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한 대학생으로부터 ‘왜 유상원조가 필요한가’하는 이메일 질문을 받았다. KOICA WFK 봉사단원 출신이기도 한, 우리 개발협력계의 새싹이다.
개발마케팅연구소 블로그는 이런 청년층을 주요 고객으로 하기에 회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른 청년들이 혹시나 가질 수 있는 오해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그 교신 내용을 정리하고 보완하여 공유한다.
Q. 유상원조의 이점?
공여국 입장에서 유상원조를 통해 기업의 진출을 돕고 후속 사업으로도 연계될 수 있다는 점은 이해하기 쉬운데, 수원국 입장에서는 유상원조가 어떤 이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수원국 입장에선 상환의무가 없는 무상원조를 선호할 텐데 「우리 개발협력계에는 우리 논리가 없다」는 글에서, 지분투자를 받든 대출을 받든 판단기준은 신용도인데, 무상지원만 받으면 언제 신용이 생기는가? 라는 이야기를 읽고, 신용도, 그리고 외국인직접투자(FDI)를 이끌어내는데 유상원조가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 전제를 잊지 마세요
우선 ‘수원국이 유상지원보다 무상지원을 선호한다(할 것이다)’라는 추정은 그 앞에 언급하지 않은 전제를 깔고 있어요. ‘같은 사업이라면’이라는 전제죠.
그러니까, 똑같은 200병상짜리 종합병원을 어느 공여국은 무상으로 지어주고, 다른 공여국은 유상으로 지원하겠다고 동시에 제안할 때, 수원국은 무상원조를 선호한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이런 유·무상 간 경쟁은 현실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 가상의 사건입니다. 유상원조로 지원하는 사업과 무상원조로 지원하는 사업 사이에는 사업의 성격과 예산 규모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간해서는 겹치지 않죠. 학교나 보건소는 주로 무상으로 짓지만, 도로, 철도 등의 인프라를 무상으로 짓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요.
물론, 수원국 정부정책상 유상원조를 받지 않겠다고 할 수도 있어요. 그럼 무상원조만 지원하면 되는거죠. 즉, 유상원조는 유상원조가 필요하다는 수원국 요청에 따라 지원되는 것이지, 공여국이 필요해서 지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벌려면 투자가 필요하다
국가든 개인이든 배를 곯는 최빈상태를 벗어나서 무언가 경제적 성취를 얻으려면 투자를 해야 합니다. 그 때 필요한 게 Loan, 즉 대출 인데 대출을 받으려면 대출조건을 정해야 하잖아요. 대출조건은 이자율과 상환기간이 핵심이죠.
이자율은 어떻게 정할까요? 돈을 빌려가는 측(개인이든 국가든 ‘차주’)이 돈을 갚을, 혹은 역으로 갚지못할 확률과 돈을 빌려주는 측(개인이든 국가든 ‘대주’)이 그 돈을 조달한 이자율을 감안해서 정해집니다.
대주의 조달금리는 다 거기서 거기니까 상수로 놓으면, 결국 이자율은 차주가 돈을 갚을 수 있을까가 관건인거죠. 누군가 혹은 어느 나라가 장래에 빚을 잘 갚을 지 어떻게 알까요? 일단 현재 가지고 있는 자산의 상황, 수익을 내는 정도를 봅니다.
- 참고: 금융은 어렵지 않다
거기에다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바로 ‘과거에 빚을 잘 갚았냐’라는 겁니다. 과거에 빚을 못 갚아서 부도를 낸 적이 있다면 누가 또 흔쾌히 돈을 빌려주겠습니까? 만약 과거에 전혀 빚을 진 적이 없다면? 신용도는 어떻게 측정될까요? 아주 깨끗한 사람?
그렇지 않습니다. 돈을 빌린 적이 없다면, 1. 빌릴 수 없었거나, 2. 매우 보수적인 사람이겠죠. 어떤 쪽이든 금융기관이 반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도낼 확률은 ‘알 수 없음’으로 나타납니다. 실제로 알 수 없죠.
건전한 채무 활용법
예를 들어 봅시다. 여기 가난한 가장이 둘 있습니다. 한 명은 건설 현장 노동자이고, 한 명은 노점상입니다. 똑같은 수준으로 가난합니다. 건설 현장 노동자는 성실하기는 하지만 빚을 지기 싫어서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살며, 조금씩 저축을 하는 생활을 이어갑니다. 그의 꿈은 저축한 돈으로 자기 가게를 여는 겁니다.
노점상은 지금은 비록 가난하더라도 미소금융 기관에서 이자율이 낮은, 아주 좋은 조건으로 소액을 빌려서 노점상을 운영합니다. 그 역시 빚을 다 갚으면 어엿한 자기 가게를 열고 싶습니다.
나중에 두 사람이 제대로 된 상가를 임대해 가게를 열고자 일반은행을 찾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신용 사회에서는 적은 돈도 못 갚으면 아주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몇 만원에 불과한 휴대전화 요금도 석 달만 체납하면 곧바로 신용불량자 명단에 올라갑니다.
반면, 금액이 많지 않더라도 꾸준히 돈을 갚으면, 매우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쌓은 신용으로 나중에 점포를 빌려 제대로 된 가게를 열 때도 은행은 돈을 빌려줍니다. 하지만, 그런 거래가 전혀 없는 사람은? 안됐지만 그냥 알 수 없는 사람일 뿐입니다.
위 얘기는 국가에도 비슷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나라 유상원조인 EDCF의 경우, 많은 수원국에 연리 0.01%라는 최저 이자율을 적용합니다. 상환기간은 최장 15년의 원금은 제외하고, 이자만 갚는 기간인 거치기간을 포함, 최장 40년까지입니다.
시장 금리를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공짜입니다. 실제로 국내에서 취약계층에 지원하는 미소금융이 연리 4.5%에 1년 거치, 5년 상환 조건임을 감안해 보십시오. (사업자등록이 없으면 2.0%이지만, 2천~7천만 원이던 대출한도가 5백만 원으로 확 줄어듭니다)
왜 취약계층에 공짜로 돈을 주지 않고 빌려주는 걸까요? 우리 정부는 그 정도로 야박한 걸까요? 아닙니다. 무상으로 지원해야 하는 대상과 항목이 따로 있습니다. 유상으로 지원해야 할 것도 따로 있지요. 무조건 무상만이 선이라는 사고는 단순함을 넘어 세상사에 무지한 겁니다.
다들 우리나라가 원조를 받아 성공한 국가라고 합니다. 성공에 원조가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확실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한국이 무상원조로 빈곤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받은 원조 가운데 압도적으로 유상원조가 많았습니다. 어찌나 많았는지 우리는 2009년 OECD 개발원조회의(DAC) 가입할 시점까지 상환 중이던 유상원조 차관 잔액이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경제개발의 역사는 어찌 보면 적절할 때 돈을 빌려, 잘 쓰고, 잘 갚은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런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가 다른 후발 개도국에는 ‘본격적인 개발 같은 꿈에서 깨라, 너희는 그저 무상원조나 받아 연명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렇게 말해야 할까요? 그게 우리가 그렇게 나눠주고자 하는 개발경험인가요?
고객이 원하는 것
물론, 저는 모든 경우에 유상원조가 좋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유상원조가 필요한 사업이 따로 있으며, 그런 필요가 있을 때는 과감하게 빌려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반면에 모든 원조는 무상원조여야 한다는 주장은, 그 ‘모든’이라는 포괄적 전제 때문에, 항상 틀립니다. 유상원조도 필요한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니까요. 사실, 정답은 필요한 쪽에 물어보는 겁니다. 그 이상의 답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서 유상원조 자금을 횡령하는 수원국의 부패 정치인과, 그런 정치인에게 뇌물을 주는 악덕 기업인, 고질병인 부실공사 등은 별도로 다루어야 할 문제입니다. 이런 걸 싸잡아서 유상원조 무용론을 펴는 것은 비논리를 떠나서 아예 논리 자체를 모르는 ‘무논리’죠.
이런 문제는 유상원조만의 문제가 아니라 무상원조까지 포함한 전체적 원조와, 원조 사업이 벌어지는 개도국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무상원조는 아무 문제도 없는데, 유상원조에서만 부패와 부실 문제가 나타나는 국가가 어디 있나요? 우리는 다만 이런 문제를 줄이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그게 유상이든 무상이든 가리지 않고요.
원문: 개발마케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