는 특별임용제도도 있었다. 5품 이상의 관료는 자기 자손 중 한 명을 추천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이를 통해 명문 가문들이 특권을 유지했다.
이에 반해 조선은 엄격하게 과거제를 시행됐다. 조선왕조 500년 간 문과 총 합격자가 1만 5천 명 정도에 불과했다. 750개 가문에서 인재를 배출했으며, 36개 가문이 전체 합격자의 53%를 배출했다. 3대 동안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하면 아무리 명문 가문도 몰락의 길에 들어섰다. 조선 시대도 2품 이상의 관료에게는 음서제가 실시되었다.
책임정치로 나아가고자 한 정도전
정도전은 제도적 효율뿐만 아니라, 백성에게 책임지는 정부를 만들려고 했다. 나쁜 정부라도 없는 것 보다는 낫다. 하지만 더 좋은 건 공적 복무(public service)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넘어 백성들이 직접 하는 정치가 더욱 좋다. 그게 민주정치다.
거기까진 힘들어도 조선은 상당히 좋은 중앙집권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정부의 목적이 치안과 질서 유지를 넘어, 백성을 위한 것임을 천명하고 있었다. 이는 정도전이 작성한 이성계 즉위교서에 명시되어 있다. 천명에 따라 엎어질 수도 있고, 심지어 정치가 잘못되면 백성이 뒤집을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굉장히 과격한 건데, 조선이 그 정도 클래스의 나라다.
정부가 백성들을 위해 세워졌다, 못 하면 엎어져도 좋다는 천명은 말로 끝나지 않았다. 물론 당시 책임정치를 위해 어떤 구체적 제도가 확립되었지를 보면, 현재 관점에서 보면 조금 취약하다. 어쨌든 당시는 왕정이었고, 거기에 선거를 도입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다.
먼저 왕정의 취약점을 완화하기 위해 왕의 인격을 훈련시키고자 교육을 강화했다. 또 왕의 독점적 권력을 나누어, <왕권-재상권-언론권>으로 3분하고자 했다. 정도전은 나라를 왕과 관리가 같이 공동 책임지고 운영하고자 했다. 왕 맘대로 정치하지 못하도록 경국대전이라는 헌법도 만들었다.
왕 직책은 한 사람의 재상을 정하는 것이고, 나머지 실무는 재상이 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왕정의 장점은 권력이 안정되어 있는 것이다. 대통령 선거처럼 5년마다 들썩거리지 않는다. 이를 통해 국가 기강을 잡고 권력의 정통성은 유지하면서, 재상들의 권력을 강화했다. 정통성이 있는 권력으로 안정을 도모하면서, 실무는 경험으로 검증된 재상에게 시켜야 한다고 본 것이다. 아버지가 왕이라서 왕이 된 거니까, 왕의 자질에는 언제나 문제가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재상과 왕에게만 맡기면 무슨 정치를 하는지 알 수 없으니, 비판권도 살렸다. 간관을 두어 면책특권을 주었다. 또 두 사람의 사관으로 하여금 왕의 언행을 기록하게 했다. 좌사는 말을 기록하고, 우사는 행동을 기록했다. 심지어 화장실 가서 뭐라 하는지도 기록했다. 왕에게는 사생활이 없었다. 이들은 어떤 말을 해도 책임을 지지 않는 면책 특권이 있었다.
정도전 개인작품이 아닌 고려말 개혁세력 지성의 총합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정도전의 공은 아니다. 드라마에서는 정의의 사도처럼 나오는데, 좀 오버한 게 많다. 정도전의 개인작품이라기보다는, 이색을 비롯한 고려말 성리학자 그룹의 집단지성에서 나온 것이다. 살아남은 게 정도전이니, 어찌 보면 대표 집필자에 가깝다.
이색을 비롯한 학자들이 성균관을 통해 엄청나게 스터디하면서, 사실상 조선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비록 그들은 남지 않았지만, 이들이 만든 시스템은 조선에 고스란히 도입됐다. 물론 래디컬한 부분은 당시 왕정의 한계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조선의 시작은 결코 보수적인 사대주의 국가가 아니라, 대단한 혁신 국가임을 알 수 있다.
재미있는 건 정몽주 등은 끝내 숙청되었지만 그 정신은 오히려 조선에서 이어 받들어 모시게 되었다는 점이다. 비록 조선과 함께하지 못했지만, 그 정신은 오랫동안 조선 사대부를 지배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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