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인의 자소서를 봐주면서 가장 많이 고친 단어는 진정성이다. 사회생활 중 자신을 설명할 때 조심하는 단어 역시 진정성이다. 진심이나 진정이라는 단어는 뜻은 조금 다르나 결과적으로는 마음의 순도를 뜻하며, 진정성은 진실하고 참된 순도가 바탕인 성질을 뜻하나 이 세 단어는 실상 의미 구분 없이 쓰인다. 그리고 자신 혹은 제 일에 ‘진심’ ‘진정’ ‘진정성’을 붙이는 사람을 우리는 꽤 흔하게 볼 수 있다.
자신에게 ‘진정성’을 수식하며 스스로 특권을 부여하는 경우는 많다. 대부분 발화자는 ‘나의 마음은 타인에게는 이미 없는 무엇이며, 타인보다 진실하고 크다’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안타깝지만 그 전제는 무조건 그르다. 마음은 측정이 불가하기 때문이다. 물론 측정 여부와 관계없이 때때로 진심은 닿는다. 표정이나 말투, 공기 너머 서로의 마음이 찌르르 와닿는 순간은 분명히 존재하며 또 드물어서.
“그 사람에게서 진정성이 느껴졌어”는 타인에게 줄 수 있는 무엇보다도 높은 평가라 할 수 있겠다. 그렇게 타인의 진심에 날로 많은 가치를 부여하다 보니, 나는 무언가에 간절해질 때마다 나의 ‘진정성’을 앞세우고픈 충동에 시달린다. 진심이야말로 높은 가치이자 선한 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재산이며, 아무것도 없는 이일수록 내세우고 싶은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내가 타인에게 사용하거나, 타인이 나를 수식할 때 사용해야 적합하다.
생각보다 많은 이가 각자의 자리에서 진심과 진정으로 산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가고 싶은 방향이 어디인지 모르고 매일 같은 시간 출퇴근을 하는 이가 있다고 치자. 나는 생활에 아로새겨진 일정한 출퇴근이 어디로라도 속하고 싶은 그의 진심을 증명한다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실연을 겪은 어떤 이가 이상하리만큼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한다고 치자. 나는 어떻게든 아무렇지 않아지고 싶어 버티는 모습이 그의 진심을 증명한다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마음이란 다양해 어쩌면 세계는 각자 다른 진정성으로 굴러간다. 그러니 우리가 ‘진정성’을 가치 판단과 선택의 측면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조금 다른 측면이어야 한다.
글을 너무 쓰고 싶었고 쭉 쓰고 싶다. 성정이 못된 나는 온·오프에 글 쓰는 많은 이들을 비웃고, 저런 감성으로도 취할 수 있다니 부럽다며 냉소한다. 그러나 진정성으로 크리틱을 하지는 않는다. 그가 작가가 되고픈 마음과 내가 작가가 되고픈 마음은 결과적으로 같다. 누구 진심이 더 큰지, 그리해 누가 더 진정성을 가졌고 더 중한지 나는 판단할 수 없다. 나는 이미 내가 더 중하다는 편견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진심에 가치를 더 부여하는 이 편견은 내가 글을 쓰게 하는 중요한 동기이자 꼭 필요한 마음가짐이다. 단지 내가 나를 믿는 만큼, 나와 같은 진심들 사이에서 대상에게 더 다가가고자 노력하는 게 나의 진정성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 믿는다.
진정성은 내 안에서는 또렷하지만, 바깥의 상대에게는 상대가 느낄 때 존재한다. 그걸 따지고 들 때부터 우리는 각자의 진정성을 핑계로 타인의 진심을 평가절하한다. 대상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대상의 마음과 내 마음의 연결고리를 찾아 최대한 헤매거나 헤지 않으며, 원하는 걸 서로 주고받는 길을 만드는 과정. 그 과정이 상대에게 통할 때 나는 ‘네게 진정성을 느꼈어’라는 말을 훈장처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이성의 외모를 보는 게 내면을 경시하는 건 아니다. 물론 내면은 내가 이성을 볼 때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지만, 외모가 내 취향이거나 그를 대체할 무엇이라도 있어야 내면을 볼 수 있게 대화라도 되는 것이다. 되려 나의 취향을 속물 취급하는 이는 내가 끌릴 무엇도 가지지 못했음을 스스로 증명한다. 외모가 둘 다 내 취향이 아닌 두 명이 있고, 내가 SNS에 오래전 어깨가 넓은 남자를 좋아한다 썼다고 가정해본다. 외모에 어떤 노력도 없이 커다란 마음만을 주장하는 전자와 묵묵하게 헬스장을 가기 시작했다는 후자가 있다면 나는 언제나 후자를 택할 것이다.
또 하나. 나는 선물 실패자를 정말 싫어했다. 가끔 내 취향과 정반대의 선물을 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런 이에겐 화까지 나곤 했었다. 역으로 내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을 한 사람들은 오래 남는데, 그건 마음을 주장하기에 앞서 내게 어떻게든 연결되고자 하는 노력이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진심의 무게를 말하는 사람일수록 그 진심이 상대에게 쌓인다는 걸 알아야 한다. 모든 호의에 가까운 것들을 수용하는 것 또한 호의라는 걸 올바르고 선한 많은 이들이 모르고 산다. 마음이 공짜였던 적은 없다.
냉정하게, 진정성 보다 앞세워야 하는 건 ‘노력’을 ‘잘하는’ 것이다. 무언가에 진짜인 마음이 진정성이라면, 진짜라는 걸 보여줄 수 있는 건 ‘맞춤형’ 노력이다. 그건 생각보다 어렵지만은 않다. 상대 역시 진정성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 즉 나와 다른 동시에 귀하다는 걸 받아들이면 된다. 그런 걸 우리는 존중이라 하며 노력은 거기서 온다. 지난한 노력에서야 마음이 통할 수 있다. 그 과정이 힘들기에 우리는 오늘도 노력에 앞서 성급히 자신의 진정성만을 제시하는지 모른다. 나는 꽤 많은 이들이 자기의 마음만을 강조하고 고집하다가 결국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절망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저 단어를 조심하는 이유다.
원문: 임지은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