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 받는 선교단체 대표, 목회자들의 정치적 참여 – 한국 기독교의 흑역사
대학생 선교단체 CCC의 김준곤 목사는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한 10월 유신을 칭송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족의 운명을 걸고 세계의 주시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10월 유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기어이 성공시켜야 하겠다.… 당초 정신혁명의 성격도 포함하고 있는 이 운동은… 마르크스주의와 허무주의를 초극하는 새로운 정신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켜야 될 줄 안다.
외람되지만 각하의 치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군 신자화운동이 종교계에서는 이미 세계적 자랑이 되고 있는데, 그것이 만일 전민족신자화운동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면 10월 유신은 실로 세계 정신사적 새 물결을 만들고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성서적 축복을 받을 것이다.”(<교회연합신보>1973년 5월 6일)
그리고 광주민주화 항쟁 직후인 1980년 8월 6일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유력한 교계 인사들은 서울 롯데호텔 에메랄드룸에서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어 전두환을 앞에 두고 군권찬탈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의 장도를 축복하였다.
청렴하고 검소한 목사로 지금까지도 칭송 받고 있는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는 제주 4.3학살의 주동단체인 ‘서북청년단’에 대해 아래와 같은 증언을 했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 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규장문화사, 1982. 55-56쪽) ※한경직 목사와 제주 4.3사건 참조 링크
재미있는 건 위에 언급된 목사들이나 단체들은 ‘기독교인은 정치적이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보수적 색채의 신앙칼라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저들의 행태는 그 누구보다 정치적인 행동이 아니던가?
비정치를 주장하는 정치 목사들
사실, 위에 언급된 목사들과 교회 말고도 한국 근현대사에서 기독교가 친일, 독재, 반민주적 폭압에 앞장 선 예는 무수히 많다. 한 예로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해서 옥중 순교한 ‘주기철 목사’는 당대의 장로교 평양노회에서 면직을 당했으나, 면직 복권된 것은 2007년 예장통합 측 한 군데뿐이었다. (지금은 예장 합동과 통합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런 교회와 목사들의 신앙적 전통(?)은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서 기독교인이나 교회가 정치적이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가장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 대표적인 것이 설교가 끝나고 보수정당의 후보를 아무 거리낌 없이 강단에서 소개하는 것과 자기 소속 교회 출신 후보들에게 대놓고 지지를 호소하는 것 등이다.
그러면서 교회 내 모임이나 구역모임에서는 정치에 대한 대화와 논쟁은 교회 분란을 일으키므로 가급적 이야기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어떤 교인들은 세월호 사고에 대한 서명운동을 받는 것 조차 정치적 활동이라며 강력히 항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기독교인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활동 중에 ‘정치적이지 않은 행동’은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이슈를 꺼내거나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정치적 이슈’로 정의내린 ‘사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록 더 이익을 보는 정치집단에게 그 역시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한마디로 ‘가만히 있으라’고 요구받는 것이다. 그럼 가만히 있으면 비정치적인 행동이 될까? 천만의 말씀이다. 가만히 있는 것이 때로는 불의에 대한 침묵이라는 가장 무서운 정치적인 행동을 하는 결과를 낳는다.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이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었다고…’ – 마틴 루터 킹 –
‘시놉티콘’ 형성에 앞장서야 할 기독교인들
기독교인들이 착각하는 것중의 하나는 ‘나 한사람만 윤리적이고 기독교적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면 이 세상은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다’라는 생각이다.
물론, 각성된 ‘한 사람’의 힘과 영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한 사람이 각성해서 싸우고 노력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소명을 다할 때 ‘윌리엄 윌버포스’나 ‘반올림’을 조직해서 삼성 반도체 백혈병 노동자들에 대한 정당한 회사 측의 합의를 이끌어 낸 ‘황상기’씨처럼 놀라운 일들을 해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앞서 예를 든 윌리엄 윌버포스, 황상기씨도 혼자만 그런 싸움을 싸운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연대와 협력’의 가치를 알았고 그들을 돕는 무수히 많은 동지와 동역자들이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문제를 ‘개인만 잘하면 된다’는 ‘개인환원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바로 약자들의 연대와 협력, 시민들의 각성을 이끌어내는 단체행동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행동중에 가장 중요한 행동이 비대칭적 ‘견제와 감시’활동이다. 소수가 다수를 감시하는 ‘판옵티콘’에 반대되는, 다수가 소수를 감시하는 ‘시놉티콘’ 형성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특정 분야가 부패하고 썩어서 문제가 많을 경우, 그 분야 종사자들에게만 직업적 소명과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 그 이해관계에서 비켜서 있는 시민들이나 타분야 인사들이 그 분야의 자정작용을 위해 힘을 써주고 연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언론이 썩어있어서 온 국민이 진실된 정보를 보지 못하고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이 문제라면 언론인들에게만 그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TV를 보고 신문을 보는 시민들이 단체행동에 나서서 견제하며 올바른 언론사를 만들기 위해 힘써주는 활동이다.
그리고 교회의 담임목사나 장로들이 부패하고 전횡을 휘두르면, 직업인으로서의 생사여탈권을 갖고있는 담임목사나 장로에게 항명하기 어려운 부목사들에게만 올바른 행동과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당연히 부목사들도 그래야 하지만) 교인들이 제직회를 소집하고 항의하고 소통하며 교회의 문제를 해결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기관과 공권력이 부패해 있다면 거기 종사자들에게만 책임을 묻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이해관계에서 비껴서 있는 시민들이 깨어서 그들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견제하고 감시하는 ‘비대칭적 견제와 감시’가 활성화 될 때 이 사회와 나라가는 분명 더 건강하고 살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
이런 비대칭적 견제와 감시를 하기 위해 하는 활동이 ‘시민참여활동’인데 영국의 경우는 시민참여활동을 한번이라도 한적이 있는 시민이 전국민의 무려 90%를 상회한다. 특히 최근의 경우는 SNS와 인터넷, 스마트폰 혁명으로 직접 현장에 가지 않아도 직간접적인 다양한 방법으로 의정활동을 감시하거나 견제하고, 후원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기독교인은 공동체를 위해 더 노력해야 하는 파수꾼이다
예수님이 말했듯이 기독교인들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해야’한다.(마태복음10:16)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상당수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가장 속이기 쉽고, 기만하기 쉬운 무지몽매한 대중이 되어버렸다. 단지 교회만 다니고, 기독교인이기만 하면, 또는 교회에서 장로나 권사, 집사같은 그럴듯한 직분만 있으면 덮어놓고 지지하고 찍어주니까.
언제까지 덮어놓고 속여먹기 제일 쉬운 무지몽매한 대중으로 기독교인들이 바보짓을 할런지 잘 모르겠다. 아마 앞으로도 여전히 기독교인들은 간사한 정치인들의 밥이 될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제는 안일한 사고방식으로 교회만 다니면 덮어놓고 지지해주는 것에서 탈피해서 교회를 다니지 않더라도 그 후보나 정당이 지지하는 가치가 충분히 공동선에 기여하고, 다수 지역 주민과 국민의 권익과 존엄을 지키는 ‘기독교적인’ 것이라면 ‘불교’를 갖고 있건, ‘무교’이건 상관없이 그 정치인을 지지하고 뽑아줄 수 있는 정치적인 성숙함이 그 어느때보다 필요한 시기이다.
우리가 다수의 공동선을 위한 올바른 가치관을 분별하는 것에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복잡하고 혼란한 이 시대에 기억해야할 말씀은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누구보다 ‘깨어 있어야 할’ 파수꾼의 사명을 이야기하신 ‘에스겔서’ 말씀이 아닐까?
만일 내가 어떤 나라에 전쟁이 이르게 할 때에, 그 나라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서, 파수꾼으로 세웠다고 하자. 이 파수꾼은 자기 나라로 적군이 접근하여 오는 것을 보고 나팔을 불어, 자기 백성에게 경고를 하였는데도 어떤 사람이 그 나팔 소리를 분명히 듣고서도 경고를 무시해서, 적군이 이르러 그를 덮치면, 그가 죽은 것은 자기 탓이다. 그는 나팔 소리를 듣고서도 그 경고를 무시하였으니, 죽어도 자기 탓인 것이다.
그러나 파수꾼의 나팔 소리를 듣고서 경고를 받아들인 사람은 자기의 목숨을 건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파수꾼이, 적군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서도 나팔을 불지 않아서, 그 백성이 경고를 받지 못하고, 적군이 이르러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을 덮쳤다면, 죽은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은 내가 파수꾼에게 묻겠다. 너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여라. [에스겔 33:2~7 새번역]
기독교인은 사리분별 못하고 정치인이든 종교인이든 유명하고 권위만 있어 보이면 무슨 망언을 지껄여도 ‘아멘’으로 화답하는 무지몽매한 대중으로 부름받지 않았다.
기독교인은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수고스럽지만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알아보고, 더 꼼꼼하게 점검해야 할 이 시대의 파수꾼으로 부름받았다. 교회다닌다고, 장로라고, 우리교회 교인이라고 덮어놓고 찍어주시는 분들…이번에는 제발 그러지 좀 말자.
참, 내가 이야기했던가? 나찌정권의 유대인 학살을 도와 1급 전범으로 재판받아 사형당한 아돌프 아이히만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을?
칼 아돌프 아이히만, (1906.3.19~1962.5.31)
※ 1962년 5월 31일, 이스라엘의 수도 텔아비브 외곽에 위치한 라믈레 교도소, 자정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사형 집행을 참관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앞에 초로의 남자가 교도관들의 호송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냅니다.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남자는 별 동요의 기색이 없었습니다. 교수대에 오르기 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나하고 연고가 있는 이 세 나라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전쟁 규칙에 따라야만 했다.”
그리고 참관자들을 향해 이야기하죠. “여러분, 또 만납시다. 이게 운명이라는 거요. 나는 지금까지 신을 믿으며 살아왔고, 신을 믿으면서 죽어갈 거요.” 그의 얼굴에선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행위를 후회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칼 아돌프 아이히만’ (Karl Adolf Eichmann), 나치 친위대의 중령이었으며 2차 대전 기간 중 수백만의 유태인들을 학살한 장본인 중의 하나였습니다. (출처)
burberry schalMTV Movie Awards 2011 Red Carpet Fash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