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고양이에 대한 글을 써 달라, 그런데 이게 대선 특집이다’란 말을 듣고 과연 뭘 써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써야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다. 나야 고양이를 어느덧 10년씩이나 키우고 있는 터라, 사실 고양이가 애완동물로 얼마나 뛰어난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할 일이 없었다. 너무 당연히 내 곁에 있는 존재인 까닭이다. 하지만 문득 생각해 보니, 이 고양이가 없으면 삶이 참으로 팍팍할 것 같아, 왜 그런지에 대해 조금 써 보기로 했다.
일단 별로 중요하진 않지만 괜히 있어 보이는(!) 딱딱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고양이는 식육목 고양이과에 속하는 동물로, 크기는 성체를 기준으로 30~60cm, 꼬리는 25~40cm, 무게는 2~8kg 정도이다. 역사적으로는 약 5천 년 전 이집트 지방에서 키우던 것이 현재 서구 집고양이의 원조로 알려져 있으나, 1만년 전부터 키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애완동물로서 개의 1.5만년 역사에 비하면 짧은 역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개의 경우 떠돌아다니던 늑대가 인간의 음식물 쓰레기와 분변 등을 식량으로 삼기 위해 인간 근처로 오게 된 것이 그 원조로 알려져 있어, 사육이라기보다는 공생에 가까운 형태로 관계가 시작된 것 같다. 그리고 고양이의 사육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기록도 정확하지는 않아, 무엇이 더 오래된 인간의 친구인지를 확언하기는 조금 힘들 것 같다.
다시 원점으로 화제를 바꾸어,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내가 왜 고양이를 키우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니, 아주 예전 –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 “그래도 미래에 수의사가 될 텐데, 애완동물 한마리 안 키워서야 되겠느냐”며 날 구박하던 ‘여자친구’가 결국 내 생일 선물로 고양이를 선물해 준 것이 그 계기였다. 사실 그녀와 헤어지게 된 큰 이유 중 하나가 고양이를 돌보다 여자친구에게 소홀해졌기 때문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당시에는 데이트 분위기가 아무리 좋아져도 어린 고양이를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집에 들어가곤 했고(…),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여자친구와의 관계도 자연스레 소원해지게 된 것이다. 아마 그녀는 내가 고양이를 키우면서 그녀를 더 생각해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오판이었고, 고양이는 여자친구와는 다른 소중함으로 날 오히려 여자친구와 멀어지게 만들었다(…).
대체 고양이는 무슨 매력으로 날 유혹하여 이런 처참한 결과를 낳은 것일까.
첫 번째는 적당한 거리감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인데, 고양이는 어지간하면 사람을 귀찮게 하지 않는다. 개는 내 생활 속으로 파고들어 늘 나와 붙어 있기를 원하지만, 고양이는 적당한 거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부르면 그제서야 가까이 다가온다. 내가 집에 들어오면 고양이는 다리에 몸을 부비적대며 반가움을 표시하지만, 그러다가는 금세 자기의 쉬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개처럼 붙어서 안아 줄 때까지 칭얼대지 않는다.
또 집에서 컴퓨터를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과 집에서 술을 마시거나, 또는 므흣한 상황이 일어나는 모든 경우에, 고양이는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자신만의 생활을 하고 있다. 고양이에게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생활을 충분히 영위하게끔 해 주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도도해 보인다’며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지만, 사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때도 고양이는 주인에게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아니다. 만일 자신을 찾는다는 신호가 있으면 이내 다가와서 살갑게 군다.
이런 행동은 고양이가 사람에 완전히 종속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독립된 개체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애완동물로써 고양이의 가장 매력적인 점이며, 늘 주인에게 ‘종속’되어 있어야만 하는 다른 애완동물보다 고양이를 훨씬 부담 없이 동거할 수 있게 해주는 장점이다.
이왕에 대선 특집이니, 이 부분에 대해 조금만 생각을 확장해 보자. 누가 당선이 되든 나라에 크게 문제는 없을 거라고 다들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을(국민이란 말은 너무 전체주의 적이니 좀 자제…) 개처럼(…) 자기에게 종속시키고 의존하게 만들거나 할일 없으면 괴롭히고 싶어하는 후보, 고양이처럼 서로 존중하고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괴롭히지 않는 후보, 두 후보 중 어느 쪽이 나에게 편안함을 줄 것인가?
다시 고양이의 매력으로 돌아와, 고양이의 매력 그 두 번째. 고양이는 사람이 키우는 동물 중 – 믿기 어렵겠지만 – 유일하게 사과와 화해의 제스쳐를 취하는 동물이다. 혹 주변사람이 고양이를 혼냈더니 고양이가 복수로 집 앞에 죽은 쥐를 가져다 놨다거나, 머리맡에 반쯤 몸이 잘려나간 바퀴벌레가 있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고양이는 몹쓸 것 혹은 옛날 이야기에서 나오듯 요망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행동을 일반적인 동물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고양이가 준 쥐나 바퀴(때로는 참새도 있고, 동네에 따라선 도마뱀도 있다)는 사람에겐 혐오물에 불과하지만, 하루 한끼 이상먹기 힘든 길고양이에겐 무척 소중한 음식이다. 물론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에게도 특별히 노력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특식이고. 즉 고양이의 입장에서 보면, 이건 서로 동질감을 느끼고 상대를 받아주는 제스처로서 소중한 음식을 나누어주는 행위를 한 것이다.
반면 다른 애완 동물은 비슷한 상황에서, 단지 배를 보이거나 숨음으로써 이를 피하려는 행위를 보일 뿐이다. 반면 고양이는 큰 손해(우리가 느끼기에는 테러지만, 고양이에게는 로또 2등을 넘겨주는 것 같은 손해다)를 보는 것을 감수하고 진정성을 보여 제대로 사과받으려는 행동을 취한다. 이런 행동을 대통령 후보에 대입해 보자.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 배만 잠시 뒤집고 넘어가는 그런 후보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제대로 사과를 하는 후보, 어느 쪽이 더 좋을까?
고양이의 매력 그 세 번째. 고양이는 크게 손이 가지 않는다. 처음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가장 큰 문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몇 배나 일이 많다는 것이다. 배변 훈련과 식사, 살기 좋게 온도를 맞춰주는 것, 놀아 주는 것, 그리고 애완동물에게 훼손당한 물건을 복구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애완동물을 기른다는 것은 상당한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이런 것이 애완동물을 버리게 되는 아주 큰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고양이는 이 모든 부분에서 다른 애완동물보다 훨씬 손이 적게 간다. 배변에 대해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냄새가 잘 나지 않을 곳을 찾아 배변을 하고, 악취를 없애기 위해 모래를 덮어놓는다. 그리고 음식을 많이 주더라도 자기에게 필요한 양만 먹고 더 많이 먹지 않으며(물론 과식하는 녀석들도 있지만 상대적으로는 적은 편이다), 이미 음식이 있는데 더 달라고 칭얼대는 경우도 적다. 개의 경우 있으면 배가 부르든 말든 자기 밥그릇에 있는 것을 다 먹어치워서 끼니 때마다 챙겨줘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비하면 얼마나 편한가.
그리고 집의 온도를 시원하게나 따뜻하게 맞춰놓지 않아도 알아서 시원한 곳이나 따뜻한 곳을 찾아간다. 물론 개도 그런 경우가 많지만, 고양이보다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좁아 손이 더 많이 가게 된다.
놀이의 경우도, 고양이는 정말 아무 물건이나 대강 바스럭거리는 걸 찾아 던져주면 어지간하면 15분 정도는 거기에 집중해서 잘 논다. 주인에게 놀아줄 것을 강요하지 않으니(물론 ‘어지간하면 놀아주는게 어때’ 라는 눈빛을 보내기도 하지만), 내가 원할 때 함께 놀아주면 되고, 아니면 혼자 놀게 하면 된다. 하지만 인류의 친구라는 별명까지 붙은 개는 어느 정도 이상 같이 놀아주지 않으면 운동 부족에 빠지기도 쉽고, 그 결과 이상 행동으로 집안의 물건을 파손하기까지 한다. 그에 반해 고양이는 놀이 뿐만 아니라 운동도 스스로 해서 운동부족에 빠지는 경우가 적고(아예 없다고는 하지 않겠다), 따라서 스트레스로 인한 기물 파손도 없어 집에 들어왔더니 가구가 쓰러져 있더라 – 하는 식의 지옥도를 연출하는 일이 없다.
생각해보라. 3대 지랄견은 있지만 3대 지랄묘는 없다! 위의 모든 장점은 고양이가 스스로 독립된 개체로 생활하기 때문이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수첩에 하나, 둘씩 생각해야 할 일들을 전부 적어 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대선으로 넘어와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전부 적어줘야 그제야 어떻게 할지를 아는 사람, 아무것도 안 적어 주어도 알아서 판단해서 행동하는 사람, 과연 누가 나를 위한 선택일 것인가?
결국 나는 이런 매력에 빠져 여자친구 대신 고양이를 선택했다(…). 그럼 이번엔, 고양이의 생물학적인 장점에 대해 딱 2가지만 더 이야기해 보자.
가장 먼저 이야기할 부분은 형태의 완전성이다. 같은 과에서 가장 형태의 변화가 없는 것이 고양이과이다. 고양이과의 동물은 몇몇 종에서 코의 길이 차이를 보이는 것을 빼면 뼈나 근육 형태에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물론 겉의 부속인 털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많으나 몸의 비율, 근육의 쓰임등이 거의 완성이 되어 큰 변화가 없다는 말이다.
그에 비해서 가장 많이 키운다는 개과는 지역과 생활별로 너무도 큰 차이를 보인다. 얼굴의 형태부터 다리길이 비율, 허리길이 비율, 귀의 형태, 눈의 위치 등 필요에 따라 다른 부분이 너무도 많다. 개과는 컵 사이즈부터 마스티푸까지 있으니 형태가 다른게 당연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많지만, 고양이과는 일반적인 고양이부터 가장 강력한 육상 육식동물인 호랑이까지 그 크기 차이가 더욱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뼈나 근육등의 해부학적 구조가 일치하는 것이다.
크기 문제에 대해 한가지 더 첨언한다면, 개에서 일어난 목적에 따른 크기 변화 때문에 얼마나 많은 질병이 생기는지도 생각해보자. 대표적인 것으로 쉐퍼드의 뒷다리 탈구, 티컵강아지의 다리관절문제, 닥스훈트의 허리 질환 같은 것들이 필요에 따라 어울리지 않는 형태를 교배로 탄생시키면서 발생하게 된 문제들이다.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는 형태였으면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
이는 마치 정당이나 대선 후보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정책을 억지로 끼워 맞춰 선전한 뒤, 당선 후에는 완전히 변질되거나 실행을 해도 문제가 생겨 잘 돌아가지 않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에 비해 스스로 처음부터 어느정도 완성된 정책을 갖추고, 다양한 변화에도 문제 없이 자신의 할일을 제대로 해내는 고양이 같은 후보야말로 좀 더 제대로 된 후보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야기 할 것은 고양이의 식생활이다. 다른 동물과는 다르게 고양이는 단맛을 느끼지 못하며, 이로 인해 사람의 주식인 탄수화물을 덜 탐하는 식성을 보인다. 고양이는 원래 사냥을 하고 살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단백질과 지방을 선호하게 되었고, 이런 선호가 시간이 지나며 탄수화물에 덜 민감하고 이를 크게 좋아하지 않는 입맛을 낳지 않았을까 하는 가설이 있다.
고양이가 탄수화물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고양이와 함께 살 때 사람의 음식을 탐할 염려가 적다는 말이다. 이는 정치인이 사람들의 몫과 이익을 함부로 탐하면 안되는 것과 비슷하다. 그와 반대로 개는 어떤가. 사람과 기본적으로 똑같은 입맛을 갖기 때문에, 식탁 밑에서 밥을 나눠달라고 조르거나, 사람이 먹는 고염식을 탐하다가 결과적으로 너무 많은 염분을 섭취해 스스로의 건강을 망치고 만다. 이런 모습이 특소세 대신 부가가치세를 올리고, 상속세를 낮추면서 누진세는 올리지 않는, 먹을게 엄청 많으면서도 서민의 밥그릇만 집요하게 노리는 모 정당 모 정치인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차라리 고양이처럼 최소한 내 밥그릇을 빼앗지 않는 후보가 나의 삶의 평안함에는 365배 좋지 않을까.
이상, 고양이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를 적어보았다.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어떻게 이야기를 짜내 쓰긴 했지만, 사실 나는 개에게도, 고양이에게도 불만이 없다. 그런 아름다운 생물들을 감히 대선 후보와 비교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미안하지만, 비유일 뿐이니 부디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래도 정말 개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 보다는 고양이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나의 현실에 훨씬 더 큰 평안과 만족을 줄 것 같지 않은가. 더 긴 이야기를 하는 건 괜히 손가락만 아픈 일이 될것으로 생각되므로, 여기서 그만 글을 줄이고자 한다. 내일 모레, 건투를 빈다.
[box title=”편집자가 드리는 말씀” color=”#333333″]이 글은 개와 고양이라는 대표적인 애완동물(반려동물)의 성향을 통해 대선 후보를 조망하기 위해 쓰여진 허구의 글입니다. 매체 및 필자의 실제 지지 후보와 이 글의 방향은 무관합니다.[/b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