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다.
- 첫 번째 단계는 아직 만성적인 우울증은 아니지만 앞으로 그렇게 될만한 가능성이 있는 상태이다. 이 단계를 우울증으로 경험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
- 두 번째 단계는 만성적인 우울증이다. 장기적으로 우리 몸과 뇌가 첫 번째 단계의 원인에 맞추어 변화된 상태다. 이때는 우울증뿐 아니라 무기력증, 만성피로, 일부 불안증, 일부 성격장애 등과 관련된다.
첫 번째 단계
첫 번째 단계는 만성적인 우울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원인을 가지고 있는 상태다. 이 원인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는데, 우울감이나 분노가 주된 원인이 되는 사람들은 이를 우울증으로 경험하는 것 같다.
첫 번째 단계의 우울증은 인지/생각이 주된 원인이다. 주로 이별, 상실, 손실, 인간관계 등 외부 문제에 대한 인식이 우울증을 만든다. 이때의 우울증은 우울감이나 무력감을 주로 느끼지만 그 외의 감정들도 느낄 수 있다. 즐거운 일이 생기면 웃을 수도 있고, 외부의 조건에 따라서 좋은 감정들을 느낄 수 있다. 이 단계의 우울증은 원인이 되는 문제가 사라지면 우울감의 강도가 확 줄어들거나 우울증이 사라진다.
첫 번째 단계는 단순히 우울함이나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우리 뇌가 어떤 상태로 얼마나 자주 오랫동안 있느냐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뇌의 생화학적 조성이 좋지 않은 상태로 오랫동안 지속되면 뇌와 몸이 거기에 맞추어 변화된다. 그러면 나아지기 힘든 두 번째 단계의 우울증이 된다. 조금 더 이야기하면 이런 순서가 된다.
첫 번째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로
1. 감당하기 힘든 일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거나,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예를 들어 이별, 누군가의 비난, 실패, 신체적인 손실, 재산적인 손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위협 등이 있을 때면 우리 뇌는 이러한 상황들에 대처하기 위해서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에너지를 아끼려고 한다.
충분히 해결이 가능한 문제라고 생각되면 적극적으로 대처하겠지만, 해결이 힘든 문제라고 인식하면 웅크리고 지나가길 기다린다. 이것은 사람이 가진 생물학적인 특질과 관련된 것 같다. 해결이 힘든 문제를 경험할 때 우리는 주로 스트레스, 우울함, 화, 상실감 등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경험한다. 부정적인 감정들은 일종의 무의식적인 대처 방식이다.
2. 우리 뇌는 문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아끼려고 한다. 뇌가 활용할 수 있는 에너지(신체적인 자원들)는 무한하지 않다. 오히려 부족한 편이다. 문제 상황에서 뇌는 대처에 덜 중요한 기능들에 에너지 사용을 줄인다. 그래서 단기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는 학습 능력이나 소화 능력, 판단력 등이 떨어진다. 물론 여기까지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3. 문제는 이러한 상황들이 해결되지 않고 지속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이 지속되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기능들을 계속 덜 사용하게 된다. 특히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경험하는 ‘학습’ 같은 고비용의 능력은 더욱 사용되지 않고, 관련된 뇌의 배선들을 유지하는 것에도 에너지가 투자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능력들은 정말로 줄어든다.
스트레스나 피로 때문에 잠시 동안 잘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줄어든다. 말 그대로 머리가 나빠진다. 점점 판단력, 소화 능력, 운동, 면역력 등 모든 면에서 전보다 못해진다. 사회적인 교류도 줄어든다. 불확실한 면이 많은 피곤한 관계는 더욱 피하게 된다. 장기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몸에 염증도 많아진다. 이 염증들은 우리 몸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고, 뇌의 기능이 저하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4. 이런 변화가 반복되면 신체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점점 안 좋은 상태가 되고, 주변의 문제들은 더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우리 뇌는 에너지를 더 아끼려 하고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러다 보면 우울증의 두 번째 단계인 뇌가 만성적으로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착각하는 상태에 빠진다.
뇌의 생화학적인 수준, 염증, 여러 가지 기능의 저하 등 때문에 뇌는 점점 외부의 상황이나 우리 신체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시작한다. 뇌는 실제보다 상황을 더 나쁘게 보기 시작하고 왜곡된 현실에 대처하려고 한다. 착각에 빠진 뇌는 항상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판단한다. 만성적인 에너지 부족 상태는 통제할 수 없는 우울감이나 무기력 등으로 나타난다.
우리를 에너지 부족 상태, 위기 상태로 만드는 것은 부정적인 인식만이 아니다. 좋지 않은 생활 습관, 과도한 업무, 피로 등도 원인이 된다. 질병 또한 원인이 될 수 있다. 물론 많은 경우 원인은 복합적이다. 생활 습관이 대처 능력을 떨어뜨리고 이는 삶에 큰 스트레스 상황을 불러오는 식으로 얽혀있을 수 있다.
첫 번째 단계의 원인은 다양하기 때문에 우울함이나 불안 등의 감정적인 경험이 없이 두 번째 단계의 우울증에 이르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특별한 이유가 없었는데 어느 날 보니 우울증, 무기력증 같은 것에 걸려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
두 번째 단계의 우울증은 겉으로는 첫 번째 단계의 우울증과 비슷해 보이지만 많이 다르다. 첫 번째 단계는 주로 인식/생각이 우울증의 증상을 만들지만, 두 번째 단계는 만성적인 뇌의 착각이 우울한 증상을 만든다.
외부 상황과는 관계없이 뇌는 우리가 심한 에너지 부족 상태에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하루 대부분의 시간 동안 생각이나 의지, 상황과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아끼려고 한다. 의지와 관계없이 계속 우울하거나 무기력해지게 된다.
첫 번째 단계의 우울증은 특정 문제 상황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증상이 나타난다. ‘이젠 우울한 게 지긋지긋하다. 더 이상 우울하게 살지 않겠어.’ 이런 태도를 가지면 첫 번째 단계의 우울증에서는 쉽게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단계에서는 쉽지 않다. 오래 걸린다.
우울감이 만들어지는 과정
- 첫 번째 단계: 인식/생각 → 불쾌한 정동(신체적 느낌) → 우울함
- 두 번째 단계: 만성화된 상태 → 불쾌한 정동(신체적 느낌) → 불쾌한 인식/생각, 부정적인 판단 → 우울함
우울함, 불안, 낮은 자존감 등의 감정이나 극심한 피로, 무거운 몸, 무기력한 느낌 등은 뇌가(무의식이) 우리를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고 가만히 있도록 만드는 좋은 도구이다.
뇌가 사용하는 도구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르다. 누구에겐 불안이 가장 효율적인 도구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겐 극심한 피로가, 어떤 상황에선 우울함이, 다른 상황에선 물에 가라앉는 듯한 무기력함이 사용된다. 뇌는 특정 증상이나 감정을 만들기 위한 신체 느낌을 만들고 거기에 필요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감정은 신체적 느낌과 생각의 조합이다. 우울증에 빠진 뇌는 계속 우리를 가만히 있게 만들어야만 하고, 그래서 평소라면 하지 않을 부정적인 판단, 원치 않는 생각이 끊임없이 떠오른다. 물론 여전히 생각과 행동에 대한 통제력은 있다.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아 이건 아니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첫 번째 단계와는 달리 인식이 바뀌어도 신체적인 느낌은 잘 바뀌지 않는다. 그에 따라서 경험할 수 있는 감정도 제한된다.
예를 들면 첫 번째 단계의 우울증일 때는 상황에 따라 가끔은 즐거움도 느낄 수 있지만 두 번째 단계의 우울증은 우울함에서 벗어나더라도 즐거움을 느끼기는 힘들다. 오히려 아무 감정을 못 느끼거나 그저 멍할 수도 있다. 에너지를 아끼려 하는 신체 느낌을 중심으로 감정이 만들어지다 보니, 주도적이 된다거나, 활력 넘치는 등 에너지를 사용하게 하는 감정 상태는 경험하기 힘들어진다. 몸은 계속 무겁게 느껴진다.
잠이 많아지고 식욕이 늘어난다(에너지가 부족하다고 판단하는 경우). 상황을 위협적으로 인식하는 경우(뇌의 상실 예측)에는 오히려 잠이 없어지는 것 같다. 위협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 민감해진다. 정상적인 상태보다 더 많은 것을 위협적으로 느낀다.
에너지를 아끼려고 하는 뇌는 외부 조건 때문에 에너지가 사용되는 일도 미리 막아야 한다. 따라서 사람은 소극적이 되고, 공격적이 되고, 방어적이 된다. 누군가 우리를 변화시키려 한다면 회피하거나 오히려 화를 낸다. 조금이라도 피곤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상황은 모두 피한다. 더 쉽게 공격받는다고 느끼고 자존감이 낮아진다.
인간관계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사람은 서로의 에너지를 활용하여 상대방의 신체적인 활동을 조절해 준다. 다른 사람이 나의 감정, 느낌, 생각 등을 조절하는 데 도움을 주고 나도 다른 사람들이 감정, 느낌, 생각, 행동 등을 조절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우울증에 있는 사람의 뇌는 자신이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 활동을 통해서 타인을 도와줄 여력이 없다. 반대로 받으려고만 한다. 이는 상대방에게 큰 부담이 된다. 이래저래 인간관계도 점점 나빠진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기억력, 주의력, 학습 능력 등 개인의 능력은 점차 떨어지고 사회적인 관계, 건강 등도 모두 악화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 뇌는 에너지가 더욱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더 아끼려고 한다.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뇌의 착각은 점점 현실이 된다.
요약하면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지속되거나 신체적인 과부하를 주는 생활습관을 지속하면 우리 뇌가 만성적인 에너지 부족 착각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이 에너지 부족 착각 상태는 사람에 따라 우울증, 무기력증, 불안 등으로 다르게 나타날 수 있고 복합적으로도 나타날 수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실제로 여러 능력이 나빠진다. 특히 머리가 나빠진다.
중요한 것은 첫 번째 단계와 두 번째 단계 모두 부정적인 상태에서 빠르게 벗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우울감, 무기력함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느껴질 것이다. 심한 우울증에 있는 사람일수록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것이다. 불가능한 것이 사실은 아니지만, 느낌만큼은 사실이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필요한 것도 다르지만 몇 가지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는 것이 있다면,
- 첫 번째, 부정적인 감정에서는 빠르게 벗어나야 한다. 명상이든 다른 수단이든 스스로를 기분 좋게 만들 방법을 익히는 것이 좋다. 연습을 해두고 부정적인 감정을 알아차리고 벗어나야 한다. 정신적인 고통은 감정에 있지 상황에 있지 않다.
- 두 번째,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다. 자신의 인생에 주도적인 태도를 가질 때 뇌의 생화학적 조성은 우울증과는 완전히 반대다. 내가 할 수 없는 것,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해보고, 더 나은 가능성을 찾아보는 것이 좋다.
힘들더라도 이런 노력을 반복하다 보면 뇌의 착각도 점차 수정될 것이다.
원문: 도겸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