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이 글은 고려 말, 조선 초 혁명과 문명 전환을 다룬 “건국의 정치” 저자 김영수 교수님의 강의를 정리한 것입니다. 교수님의 강의는 6월 7일 토요일 신촌 미플에서 정도전과 세종을 주제로 한 차례 강의가 더 열리니, 많은 참석 부탁 드립니다.
이성계의 반역,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이유
정몽주도 계속 이성계는 인정했다. 조선 건국 1년 전에야 결별한다. 그들의 충돌은 대체 어디까지 개혁을 끌고 가느냐의 문제였다. 토지개혁을 했을 때 어디까지 가는가…
이 문제는 혁명 없이 불가능했다. 조선의 개혁에서는 재산권 혁명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정몽주가 순진한 것이다. 재산을 다 몰수해서 재분배 하는데 어떻게 끝까지 안 가나? 나라를 새로 할 수밖에 없었다. 밑바닥부터 개혁인데 고려왕조로? 이건 넌센스다. 아마 정몽주도 알았을 거다. 하지만 유학적 가치관이 있기에, 죽을 줄 알면서 간 거다.
이성계라고 충성심이 없던 사람은 아니다. 그 역시 정몽주와 같은 고민을 했다. 결국, 그의 선택은 위화도 회군이라는 쿠데타였고, 우왕과 창왕, 이렇게 왕을 2명이나 죽였다. 역으로 이성계 입장에서 보면 생사의 갈림길이기도 했다. 고려에 기댄다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고려왕조를 무너뜨리느냐, 여기서 이성계도 주저한 것이다.
조선 건국 직전의 마지막 1년, 정몽주가 마지막 활약을 한 시기에 세력 관계로 정도전이 제거됐다. 정몽주는 끝까지 군대가 아니라 정치로 뭘 해 보려고 했다. 본인이 군대를 만들 힘도 없었겠지만, 그래도 이성계를 설득하려 한 거다. 선죽교에서 죽는 마지막 순간에 이성계가 누워있을 때 정몽주가 찾아간 것도, 단순한 병문안이 아니라 이성계를 설득하려 했을 것이다. 당시 이성계도 정몽주의 생각에 어느 정도 흔들렸다. 유배 갔던 정도전을 방치해서 죽어도 괜찮다고까지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방원의 판단은 달랐다. 고려를 유지하는 이 길로 가면 우리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하는 게 이방원 생각이었다. 이성계와 정몽주의 사이를 끊지 않으면 안 되니까 죽인 것이다. 하지만 정몽주를 죽인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했다. 이성계의 측근이었던 맹장 퉁두란(이지란)에게도 부탁했지만, 거절했다. 이방원은 자신이 책임질 테니 죽이라 명령하고, 이방원이 이성계에게 보고했다. 이성계가 격분해서 병상에서 일어나 호통치고 욕하고 그랬다.
하지만 지나고 나니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정치가 지나고 나면 그 결정이 꼭 필요한 거였다는 걸 알아도 그 순간의 선택은 힘들다. 그래서 조선의 건국은 이방원의 결단에 의한 것이다. 다만 조선건국의 메인스트림은 어디까지나 이방원이 아닌 이성계였다. 인재가 다 이성계에게 모였는데, 그 넉넉함은 아무나 못 따라간다.
최영, 좋은 군주를 만나지 못한 우직한 장군의 한계
최영은 매우 훌륭한 장군이다. 국가에 훌륭한 리더가 있으면 최영은 최상의 장군이다. 공민왕이 살아 있을 때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우왕대에는 길을 잘못 들어섰다.
최영의 맹점은 역사의 비전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충성심은 확고했다.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어디든 최영이 있었다. 국가를 위해 열심히 걱정했다. 하지만, 그는 정치를 읽을 줄 몰랐다. 우직한 것까지는 좋지만, 우왕 원년 성리학자들이 꿈꾼 국가 개혁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최영을 이끌어줬어야 할 사람은 이색이다. 이색은 최영보다 12살 어렸지만 비슷한 시대를 살았다. 공민왕 때 성리학자들은 성균관을 중수하고, 이색을 중심으로 집결한다. 고려말 조선초를 이끌어간 유수한 지식인, 정치인이 다 모인 것이다.
이색의 후예들은 이색 좌우파로 갈려서 고려냐 조선이냐를 두고 피튀기는 정쟁을 벌였다. 이때 최영은 국가 위기를 걱정하면서도,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몰랐다. 오히려 이색의 처남 박상충을 고문하다 죽음으로 내몰아 버린다. 당시 사대부들의 비전을 이해 못했다는 뜻이다.
최영의 선택은 이인임이었다. 이인임은 뛰어난 현실 정치가였다. 만약 성군을 만났으면 좋은 관리가 됐을 수도 있는, 재능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주어진 환경에 잘 맞추어 정치균형을 이뤄 나가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영은 이색 등의 젊은 사람들의 비전을 이해하지도 못한 결과 이인임을 선택했다. 고려를 개혁할 만한 핵심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최영과 이인임의 협력은 아이러니다. 두 사람은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최영을 협력자로 만든 것은 이인임의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예증이다. 또한 최영의 삶에서 가장 모순된 선택이다.
이색 역시 문제가 있다. 이색은 비전만 있고, 열정이 부족했다. 최영은 그 반대였다. 그 사이에 매개자가 필요했는데, 그게 바로 공민왕이 했어야 할 역할이다. 최영과 이색이 합해졌다면, 고려 내부로부터의 개혁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강력한 대안이었지만, 그게 사라졌으니 고려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정치를 잘 하는 것도 좋지만 뛰어난 사람을 잘 연결하는 것도 자질이다. 아니면 모두가 불행해진다.
현실 정치는 윤리로만 재단할 수 없다
최영을 우월하게 평가하고, 이성계를 네거티브하게 보는 건 정치를 윤리적, 철학적으로 보는 성리학적 정치관이다. 하지만 정치는 그런 게 모두가 아니다. 그러면 정치가 왜 있어야 하나? 인도처럼 브라만이 지배 하든지, 이슬람처럼 신정체제 하면 끝이지 않나.
정치에는 윤리의 지평을 넘어선 다른 게 있다. 한국 사람은 유난히 정치를 윤리적으로 본다. 그게 나쁜 게 아니지만, 정치 영역이 위축되는 문제가 있다. 조선건국 과정에서 이성계는 윤리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 왕을 두 명이나 죽였다. 당시 윤리로는 대역이고 불충이다. 하지만 정치의 본래 과제는 왕이 아니라 백성을 위해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공자가 그렇게 생각했고, 맹자는 공공연히 그렇게 말했다.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경우는 왕을 제거해도 좋다고 선언했다. 최영은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지만, 우왕대에는 결과적으로 이인임 정권의 수호자였다. 최영은 충의의 화신이지만, 충의도 잘못하면 백성에게 해가 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성리학의 세례를 5백 년이나 받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치를 너무 윤리적 잣대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대통령이 일을 하기 힘들 때가 있다. 윤리를 떠나서 정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치와 윤리 사이에는 섬세한 갭들이 있는데, 이를 국민들이 너무 다그치면 정치의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
한일관계도 그 사례 중 하나이다. 일본 정부에 문제가 많지만,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일본과 척을 질 필요는 없다. 당장 급한 현안은 현안대로 처리하고, 또 역사적-윤리적 문제는 그것대로 대응해 나가야 한다. 정치지도자마저 윤리적 잣대에만 기대고 있으면 안 된다. 국민이 박수치는 일만 하겠다는 건 곤란하다. 때로는 국민을 설득하고 이끌어가는 것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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