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일 차
《아무튼, 비건》이라는 책을 읽고, 비건에 관심이 생겼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관심보다는 윤리적인 책임감이랄까? 책에서 소개한 영상을 봤다. 고기, 치즈, 우유, 계란을 만들기 위해서 동물들이 어떻게 처분되고 대우받는지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고, 그에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인간이 어떤 권리로 동물들을 그렇게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미리 이야기하면 나는 고기와 해산물, 계란을 엄청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비건 체험을 건강의 관점으로 접근해 보진 않기로 했다. 내가 비건인으로 살게 된다면 그건 건강보다는 동물에 대한 권리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든다. 비건을 택하는 이유가 워낙 다양할 테니 간략히 밝히고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비건인들이 보기엔 나의 한 달 체험이 많이 어색하고 틀린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부분은 전적으로 나의 무지로 인함을 밝힌다.
1일 차
업무를 처리하러 나오는 스터디 카페 주변에서 점심을 먹곤 했는데 근처를 아무리 둘러봐도 비건식을 파는 곳이 없다. 스벅에 비건 샌드위치가 있다고 해서 가봤는데 다 팔렸는지 파는 지점이 따로 있는 건지 없다. 결국 점심은 굶었다. 그러다 고로케 팔던데 생각이 나서 야채 크로켓을 사려는데 혹시나 해서 물어보니 고기가 있단다. 팥 크로켓 하나 먹었다. 핫플레이스나 번화한 도심지역이 아니라면 비건으로 외식은 힘들다는 걸 느꼈다.
2일 차
아침은 원래 잘 안 먹으니 과일만 먹었다. 어린이집 가는 첫째 아침밥은 해줘야 해서 크래미 계란 볶음밥 해주는데 맛을 볼 수 없으니 그냥 했다. 그래도 맛있게 먹네. 비건 시도해보는 한 달 동안 주변 사람들이 특히 가족들에게까지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점심때 아내가 특별한 게 먹고 싶다 해서 버터 갈릭 새우덮밥을 해줬다. 난 새송이버섯과 양파를 넣어서 덮밥을 만들어 먹었다. 이전과 달리 두 개를 따로 해야 해서 번거로움이 있지만 일단은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며 이대로 가보기로. 저녁은 감자채전을 해서 먹고 옥수수를 쪄먹었다.
2일밖에 안 지났지만 속이 좀 편안한 느낌? 아직은 물론 느낌이겠지. 요리를 좋아해서 비건 요리를 뭐를 해볼까 하다가 검색을 통해 알아낸 비건 콩고기를 주문했다. 크림 없이 캐슈너트로 크림 파스타를 만들 수 있다고 해서 캐슈너트도 1킬로 주문 완료!
3일 차
아침은 포도를 먹고 아내와 첫째에게 볶음밥을 해줬다. 아내와 같이 외출할 일이 있어 평소 같으면 밖에서 점심을 먹었겠지만 가는 지역에 비건 메뉴를 파는 식당이 검색이 안 된다. 검색되는 가게는 다 디저트나 빵 가게. 상대적으로 메인 메뉴보다 디저트나 빵 쪽에서 비건 메뉴가 많이 수요가 있나 싶다. 결국 집에서 먹기로 하고, 아내는 평소 먹고 싶어 하던 떡볶이 + 튀김 조합을 사다 먹었고, 난 매운 가지 덮밥을 해서 먹었다.
저녁에는 전날 사 온 가지로 가지볶음을 해서 먹었다. 아이 반찬으로 메추리알을 사뒀길래 메추리알 장조림을 하면서 멸치+다시마 육수 낸 거에 간장 간을 하면서 맛을 좀 봤다. 비건이라면 먹지 말아야 할 육수지만 간을 보느라 몇 번 먹었는데 앞으로도 요리하면서 가끔 간을 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4일 차
둘째 100일 기념 양가 부모님과 점심을 먹었다. 샤부샤부를 먹으러 갔는데, 원래는 육수 때문에 비건일 때 샤부샤부를 못 먹는 거지만 혼자서 아무것도 안 먹을 수가 없어서(그럴 수 있긴 했지만, 부모님들껜 비건 체험 기간 중이라고 길게 설명하기 뭐해서…). 적당히 타협하고 월남쌈과 샤부샤부에서는 야채만 몇 개 건져 먹었다. 이래저래 눈치 보이는 일이 좀 있다. 앞으로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5일 차
장모님 생신이라 집에서 식사를 준비했다. 미역국, 잡채, 크림 새우를 직접 했는데 요리를 하면서 비건을 유지하기 어려운 부분이 간을 봐야 하는 부분. 웬만한 건 느낌으로 요리할 만도 하지만 가끔 아리송한 건 간을 보며 맞춰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비건식이 아닌 요리를 하면서는 비건을 유지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푸짐하게 한 상 차린 생일상에서 잡채와 두부김치만 먹었다(사실 김치도 젓갈이 포함되어 안 먹는 게 맞을 수 있지만).
6일 차
드디어 2일 차 때 주문한 콩단백으로 요리를 해봤다. 앞으로 자주 먹어야 될지도 모를 요리일 테니, 괜스레 요리하는 데 긴장도 됐다. 맛이 어떨지 몰라 테스트 차원에서 쬐끔만 제육볶음을 해봤다. 드디어 시식 시간, 먼저 야채를 먹어봤다. 야채는 당연히 내가 아는 그 맛. 그리고 콩단백! 일단 비주얼은 정말 돼지고기와 흡사하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돼지고기 맛을 상상해 버렸나 보다.
씹히는 질감은 어느 정도 유사했지만(사실 그렇게까지 유사하진 않았다) 맛은… 음… 음… 두꺼운 종이를 뭉쳐놓고 씹어먹는 느낌이었다. 사실 다신 못 먹겠다. 누군가 리뷰에서 콩으로 생각하고 먹으면 괜찮은데, 고기로 생각하면 절대 못 먹을 맛이라고 했던 게 뇌리를 스쳤다. 진짜 딱 맞는 표현! 난 어쩌자고 이리 큰 걸 2 봉지나 샀단 말인가…….
오늘은 그래도 뭔가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제 쓰고 남은 두부가 있길래 두부에 튀김옷을 입혀 두부 튀김을 해 먹었다. 튀김은 신발을 튀겨도 맛있다던데, 역시 두부를 튀겨도 튀김은 맛있다!
7일 차
어제 완전 실패했던 콩단백이 머릿속을 아른거렸다. 그래서 오늘 아주 조금씩 맛을 찾아보는 테스트를 해봄. 몇 개는 소금간만 해보고, 몇 개는 간장 간 하고, 간장+소금 간도 하고. 결론은 식용유를 많이 두르고 튀기듯 대친 다음에 간장 조금+ 소금 조금 + 후추 조금으로 간하면 종이 씹는 느낌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물에 불린 후 물기를 꼬옥 짜내는 것도 키 포인트 중 하나!
8일 차
밖에 나가면 비건으로 먹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걸 알기에, 나올 때 점심 도시락을 싸 왔다. 이전에 볶아놨던 가지볶음을 넣고 유부초밥을 간단히 만들었다. 직장에서 팀 사람들과 밥을 사서 먹어야 하는 사람은 과연 비건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거의 불가능할 듯. 오늘도 역시 가족들 일반 요리를 해주고, 내 비건식 식사를 해서 두 번 요리했다. 계속 반복하는 건 힘들 듯. 비건 체험을 하면서 비건 음식이 아닌 요리를 하고, 간을 맞추기 위해 맛을 봐야 하는 건 그리 유쾌한 느낌은 아니다.
9일 차
이날은 밥반찬이 떨어져 5종의 반찬을 만들었다. 캐슈넛을 넣은 멸치 볶음, 감자조림, 연근조림, 마약 계란장, 두부 버섯 조림. 마약 계란장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는데, 맛이 궁금했지만 먹진 않았다. 두부를 튀기듯 굽고 버섯과 함께 간장 베이스에 조림을 했는데, 고추가 없어 넣은 청양고추가 의외의 매콤함을 더했다. 최애 반찬으로 등극할 듯!
이날 저녁은 비건 체험을 하기 전 사둔 생크림 유통기한이 오늘까지라 해서 크림 파스타를 해줬다. 그나저나 자색 양파는 확실히 비주얼을 해친다 ㅎㅎ
10일 차
아내 친구들이 놀러 와서 오랜만에 치킨을 튀겼다.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닭껍질 튀김도 해봤다. 역시 먹지는 않았다. 친구들이 떡볶이와 만두, 빵을 사 왔는데 어느 하나 먹을 수 있는 건 없었다. 빵은 며칠 전부터 밀가루 끊기 도전 30일도 해서 먹지 못했다. 그래도 긍정적인 면을 찾아보자면, 이런 식의 점심을 먹으면 저녁때까지 더부룩해서 포만감이 머물러 있는데, 먹은 게 거의 없어서 그런지 속도 편하고 저녁때쯤 맞춰 배도 고팠다.
아내와 아이들은 안 먹는다고 해서 혼자서 처음으로 양파 밥을 해 먹어 봤다. 원래 레시피에는 양파 밥에 계란 후라이를 반숙해서 올려 먹곤 하던데, 계란은 생략하고 김 가루를 뿌려줬다. 꿀맛!
11일 차
참 힘든 날이었다. 장인어른 생신이시라 점심을 같이 먹으러 갔는데, 메뉴가 해천탕 (해산물과 닭이 들어간 보양탕 같은 느낌?) 다른 거라도 시켜서 먹어야지 했는데, 그 가게가 횟집 베이스 가게라 단 한 메뉴도 비건으로서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굶음. 평소에 해산물 킬러라 엄청 먹고 싶은 걸 참은 것도 힘들었지만, 그런 자리에서 혼자서 안 먹으면서 묘하게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된 것도 죄송한 마음이 있었다. 계속 비건으로 산다면 이런 경험이 종종 생기겠지. 집에 와서 따로 간단히 밥을 차려 먹었다.
12일 차
교회에서 점심으로 다 같이 라면을 자주 끓여 먹는데, 그 냄새가 아주 기가 막히다. 부르스타 놓고 작은 냄비에 끓이면서 먹으면 평소 먹는 양보다 많게는 2배 이상 먹게 되는 기이한 현상? ㅎㅎ 비건 한 달 체험을 하면서 육식이 그리 당기진 않는데 이상하게 라면이 먹고 싶다.
교회에서 라면 먹을 걸 알았기에 처음으로 집에서 내가 먹을 도시락을 싸서 갔다. 반찬으로 전에 해둔 가지볶음에 김 가루랑 참기름, 소금을 조금 뿌려서 주먹밥. 확실히 내가 먹을 도시락을 직접 싸서 가니 이편이 밥 먹기에 훨씬 수월하고 좋았다. 도시락 싸는 게 다소 번거롭긴 하지만.
라면을 견디고 집에 와서 너무 라면이 당기는 지라 유튜브에서 비건 라면을 검색하니, 비건 짬뽕 레시피가 나왔다. 그래서 집에 있는 재료로 후다닥 해 먹었는데, 매콤하니 꿀맛! 해산물 대신 3종의 버섯을 넣으니 어느 정도 식감이 비슷하게 해결됐다. 종종 해 먹을 것 같다. 하지만 오랜만에 매콤한 걸 먹어서 그랬는지 화장실 들락날락 고생을 좀 하긴 했다.
13일 차
아침에 첫째 등원시키기 전에 먹이고 내 점심 도시락도 쌀 요량으로 지난번에 주문한 커클랜드 야채 믹스와 웨지 감자를 잘라 넣어 볶음밥을 만들었다. 내 도시락용 볶음밥을 미리 덜어내고, 첫째 줄 볶음밥에는 계란 한 개를 스크램블 해서 넣어줬다. 그래도 이렇게 하니 완전히 다른 요리 두 번 하는 것보단 덜 수고스럽다.
아참! 그리고 며칠 전부터 내 밥은 백미가 아닌 100% 현미로 대체해줬다. 일반 백미랑 다르게 현미는 8시간 이상 물에 불려두고 밥을 해야 좋다고 해서, 자기 전이나 저녁에 미리 씻어두고 그다음 날 해 먹었다. 꽤 오래전에 혼자서 자취할 때 교회 때문에 종종 누나네 집에서 잤는데, 그때 100% 현미밥을 처음 접하고 이건 도무지 식감 때문에 못 먹겠다 생각했는데, 충분히 불려주고 밥을 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내가 변한 건지 100% 현미밥도 충분히 먹을만했다.
14일 차
아침에 도시락 싸가려고 야채 믹스 넣고 밥과 카레 물을 섞어 야매 카레밥을 했다. 이제 나갈 때 내가 먹을 수 있는 밥을 간단히 도시락으로 싸가는 게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차라리 이게 마음이 편할 때가 많다.
저녁을 처가에서 먹었는데, 장모님이 내가 고기랑 해산물 등 안 먹는 거 아시고 두부로 요리를 준비해 주셨다. 존중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15일 차
아침에 일어나 냉장고를 열어보니 오이가 있길래, 수유 중인 아내도 먹을 수 있게 덜 매운 오이 김치를 만들어봤다. 유튜브에서 레시피 보고 처음 해봤는데, 생각보다 맛이 있어 자주 해 먹을 것 같다. 비건 체험을 하면서 채소가 들어가는 요리에 부쩍 관심이 많아졌다.
점심엔 미리 사둔 우삼겹과 숙주나물을 이용해 우삼겹 숙주 볶음을 만들었다. 나는 먹지 않지만, 장인 장모님도 초대해서 다 같이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특히 장인어른이 만족해하셨다. 이렇게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내가 직접 먹지 않아도 요리의 즐거움이 있다. 다만 요리를 직접 먹어보고 다음에 어떤 식으로 개선할지 파악해 볼 수 없는 건 아쉬운 점 중 하나. 비건으로 살면서 가장 아쉬운 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요리!
16일 차
비건 체험 시작하기 전 돼지고기 뒷다릿살로 종종 탕수육을 만들어서 함께 먹었다. 내가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가족들도 좋아하는 메뉴라 비건 스타일로 해볼 순 없을까 하다가 버섯으로도 탕수육을 한다는 걸 보고 표고버섯으로 탕수육을 해봤다. 한 번은 깐풍 소스, 두 번째는 탕수육 소스를 만들어 먹었다. 개인적으론 깐풍 소스의 매콤함과 버섯 탕수육이 잘 어울렸던 것 같다. 얼마 전 밀가루 끊기도 시작했는데, 이날은 밀가루 끊기 도전 실패다!
사진은 두 번째 튀긴 건데 전분이 모자라서 물을 섞어 걸쭉하게 썼더니 튀김옷이 좀 이상해졌다. 그래도 맛은 꿀맛! 솔직히 돼지고기보단 못하지만 충분히 대체할 만은 하다!
17일 차
오랜만에 냉장고에 있는 이 재료 저 재료 다 넣고 뚝배기 계란찜을 만들었다. 맛있어 보였지만 먹진 않았다. 비건으로 살면서 비건식이 아닌 음식을 요리해야 하는 건, 계속 느끼지만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온다. 내가 비건을 하려는 이유가 있는데 그런 식재료를 가지고 음식을 만든다는 게 뭔가 석연치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적으로 가족들에게 비건을 강요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이상, 누군가의 강요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18일 차
요새 한창 요리에 빠져 동네 식자재 마트에 가서 식자재 한 꾸러미를 사 왔다. 아내가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해서 떡볶이를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많이 하기도 했고, 습관적으로 나도 모르게 어묵도 엄청 많이 넣었다. 원래 비건이라면 어묵이 포함된 떡볶이 자체를 안 먹겠지만. 떡볶이의 떡만 골라서 먹었다. 그러다 어묵만 잔뜩 남아서 버리게 돼서 너무 아까운 마음에 어묵을 좀 집어 먹었다. 비건 체험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직접적으로 비건식이 아닌 음식을 먹은 날! 요리할 때도 여유를 갖고 천천히 해야겠다.
19일 차
교회에서 정말 오랜만에 야외에 나가서 식사했다. 글램핑 스타일의 고기를 먹는 곳으로 비건식으로 먹을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밥 한 공기에 파채 등의 반찬과 함께 후다닥 먹었다. 한국에선 놀러 가선 무조건 숯불에 고기를 굽는 공식이 있어서 비건으로서 이런 자리에 자유롭게 어울리는 게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고파서 괜스레 과일만 잔뜩 먹은 날.
20일 차
점심은 볶음밥 도시락, 저녁은 어묵탕과 두부 버섯 조림을 해서 먹었다. 두부 버섯 조림은 비건 체험을 하며 발견한 나의 최애 메뉴이기도 하다. 지난번엔 청양고추를 넣어줬는데, 이번엔 아이도 먹으라고 고추를 뺐더니 지난번만 못해서 아쉽기도 했다. 내 인생에 이렇게 3주 가까이 고기 및 해산물, 달걀, 치즈를 안 먹고 살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다. 더부룩함이나 속 부대낌이 없는 점도 너무 만족스럽다. 다만 뭔가 허한 느낌이 들 때도 있는 건 사실이다.
21일 차
이제는 일상처럼 점심엔 버섯이나 각종 채소로 볶음밥을 도시락으로 싸고 다닌다. 저녁은 아내가 좋아하는 간장 닭볶음탕을 했다. 그리고 처음 해보는 대파 닭꼬치도 해봤다. 비건 체험을 하지만, 원래부터 고기를 좋아했던 나인지라 먹고 싶었다. 하지만 한 달은 잘 지켜보자 생각하며 참았다. 요리를 다 준비하고 나니 시간도 그렇고 남은 에너지도 많지 않아 내 거는 별도로 준비하지 못하고 남은 밑반찬이랑 먹었다. 이런 일이 며칠은 반복된다. 좋은 패턴은 아닌 듯.
22일 차
오랜만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일하면서 점심을 해 먹었다. 어제 닭볶음탕이랑 어묵탕이 남아 따로 요리를 더 준비하진 않고 오로지 나를 위한 요리를 했다. 정말 간만이다! 예전에 사둔 콩단백을 가지고 버섯볶음 요리를 해봤다. 지난번에 콩단백을 살짝 기름에 튀기듯 구우며 밑간을 해두면 맛이 괜찮았던 실험 결과를 가지고 과감하게 버섯볶음 요리에 고기처럼 투입해 본 것!
결과는 매우 만족이다. 완전 고기는 아니지만 따로 밑간을 해서 그런지 별도의 이질감 없이 꽤 만족스러운 느낌을 줬다. 확실히 콩단백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심하게 갈릴 듯하다. 저녁엔 출판사 대표님과 협력 논의할 다른 회사의 부대표님을 만나기로 했는데 어쩌나…
1차로 족발집에 갔는데, 주먹밥을 시키고 쟁반 막국수로 잘 버텼다, 2차는 횟집에 가서 결국은 술만 마셨다. 안주 없이. 비건인들은 바깥에 나와서 술 마시긴 정말 힘들듯… 특히나 어제처럼 약간의 비즈니스성 성격을 띤 술자리에서는 더욱 지켜나가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23일 차
술 마신 다음 날 해장 짬뽕! 비건 짬뽕은 나의 든든한 해장 파트너가 돼주는구나!
이날은 강남에서 오후에 특강이 있고 저녁에도 특강이 있었다. 강남역 근처에서 저녁으로 먹을 수 있을만한 걸 찾아 헤맸지만 도무지 먹을 게 없었다. 결국은 맥도널드에 가서 후렌치후라이 라지 하나랑 콜라 한잔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그나마 후렌치후라이는 다 식어서 나오고. 좌절의 연속. 나와서 밥을 해결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다녀와서 아내한테 이야기하니 비빔밥을 먹지 그랬냐고… 그 생각은 못 했다.
24일 차
오늘은 오랜만에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즐겨 먹던 양파 밥을 해 먹으려다 남은 팽이버섯과 깐 마늘을 편으로 썰어서 같이 넣어줬다. 완전 꿀맛! 팽이버섯을 넣으면 식감이 정말 좋아진다. 비건 체험을 하면서 정말 다양한 버섯을 요리에 많이 써보게 된 것도 하나의 수확이다. 버섯이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25일 차
주말을 맞아 동네에 있는 테마파크에 갔다. 집에서 차로 5분 거리인데 이사 오고 1년 만에 처음 방문. 가기 전 미리 유부초밥 2종류의 도시락을 쌌다. 하나는 마요네즈와 참치, 크래미 등을 넣은 유부초밥, 다른 하나는 현미밥에 김 가루만 넣은 유부초밥. 물론 후자의 유부초밥이 나의 점심이다.
테마파크에 다양한 체험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피자 만들기 체험이었다. 아이랑 즐겁게 만들고 그 자리에서 화덕에서 피자를 구워서 내주는데, 한 입도 먹을 수 없었던 슬픔. 하루 종일 테마파크에서 놀다가 집에 와서 너무 지치길래 시금치 2단을 삶아 1단은 무치고, 나머지 1단은 시원한 시금치 된장국을 끓여서 먹었다.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적인 느낌.
26일 차
점심은 교회에서 한솥도시락을 시켜줬는데, 먹을 수 없는 고기와 오징어채 무침 등을 빼내고 나니 밥은 한가득한데 김치 4장이 먹을 수 있는 반찬에 전부였다. 결국 밥을 조금만 먹고 집에 와서 전날 끓이고 남은 시금치 된장국에 현미밥 말아서 후딱 먹었다.
짜장면을 만들어 달라는 아이의 주문에 돼지고기 대신 냉동실에 있는 베이컨과 짜짜로니 조합으로 짜장면을 후딱 만들어 주었다. 냄새가 엄청 자극적이었지만, 먹지는 않고 따로 김치볶음밥을 해 먹었다. 버섯 넣고. 사실 비건 생활을 정확히 하려면 김치도 안 먹는 게 맞을 거다. 아마도 젓갈이 포함돼있을 테니… 이번 비건 한 달 체험에 차마 김치를 제외하진 못했다.
저녁을 일찍 먹고 아내가 배스킨라빈스 기프티콘이 있으니 사용하러 가자고 해서 쿼터 1개와 파인트 1개를 사 왔다. 아이스크림은 내내 안 먹었는데, 이날은 배스킨 앞에 무너지고 먹었다. 근 한 달여 만에 먹는 아이스크림인 듯. 맛은 있었다! (조금씩 약해지는 절제력)
27일 차
점심은 콩나물국밥을 먹었다. 계란은 미리 빼 달라고 했고, 위에 고명처럼 올려주신 고기도 빼고 먹었다. 아마도 육수를 내면서 멸치 등을 썼을 것 같기도 한데, 체험 초창기였으면 안 먹었을 테지만, 한 달이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타협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된다. 저녁은 유럽 여행 후 돌아오신 장인/장모님을 위해 김치찌개에 돼지고기를 넣고 푹 끓여 들었다. 이 또한 비건으로선 먹지 않았겠지만, 그 외엔 별다른 반찬이 없는 상황에서 김치찌개 국물과 김치는 건져 먹었다. 계란말이는 먹지 않았다.
28일 차
급작스럽게 최근 알게 된 지인 가족이 집으로 방문하게 됐다. 아이 소파를 주려고 온 거였는데, 감사한 마음과 한번 보려고 했던 겸사겸사 집에서 치킨과 피자를 시켜 먹었다. 아이들도 있어서 가장 만만한 배달 음식이긴 했다. 나는 먹을 수 있는 게 없어서, 쌀 떡볶이로 간단히 간장 떡볶이를 호다닥 만들어서 같이 먹었다.
비건 체험해보기로 결심하기 전에는 치킨을 엄청 애정 했던 터라 눈 앞에 펼쳐진 치킨을 안 먹기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거의 끝날 때쯤 되니 잘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 혼자 약간 겉도는 느낌! 차려진 음식을 같이 먹지 않는 것만으로도 뭔가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29일 차
점심을 간단히 차려 먹고, 저녁에 장모님이 집에 와서 밥을 먹으라셔서 갔다. 삼겹살을 구웠다. 그래도 내가 고기를 안 먹는 걸 아시고, 도토리묵이랑 다른 걸 따로 더 챙겨주셨다. 감사한 일. 삼겹살은 내가 구웠다. 안 먹는 사람이 굽는 게 편하다. 굽다가 먹다가 하지 않고 굽기만 하면 되니까. 이제 계획했던 비건 체험도 하루가 남았다. 긴 한 달이었다.
30일 차 (마지막 날)
대망의 마지막 날. 이날은 강남에서 저녁에 특강이 있고, 그전에 만남 2건, 미팅 1건이 있는 날이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없어 점심을 못 먹고 출발했는데, 저녁 특강 전에 배고파서 쓰러질 것 같았다. 뭐라도 먹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꽤 찾아 헤맸다.
그때 발견한 먹거리 골목에서도 사실 먹을 수 있는 게 없었지만,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배가 너무 고파서 그랬는지 스스로 좀 타협을 했다. 순두부찌개 집에 가서 해물이 안 들어간 쫄면 순두부찌개를 먹은 것. 육수로 뭐가 들어갔는지 알 수 없었으나 결국 먹었다. 이게 한 달간의 비건 체험의 마지막 음식이었다. 그래도 먹고 나니 배 따시고 든든은 했다.
비건 체험이 끝나고
이렇게 글만큼이나 길었던 한 달간의 비건 체험이 끝났다. 한 달 체험을 하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그중 가장 큰 고민이 한 달이 지나고 나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애초에 고기와 해산물, 계란을 엄청 좋아했던 터라 이걸 안 먹고 살아갈 수 있을까 시험해본 한 달이기도 했다. 결과는 ‘그럴 순 없을 것 같다’였다. 특히나 요리를 자주 하는 나로선 비건식이 아닌 요리의 간과 맛을 보며 매번 좌절감을 맛보기도 싫었다. 그래서 비건으로 살기는 포기했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이 고기, 달걀, 우유를 얻기 위해 동물들을 그렇게 학대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유는 앞으로도 안 먹을 것이고, 고기와 달걀도 아주 최소로만 먹는 생활을 이어갈 예정이다. 누군가는 그게 뭐냐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런 의식을 가진 채로 점점 줄여나가는 것을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확실히 비건 체험은 내가 경험해본 체험 중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앞으로의 생활과 생각에도 큰 영향을 줄 것은 물론이고!
원문: Peter Kim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