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유상원조가 필요한가」를 다룬 글 이후, 유상이고 무상이고 간에 원조 자체가 없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질문이 왔다. 페이스북 댓글로 단 대답은 공간 제약 때문에 너무 짧아서 여기에 보충 설명을 겸한 답을 제시한다.
Q. 유상원조까지 없애야 한다?
김용빈 소장님, 무상원조와 비교해 유상원조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해주신 글을 잘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소장님께서는 이러한 유상원조의 특성을 고려하고서도 유상원조를 반대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유상원조는 금융 측면에서 보았을 때 싼 측면이 있을지 몰라도, 국제적 위상 측면에서 문제가 생긴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싼 금융을 이용함으로써, 항시 존재하는 부정부패와 부정적인 꼬리표를 떼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아프리카 국가들이 더 높은 이자율을 내고 더 양질의 투자를 이용한다면, 더 좋은 신용도를 받아 더 많은 양의 국채를 발행할 수 있을 것이다.
담비사 모요 『죽은 원조』 6장에서 가져온 내용입니다. 이미 오래된 책이지만, 아직까지 concessional loan을 집행하는 기관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유효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유상원조까지 없애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원조는 모두 나쁜 게 아닙니다
위 질문은 지난번에 다른 분에게서 받은 질문과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질문입니다. 무상원조 유일주의와 원조 무용론으로 서로 대립하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즉, 무상원조 유일주의(唯一主義)는 무상원조만이 유효한 원조 수단이라 여기며 유상원조를 ‘개발도상국의 피를 빠는 흡혈귀’로 묘사합니다. 반면, 원조 무용론(無用論)은 유상이던 무상이던 원조라는 것은 모두 ‘개발도상국을 부패와 무능으로 몰아가는 사탄’ 쯤으로 설명합니다.
원조 무용론은 예전부터 여러 사람이 주장했지만, 원조를 받는 나라인 잠비아 사람 담비사 모요가 2009년 ‘죽은 원조(Dead Aid)’라는 선정적 제목의 책에서 주장하여 세계 개발 협력계에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실은 평범한 학자가 아니라 하버드, 옥스퍼드라는 학력과 세계은행, 골드만삭스라는 경력으로 무장한, 백인이 아닌 흑인인, 남성이 아닌 여성인 ‘화제성 높은’ 사람이 주장해서 더욱 눈길을 끌었죠.
담비사 모요가 원조를 반대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해외 원조는 언제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현금을 제공함으로써 부패한 정부를 지탱해준다. 타락한 정부는 법치, 투명한 공공제도의 설립, 시민의 자유 수호를 방해함으로써 빈곤국에 대한 국내외의 투자 매력을 떨어뜨리는데, 이러한 심화하는 불투명성과 점점 줄어드는 투자는 경제성장을 감소시키고, 이는 더 낮은 취업 기회와 빈곤의 증가를 불러온다. 이처럼 늘어나는 빈곤에 대한 대책으로 공여국들은 또다시 많은 원조를 하게 되고, 이는 원조를 받는 국가들이 하강하는 빈곤의 소용돌이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게 만든다.
- 『죽은 원조』의 출판사 서평
원조는 부패를 조장하지 않는다
아프리카(를 포함한) 개도국에서 낮은 이자의 유상원조를 받아 부패가 더욱 조장된다고 하는 주장은 앞선 블로그 말미에 언급을 한 바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유상원조 때문에 부패가 더 심해지지는 않습니다.
최근, 국내 대학에 근무하는 외국인 교수가 ‘한국 ICT 원조 사업은 수원국의 부패를 강화한다’는 희한한 주제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만, 이런 식의 오해는 이전에도 상관관계와 인과관계 사이에서 헤매는 계량 경제학적 방법론을 통해 반복적으로 주장(혹은 제시)된 바 있습니다.
심지어 ‘한국 원조는 부패가 심한 국가일수록 집중적으로 지원된다’는 다른 연구 결과도 나와 있습니다. 논문은 논문으로 반박해야 하기도 하고, 여기서 복잡다단한 논의를 모두 펼칠 수는 없으므로 전문적 설명은 나중에 따로 하겠습니다만… 단언컨대, 이것은 오해입니다.
부패는 결코 쉽게 측정되지 않습니다. 현재 나와있는 부패 측정지표는 국가간 비교에 적합하지 않은 통계치입니다. 시계열 비교, 즉 어떤 국가의 과거와 현재 부패 상태를 비교할 때만 어느 정도 의미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부패는 개도국 공통의 흔한 특성입니다. 원조하고만 상관관계를 가지지 않습니다. 외국인투자액, 재외국민의 송금액, 경제성장률 등 여러 가지 지표와 관련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경제활동의 활력과 어떤 중요한 관계가 있지 싶습니다. 우리나라 경제발전사에서도 그랬거든요.
우리가 원조를 받아 발전을 초석을 다질 때, 한국은 부패하지 않은 나라였을까요? 그때도 원조가 한국을 더 부패하게 만든 걸까요?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유상(혹은 모든) 원조가 부패를 심화시킨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입니다. 원조가 몰리는 국가들, 즉 빈곤한 국가들 대부분이 부패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 맞습니다. 경험적으로 봐도 부패해서 국가가 못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못사는 국가가 부패합니다.
담비사 모요의 대안은 무엇인가?
담비사 모요는 원조를 악으로 규정하면서, 원조 의존에서 벗어나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정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아래와 같은 네 가지 대안을 제시합니다.
- 아프리카 국가들은 세계 채권시장에서 채권을 발행하고 수익률 하락시 대출자로부터 지급보증을 받은 아시아 신흥국들을 본받아야 한다.
- 공공기반시설에 대규모 직접투자를 하는 중국식 투자를 장려해야 한다.
- 농산물의 공정한 자유무역이 시행되도록 지속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즉, 선진국이 자국 농민에게 지급하는 다양한 농업보조금을 철폐하여, 아프리카 국가들이 농산물 수출로 수익을 높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금융 중개 기관을 키워야 한다. 소액금융을 확산하고, 빈민가 주민도 법적 소유권에 기초하여 집을 담보물로 활용하도록 하며, 이주 노동자의 고국 송금 비용을 줄여야 한다.
여기에는 맞는 말과 틀린 말이 뒤섞여 있습니다. 하나씩 따라가며 구분해 봅시다.
1. 투자는 투자할만한 대상을 찾아간다
더 높은 이자를 무는 대출이 곧 양질의 투자는 아닙니다. 양질의 투자는 대출자가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이어야 합니다. 국채를 발행하려면 시장에서 누군가가 그 국채를 사줘야 하는데, 신용도가 낮으면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으므로) 국채 발행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즉, 담비사 모요의 주장은 앞뒤가 바뀐 면이 있습니다. 일단 어떻게 해서든 신용도를 일정 수준까지 회복하는 것이 먼저이고, 그 신용도를 바탕으로 국채를 발행해야 합니다. 모요의 주장대로 국채를 발행하는 사실 자체가 신용도를 올려주는 게 아닙니다.
담비사 모요의 주장을 전후하여 실제로 아프리카 국가들이 국채를 발행해 한때 각광을 받았습니다만, 그 국가들의 투자환경이 개선되어 그런 것이 아니라 선진국 채권시장의 수익률이 너무 낮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상당수 국가가 채권관리를 못 해 IMF 관리체제로 들어가기까지 했습니다.
유상원조만으로 잘 사는 수준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준비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유상원조처럼 좋은 조건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재원이 있는데, 일부러 비싼 이자를 물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또, 유상원조도 관리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대규모 외채를 조달해서 어떻게 잘 관리할 수 있다 하겠습니까?
2. 묻지마 투자는 답이 아니다
담비사 모요는 아프리카의 공공기반시설 부족과 운송비, 복잡한 관료 시스템과 부패를 지적하며, 법적 제도적 투자환경을 개선하여 외국인 투자를 유인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얘기에는 당연히 동의합니다.
그런데, 아프리카 전역에 걸쳐 공격적 투자를 하는 중국을 좋은 사례로 들었습니다만, 여기에 전적인 동의는 보낼 수 없습니다. 담비사 모요는 온갖 국내문제를 따지는 서구식 투자를 비판하지만, 최근에 불거진 것처럼 중국의 묻지마 투자 역시 아프리카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중국의 투자는 일반적으로 외국인직접투자(FDI)가 가지는 미덕이 부족합니다. 현지 고용은 별로 늘지 않고, 계획수립에서든 수행과정에서든 현지 정부의 개입은 최소화됩니다. 아프리카인의 역량이 늘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합니다. 이에 비하면 자원 유출과 부실 공사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원조는 이런 현실에서 일부나마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유상원조는 대출받은 돈으로 현지 정부가 사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역량이 늘릴 기회를 제공합니다. 원조로 지은 인프라는 외국인투자를 유인할 수 있습니다. 실은 이런 간접적 유인보다 더욱 실용적인 모델은 FDI를 유인하는 데 유상원조를 직접 투입하는 겁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서구는 자신들의 앞마당인 아프리카에서 중국이 설치는(?) 것을 심히 못마땅해합니다. 그래서 온갖 비난을 쏟아냅니다. 이런 행태를 ‘국제규범’이라고 착각하는 한국인 일부가 이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진심으로(!) 중국을 얕보는 문화가 자리 잡은 국가이기도 하죠.
담비사 모요처럼 서구의 행태를 비난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중국의 진출을 서구식으로 비난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 관점에서,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보면 됩니다.
3. 자유무역은 그다지 자유로운 무역이 아니다
담비사 모요는 선진국이 농업 보조금을 철폐하고 아프리카국가의 농산물을 수입하는 것을 자유무역이라고 부릅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요가 예로 든 면화나 설탕은 아프리카의 대표적 농산물입니다만, 선진국에서 주로 생산하지는 않습니다. 유일한 예외는 미국입니다. 아래는 세계 면화 생산량 추이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아프리카가 (혹은 많은 개발도상국이) 여전히 면화를 생산한다는 현실 그 자체입니다! 미국이 자발적으로 농업보조금을 줄이지 않으면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덫에 걸려 있습니다. 트럼프가 아니라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미국은 절대 농업보조금을 줄이지 않습니다.
해결책은 개도국이 쥐었습니다. 면화를 생산하지 말아야 합니다. 식민지배자가 강제한 면화를 계속 재배하는 한, 언제까지나 식민지배의 경제적 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설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뭐 식민지배도 아니고 노예무역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설탕은 노예무역의 목적이자 결과물이니까요.
설탕 주요 생산국에 아프리카는 아예 없군요. 그러니 선진국에서 농업보조금 삭감해봐야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모요가 언급한 관세 문제는 좀 다르기는 합니다만…
자유무역 이슈에서 모요가 내린 결론에서 제가 동의하는 부분은 ‘원조가 아니라 무역’을 중시해야 한다는 ‘관점’입니다. 원조는 개발 협력의 일부일 뿐입니다. 개발 협력에 성공하려면 원조뿐 아니라 무역, 투자, 금융 등에 모두 힘을 써야 합니다.
4. 구더기가 무서워도 장은 담가야 한다
담비사 모요는 대출과 저축을 포함하는 소액금융과 재산의 법적 소유권 보장, 이주노동자의 송금에 대한 지원을 강조합니다. 모요가 근무했던 IMF와 세계은행(World Bank)이 맨날 하는 주장과 별다르지 않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원조와 별 관련 없을 것 같은 이 분야에서 성공적 원조 사례가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영국 원조 기관 DfID 산하에는 CDC(Commonwealth Development Corporation)라고 대출, 지분투자 등을 망라한 Fund 형태로 유상원조를 담당하는 기관이 있는데, 그 주요 투자 부문이 아래와 같습니다.
보시다시피 현지 금융기관에 대한 투자가 가장 많습니다. 현지(아프리카와 인,스,방,파)에서 필요한 소소한 투자수요에 런던에서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비생산적이고 불필요하겠죠. 그래서 아예 현지 금융기관에 돈을 가져다 놓는 겁니다. CDC와 사전 협의한 대로 잘 운용하라고요.
개인이든 국가든 최빈상태를 벗어나 어떤 의미 있는 성취를 이루려면 자금 조달이 필수입니다. 이때, 잘 쓰는 유상원조는 유용한 도구가 됩니다. 140여개 수원국 수는 그만큼 다양하고 많은 경제환경을 뜻합니다. 유상원조는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극약도 아닙니다. 모든 환경에 맞는 단 하나의 처방은 없습니다만, 유상원조를 받을 수만 있다면 최대한 잘 활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라는 속담이 있죠. 부패가 싫어서 원조를 받지 않는다면, 장은 언제 맛볼 수 있겠습니까? 적극적으로 구더기를 막아가면서 장을 담가야죠. 원조가 필요 없다는 담비사 모요의 주장을 일일이 반박하느라 말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할 말이 아직 많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원문: 개발마케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