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 설계(Happiness By Design)』의 저자 폴 돌란의 두 번째 책 『Happy Ever After: Escaping the Myth of the Perfect Life』에서 발췌, 편집 후 The Guardian에 게재한 「The money, job, marriage myth: are you happy yet?」을 번역한 글입니다. 「② 좋은 직업을 가지고도 고통 속에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에서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사랑과 결혼에 관한 ‘담론의 덫’을 살펴보겠습니다. 담론의 덫은 그야말로 없는 곳이 없으니 당연히 처음부터 끝까지 지극히 개인의 선택이 되어야 할 사랑, 결혼, 가족에 관해서도 수많은 정답과 오답이 범람합니다. 어렸을 때 읽던 동화책의 결말을 먼저 생각해볼까요? 동화의 내용은 달라도 결론은 대부분 하나같이 이런 식이었을 겁니다.
그 후로 둘은 사랑에 빠져 결혼해 자식도 많이 낳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사랑에 빠져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도 충분한 해피엔딩일 텐데 굳이 결혼, 자식을 끼워넣었습니다. 동화책에나 나오는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어른이 된 우리의 머릿속에도 저 문장이 너무 강렬하게 남아 있어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삶을 이상적인 삶으로 여기며, 이 제도와 규범을 다른 이에게도 거리낌 없이 투영합니다.
“마흔 살’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결혼을 ‘못 하고’ 있다니 참으로 딱하다”는 생각, “아직 인연을 못 만난 거겠지, 곧 좋은 사람 만날 거야”라는 말은 아무리 진심으로 상대방을 위하는 말이었더라도 심하면 상대방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는 대표적인 담론의 덫입니다. 누구나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고, 결혼을 해야만 좋은 삶을 산다는 규범 따위는 애초에 없기 때문이죠. 짚신은 두 발에 신어야 하니 짝이 필요하겠지만,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엄밀히 따져보면 누구나 원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축복받은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가정 자체가 지나치게 낙관적입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부부도 많지만, 그렇지 못하고 중간에 종결되는 결혼 생활도 대단히 많습니다. 영국의 경우 결혼한 부부 다섯 쌍 가운데 두 쌍이 이혼합니다. 현실이 이런데도 평생의 인연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결혼생활이라는 이상만 좇자고 외치는 건 모순이고 가식입니다.
결혼에 관한 담론의 덫에 빠져 우리는 불같은 사랑으로 시작한 결혼에 즐거운 일만 가득하리라 기대합니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이죠. 상대방을 향한 사랑은 영원히 식지 않으리라 기대합니다. 맹세까지 하죠. 현실은? 결혼한 지 1년 정도 지나면 부부가 됐을 때의 불같은 사랑은 대체로 식습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물론 아니지만, 사랑의 온도가 상온으로 내려온다는 뜻이죠.
평생의 동반자가 된 만큼 내가 필요한 건 뭐든 상대방이 다 채워주고 해결해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나도 배우자가 원하는 모든 걸 맞춰줄 수 있나요? 세상에 그렇게 전지전능한 사람은 없습니다. 심리치료사 에스더 페럴은 이런 허상 가득한 결혼에 관한 담론의 덫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돌직구를 날렸죠.
수많은 부부관계가 삐거덕대는 결정적인 이유가 부부관계는 이래야 한다, 저래선 안 된다는 식의 온갖 규범과 규정들 때문이라는 걸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누군가 부부관계를 정리하고 결혼생활을 끝내면, 특히 오랫동안 지속해온 결혼생활이 끝날 때면 사람들은 “딱한 일이다”, “그동안 함께 산 시간이 아깝다”라며 이런저런 말을 보태기 바쁩니다. 하지만 함께한 시간 동안 당사자가 대체로 행복했다면 헤어지는 건 딱한 일이 아니며, 함께한 시간이 어땠는지 평가할 자격이 애초에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나온 시간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생각해봤을 때 두 사람이 서로 부부의 연을 이쯤에서 그만 끊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 내린 결정이라면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가운데 전에 만나던 사람, 지난번 배우자보다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인데도 억지로 참고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분은 많지 않을 겁니다. 사람은 적응력이 뛰어납니다. 아니다 싶을 땐 행복을 찾아 떠나는 게 낫습니다. 확신이 서지 않는 관계를 억지로 붙들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더 좋은 사람을 찾아, 혹은 혼자서 편하게 살려고 갈라서면 그만이라고 해도 남겨진 아이들에겐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지 않느냐는 지적이 있을 수 있죠. 일리 있는 지적입니다. 하지만 꼭 그렇다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버지니아대학교 연구진이 진행한 연구 결과를 보면, 아이들은 분명 부모의 이혼에 걱정, 충격, 분노 등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괴로워합니다. 단 이런 감정은 주로 단기적으로 나타나며, 부모가 이혼한 지 2년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대개 아이들에게서 부정적인 감정은 희석됩니다.
오히려 부모가 자주 다투는 집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됐을 때 행복한 정도를 비교해보면, 부모가 이혼한 집의 자녀들이 이혼하지 않고 계속 같이 살며 시도 때도 없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들보다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을 생각해서 참고 살아라’는 말이 일종의 담론의 덫으로 작용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더 엄밀한 근거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구를 만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서로 맞지 않는 부부관계를 억지로 붙들지 말아라.
근거없는 사회적 통념과 담론의 덫에서 벗어나 생각해보면, 이제는 결혼할 때와 마찬가지로 둘의 관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잘못된 관계는 정리해 바로잡는 새출발인 이혼을 향해서도 ‘축하 인사’를 건네주는 문화가 자리잡아야 합니다.
사랑과 결혼에 관한 담론의 덫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알려줄 방법을 생각해봅시다. 우선 부모가 자녀들에게 가정교육을 통해 이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고 해서 반드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미리 알려주는 거죠. 평생의 인연을 만났다고 생각해서 한 결혼이라도 어떤 이유에서든 얼마든지 중도에 어그러질 수 있습니다.
이때 매끄럽게 이혼의 과정을 밟아낼 수 있으려면 금전적으로, 신체적으로,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준비가 돼 있어야 합니다. 학교에서도 청소년들에게 사랑에 관한 기초적인 사실을 정확히 알려줘야 합니다. 당장 불같은 사랑은 시간이 흐르면 식기 마련이라는 당연한 사실부터 알려주는 건 어떨까요? 이 사실을 확실히 이해하고 성인이 되면 담론의 덫에 낀 안개와 먼지를 털어내고 좀 더 현실적이고 주체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을 겁니다.
결혼과 이혼, 그리고 그에 따라 영향을 받는 어린이들을 다루는 법적인 체계도 이번 기회에 손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많은 나라에서는 결혼하는 이성 부부에게 법적으로 수많은 혜택을 줍니다. 당장 부부가 되어야만 받을 수 있는 세제 혜택이 많죠. 이런 혜택을 계속 주는 게 과연 옳은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자유 지상주의나 평등주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혜택을 줌으로써 결혼하는 것이 올바른 삶, 결혼하지 못하면 실패한 삶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은 하나의 제도를 강요하는 일로 문제가 많습니다. 일괄적으로 결혼을 장려하는 제도 대신 다양한 형태의 결합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 필요한 혜택을 지정하는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각자 상황에 따라 권리와 책임에 맞는 혜택을 받으며 살 수 있는 거죠. 그러려면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받아들일 준비를 사회적으로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또한, 정부가 가족 문제에 개입할 때는 명확한 원칙을 정해놓고 기준을 따라야 불필요한 논란을 피할 수 있습니다. 즉 부부관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식에게 부모의 도리와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장치를 만들어놓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아이들이 부모가 각자의 행복을 위해 부부관계는 정리하기로 한 상황에서도 필요한 교육을 최대한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담론의 덫을 헤쳐나가는 일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사랑과 결혼에 관한 담론의 덫처럼 널리 퍼진 통념, 제도화될 만큼 깊이 뿌리내린 ‘정답’과 싸우는 일은 더욱 그렇죠. 또한, 소셜미디어 때문에 예전에는 굳이 드러내지 않던 사소한 일상까지 포장하고 공유하게 되면서 다른 이들이 하는 대로 하지 못하면 낙오한 인생, 실패한 삶이라는 압력이 한층 강해졌습니다. 소셜미디어가 담론의 덫을 몇 배는 더 튼튼하게 쳐놓은 셈입니다.
그러나 저는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을 오로지 소셜미디어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습니다. 소셜미디어가 만들어내고 강화하는 담론의 덫을 우리가 무시하고 걸러낼 수 있을 만큼 성숙했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 아니었을까요? 게다가 소셜미디어가 담론의 덫을 강화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를 적절히 활용하면 담론의 덫을 극복하는 흐름을 만들어내는 훌륭한 창구이자 통로로 쓸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친환경적인,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작은 것부터 쓸데없는 소비와 낭비를 줄여나가는 운동인 ‘미니멀리스트 되기’ 같은 캠페인은 회원만 80만 명을 거느립니다.
페이스북에는 아이 없는 결혼생활이라는 페이지도 있습니다. 2만여 명이 팔로우하는 이 페이지는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한 부부 혹은 커플이 아이 없는 생활의 좋은 점과 여러 가지 팁을 공유하는 페이지입니다. 사회적 담론에 비춰 보면 잘못된 선택을 하고 그릇된 길을 가는 실패 예정자들이 모여 반대 담론을 가꿔나가는 겁니다.
헤이온와이(Hay-on-Wye)에서 열린 축제에서 제게 말을 걸었던 사람 이야기로 돌아가보죠. 그는 제가 서민층에서 자수성가해 공부하고 교수가 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행동 양식이 있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문제라는 점을 아주 분명히 밝히며 자신이 뒤집어쓴 담론의 덫을 제게도 같이 씌우려 했습니다. ‘노동자 계급 출신의 일그러진 영웅’ 행세를 하는 저를 바로잡아주고 싶어서 거의 안달이 났죠.
사실 온라인상에 달린 저에 대한 평가와 감상들을 보면 이 사람처럼 생각하는 분이 상당히 많아 보입니다. 제가 《가디언》에 글을 한 편 기고하고 사진으로 제가 늘 쓰는 하얀색 테의 안경을 쓰고 스포츠 시계를 찬 채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사진을 썼는데, 글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사진에 대한 댓글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제가 쓴 글과 책의 주제를 들먹이며 “아,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은 먼 데 있지 않았구만. 특이한 안경 하나 멋대로 걸치고 유행 따라 시계 차주고 운동하면 되는 거였어.” 같은 식으로 쓴 댓글이 더러 눈에 띄었습니다.
한 번은 제가 소설 같은 픽션은 즐겨 읽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가 언론은 물론 학계 안에서도 뭇매를 맞은 적이 있습니다. 최근 일은 아니고 꽤 오래 전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런던정경대학교 교수라면 일에 관해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규범 외에 여가를 어떻게 보내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양식이 꽤 빡빡하게 짜여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규범, 정답, 담론의 덫을 지키고 따르다 보면 진짜 제 모습이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는 것 같아 불편하고 힘들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담론의 덫을 지키고 따르면 사실 일상은 꽤 편리해집니다. 그래서 담론의 덫에 저항하는 건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야 하기 때문에 하는 거죠.
물론 매번 진짜 나를 찾아 사회적 통념, 정답에 저항할 때마다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붓고 투쟁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담론의 덫을 받아들이고 사회적인 통념을 따르기가 나와 도저히 맞지 않아 불편한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어떻게 살아야 옳다는 생각부터 떨쳐내야 합니다.
정해진 답 같은 건 없습니다. 결국 우리 인생은 수많은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내리는 선택이 모여 만들어집니다. 그때그때 통념을 따를지, 아니면 반기를 들고 내 생각대로 할지 판단하면 됩니다. 판단의 기준은 내가 얼마나 편안하고 행복하게 이 결정을 받아들여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느냐가 우선입니다. 그다음에 내 결정이 주변 사람들, 나아가 사회에 미칠 영향도 생각하면 좋겠죠.
다른 사람의 결정을 지켜볼 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야만 그 사람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내린 결정일 테니, 사회적인 통념에 비춰볼 때 ‘이상하거나 틀렸더라도’ 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영원히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완벽한 삶’ ‘정답’ 같은 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원문: 뉴스페퍼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