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 합의문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말 그대로 ‘파토’가 났던 2차 정상회담 이후 불과 4개월 만에 성사된 회담이다. 이는 8개월 만에 열렸던 1~2차 간의 기간보다 절반이나 짧다. 2차 회담의 공동 합의 결렬 이후 뾰족한 전환책이 나오지 않아서 자칫하면 장기 교착 국면으로 전환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4개월 만에 다시 ‘분기점’이 만들어졌다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다’는 일각의 비판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회담의 성사 자체가 가장 큰 성과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장소는 1–2차 정상회담 보다 한결 더 상징적인 (이보다 더 상징적일 수 없는) 곳이다. 사진만 찍고 헤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만도 충분한 성과라 할만한데 회담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이상의 ‘성과’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불과 2년여 전만 하더라도 전쟁 직전의 상황에 놓여 있던 양자가, 이제 ‘만나자’고 하면 만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1차 회담 이후 여기까지 이어진 여정 자체가 종전이라는 최종 목적지로 가기 위한 하나하나의 중요한 분기점 들이다.
단지 상징적인 부분들만 성과는 아니다. 이런 즉흥적(으로 보이는) 회담조차도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물 밑에서 실무자 간 협의와 조율이 필요하다. 비록 양 정상은 이 회담이 즉흥적 제의에 의한 결과라고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최소 2~3주 이상, 즉 G20 회담 이전부터 조율이 있었을 것이다. 그 얘기는 2차 회담 이후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던 실무자 간 협의 채널이 재가동 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짧은 시간 안에 이런 역사적 장소에서의 회담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는 것은, 양국의 실무자 간 채널이 거의 상시 가동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1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불과 1년 만에 만들어낸 변화들이다. 이 자체가 모두 ‘성과’이자 최종 목적지로 가기 위한 중요한 필수 통과 지점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 있어서 ‘한국 정부가 한 게 뭐 있냐’는 비판에 대해서도 조금 얘기해 보고 싶다. 지금은 비공개로 돌려진 듯싶지만, 모 언론사 부사장께서 어제 올린 ‘문재인 인내력’이라는 글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도 취임할 때는 한반도 정책, 대북정책에서 유연한 태도를 취하고 나름 획기적 구상을 했었다. 그러나 북한이 테스트 차원에서 던지는 비난에 발끈하고, 돌발사건 하나만 터지면 곧바로 봉쇄노선으로 회귀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못하고, 그냥 세월만 갔고, 그 기간 북한 핵은 더욱 개발되고 고도화했다.
백 배나 규모가 큰 집이 헐벗고 자존심만 센 작은 집을 대할 땐 인내와 관용이 필요하다. 서로 교류하고 오가면 큰 집은 결국 작은 집을 접수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땡깡도 놓고 예측불허의 행동도 하겠지만, 그건 초조감과 열등의식일 뿐이다. 우리가 똑같이 화낼 필요가 없다. 훗날 문재인 대통령의 인내력은 역사적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얼마 전 북한의 돌변한 태도에 대해서 ‘역시 북한은 저런 집단이라는 게 다시 한번 입증된 만큼 저렇게 나올 때는 유화 분위기를 접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주변국들과 함께 한국 정부가 앞장 서서 강력한 대북 압박에 나서야 한다’는 얘기들이 올라온 적이 있다. 만약 그때 한국 정부가 예전처럼, 그리고 저 의견들처럼 대북 유화 제스처를 접고 우리 정부가 강경 대응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혹자는 그런 상황이 되더라도 한국 정부는 어차피 이 국면에서 ‘패싱’ 당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와 상관없이 북미는 화해 무드를 이어갔을 것이라는 얘기를 하기도 하는데, 동맹국인 한국 정부가 강경하게 나오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동의하지 않은 DMZ에서의 회동 같은 이벤트가 과연 가능할까?
회동은 물론이거니와 지난 1–2차 회담에서부터 6·30의 역사적 3차 회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비에서 예전과 같은 교착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고 고비를 넘게 만든 배경에는 분명히 저 한국 정부의 ‘인내력’이 자리 잡은 것이다. 저 수없이 많은 예측 불허의 돌발적 상황과 주변국들에 의한 외교적 변수에도 한국 정부가 과거 정권의 해묵은 방정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새로운 해법으로 북미 관계를 물밑에서 조율하고 설득하며 풀어나간 것이야말로 바로 오늘의 또 한번의 새로운 분기점을 만들어 낸 원동력인 것이다.
1차 북미정상 회담이 성사된 지 불과 1년이다. 과거에 시선을 두지 않고 미래를 향한 시선을 가진 이들이 피땀 흘리며 노력한 이 1년 동안의 결과물이 판문점에 모였다.
덧
1. 따지고 보면, 트럼프가 종종 얘기하는 ‘그래서 옛날처럼 해서 그동안 변한게 있었냐’는 민주당을 향한 비난도 어떻게 보면 저 ‘인내력’에 대한 얘기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렇게 따지면 어쨌든 격식과 상식에 얽메이지 않는 트럼프의 스타일이 분명히 한반도 상황의 변화에 영향을 주는 것 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문제는 이런 파격은 어디까지나 트럼프 재임 기간 동안에만 유효한 것이고 그 이후에는 오히려 기존 동맹국 간의 외교 문법에서 벗어났던 저런 방식이 부메랑이 되어 역효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그만큼 이 트럼프의 재임 기간 동안 ‘북핵 문제의 해결과 더불어 북한의 불가역적인 개혁과 개방을 끌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난 그 부분을 정확하게 얘기해 온 문재인 대통령의 생각이 바로 저 ‘인내’의 원천이라고 본다.
2. 혹자는 이 모든 것들이 재선을 위한 트럼프의 쇼일 뿐이라고 얘기하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앞서 얘기한 것처럼 그 ‘쇼’를 위해서는 실무자들 간의 채널이 재가동 되고, 협의가 이어지며, 그 과정에서 교착 상태를 무너뜨리는 분기점이 형성된다. 다음번 시작은 2차 회담이 아닌 이 3차 회담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트럼프에게는 ‘쇼’라도 상관없다는 얘기다. 개인적으로는, 그간의 결과를 보면 한국 정부가 이런 트럼프의 성향을 잘 활용한다고도 보인다.
3. 한국 땅에서의 회담인데도 한국 정부가 전면으로 나서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도 보이는데, 남북 문제와 북미 문제는 별개이며 북미 문제는 오롯하게 양국 간의 문제(이른바 통미봉남)라는 기조를 유지해 온 북한 지도부의 입장은 물론이거니와, 언제나 쇼잉의 중심이 되길 원하며 이런 쇼잉 하나하나를 재선을 위한 중요한 이벤트로 보는 트럼프의 입장에서도 이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전면에 나서는 게 좋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한국 정부가 전면에 나설 경우 한반도 문제에 있어 자신들의 역할 역시도 중요하다고 여기는 러시아나 중국, 일본 같은 주변국들의 거센 외교적 압력과 간섭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랬다면 북미 양자간의 회담은 그 성사 자체가 어려웠을 수도 있었다. 이런 어려운 조건에서의 회담이 3차까지 성공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는 이 회담을 당사자 양국만의 문제로 국한하는 한국 정부의 적당한 존재감 조율도 큰 몫을 한다.
원문: 손원근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