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등의 정신질환과 관련된 주제는 제가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기 때문인지 쓰는 것이 꺼려집니다. 하지만 심리치료나 이상심리에 관해서 2000년대 이후 뇌과학의 발견들이 반영된 정보들을 찾아보기가 생각보다 힘든 것 같아서 앞으로 몇 가지 써보려고 합니다. 쉽게 쓸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우선 지난 글에 언급한 것처럼 우울증은 크게 2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 첫 번째는 특정 상황에 대한 인지/생각 때문에 지속적인 우울감과 무기력, 불안 등을 겪는 것이고,
- 두 번째는 이유가 뭐가 되었든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정동 체계(정동 장애)로 인해서 원치 않는 감정과 무기력 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실 병으로써의 우울증은 두 번째를 말하는 것이고, 첫 번째는 우울증에 걸릴 조건을 가진 것입니다. 하지만 우울증은 증상으로 분류된 질환이고 아직까지 생물학적인 병변을 바탕으로 정의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첫 번째 우울증인지 두 번째 우울증인지를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둘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증상 분류로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우울증의 구분이 쉽지 않습니다.
우울증약
우울증은 일종의 고장 난 알람이 켜진 상태입니다. 이 알람은 통제하기 힘든 우울감이나 불안, 자책 등으로 경험됩니다. 우울증약은 이 알람을 꺼줍니다. 하지만 고장 난 알람을 고쳐주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우울증을 겪는다면 이것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알람이 켜진 상태에서는 현실이 감정을 만드는 시스템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습니다. 켜진 알람에 대응하느라 알람이 잘못 켜진 것이라는 정보를 받아들여도 고장 난 알람을 고치기 힘든 상태입니다. 오히려 뇌의 특성상 알람이 켜진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냅니다. 우울증약을 먹는 것은 알람을 끄고 고장 난 알람을 고칠 기회를 만들어줍니다.
우울증약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정동 자체를 억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로 ssri 계열의) 신경전달물질의 수준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먹는 즉시 알람을 꺼줍니다. 하지만 뇌의 다른 기능들도 함께 억제됩니다. 아직까지 국소 적용이 가능한 약은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약을 먹으면 뇌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우울증의 경우 두 번째의 약이 효과가 좋다고 하는데, 알려진 신경전달물질의 수준 변화가 치료 효과를 낸다는 사실과 달리 효과의 원인이 아직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일부 뇌 과학자들의 추측으론 신경전달물질 수준의 변화가 뇌를 일종의 학습 모드(변화가 가능한 상태)로 바꿔준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 뇌는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배선을 수정하는 것이 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이죠.
요약하면, 우울증약은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치료제가 아닙니다. 약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겠지 생각하고 가만히 있는다면 (운이 좋지 않은 이상) 몸과 마음만 더 망가질 수 있습니다.
생각 고치기?
우울증에 관한 조언들을 보면 반드시 나오는 것은 생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 조언이 우울증에 관한 가장 큰 오해라고 생각하는데, 우울증이라면 생각은 바꾸기 힘듭니다. 거의 안 바뀐다고 보는 게 맞을 만큼 바꾸기 힘듭니다. 이런 조언이 꾸준히 나오는 데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우울증의 구분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인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우울증의 경우 아직 알람이 고장 난 상태는 아닙니다. 특정 ‘인지/생각’ 때문에 알람이 켜지는 상태인 것이죠. 상대적으로 수용의 기회가 많기 때문에 생각만 바꾸면 우울증에서 벗어나거나 증상이 완화됩니다. 그래서 같은 방식을 두 번째 우울증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적용합니다. 인지의 수정이 주요 목표인 것이죠.
이는 인지가 정서를 통제한다는 오해 때문입니다. 정서와 인지는 서로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은 정서가 인지에 주는 영향이 더 큰 데다가, 두 번째 단계의 우울증인 경우 인지가 정서에 주는 영향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기 쉽지 않습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 중요한 것은 맞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불안, 우울을 유발할 수 있는 요인은 대부분 사회적인 실재를 바탕으로 하는 것들입니다. 호랑이가 뛰어들면 인지고 뭐고 간에 바로 반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같은 방식으로 나뭇가지를 뱀으로 착각하고 놀라는 일이 발생하죠.
하지만 현대 사회의 위협 요인들은 인지적 요소가 함께합니다. 돈을 잃는다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거나 하는 것들은 의식적인 판단이 수반되어야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울증은 ‘인지/생각’과 연관이 깊습니다. 생각이 우울증의 원인이 되는 거죠.
질병 등의 신체적인 원인이나, 계절, 이직 등의 환경 변화로 인한 우울증의 경우도 ‘인지/생각’을 수반합니다. 그리고 우울증을 유지하는 데 사용되는 ‘인지/생각’도 있습니다. 우울증에 사용되는 부정적인 ‘인지/생각’은 상처에 소금 뿌리는 격이기 때문에 회복을 더디게 만듭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은 우울증을 극복하는 데 중요합니다. 그런데 알람이 켜진 상태의 뇌는 생각을 바꾸기 어렵습니다. 생물학적으로 힘든 일입니다.
두 번째 우울증인 경우 알람이 종일 켜져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알람을 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울증약이 될 수도 있고, 명상도 있고,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알람만 꺼도 자연적으로 다른 관점으로 문제를 볼 수도 있고, 기존의 경험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고 운이 좋으면 따로 생각을 바꾸려는 노력 없이도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추가하면,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더라도 그것이 우리 뇌에 영향을 미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아직 첫 번째 우울증의 단계라면 금방 좋아지겠지만, 약해진 뇌는 생각만 바뀌었다고 바로 좋아지지 않습니다. 꾸준히 긍정적인 영향을 줘야 점점 회복됩니다. 운동과 비슷합니다.
요약하면, 알람을 끄고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알람을 끄는 것은 스스로 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병원의 도움을 받는 것을 추천합니다. 호흡법, 명상 등 스스로 통제할 방법을 배우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운동
우울증에 관한 조언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은 운동입니다. 이건 정말 좋은 방법입니다. 운동은 정동의 조성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뇌 자체도 학습이 가능한 상태(변화가 가능한 상태)로 바꿔 줍니다. 부작용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울증을 겪고 있는 분들이 운동할만한 상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를 것으로 생각합니다. 운동은 할 수 있다면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울하고 무기력한 증상을 만드는 것은 약해진 뇌만큼이나 망가진 몸도 한몫합니다. 결국에는 신체적인 건강도 챙겨야 하는 것이죠.
질병이 있거나 병의 전조로 우울증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굳이 운동이 아니더라도 몸을 움직이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침대에서 일어나서 양치질이라도 하는 것이죠. 몸을 움직이는 것은 알람을 끄는 것에도 도움이 됩니다.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는 영양도 필수입니다.
요약하면, 운동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가능한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하고,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운동을 시작합시다. 영양도 잊지 마세요.
마지막으로 요약하면
우울증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결국 잘 작동하지 않는 정동 체계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회복시키는 김에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면 더 좋겠죠. 길게 썼지만 몇 가지만 기억해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 우울증약은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치료제는 아닙니다.
-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하지만 우울증의 증상에 빠져 있다면 그러기 힘듭니다. 잠시라도 증상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 몸을 회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운동하는 것이 가장 좋고, 힘들다면 자주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입맛이 없더라도 영양은 잘 챙기는 것이 좋습니다.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요. 글 읽어 주시는 분들, 공감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원문: 도겸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