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 ‘영웅문’의 김용 선생 타계하다」에서 이어집니다.
2018년도 저물어가는 요즘, 저는 20여 년 만에 또다시 한국무협과 중국무협이 조우하는 놀라운 풍경을 목도합니다. 그사이 한국과 중국의 장르소설계는 거시적으로 동일한 흐름을 보여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웹소설’의 출현입니다.
한국과 중국 장르소설 모두 서점과 대여점이라는 오프라인 플랫폼을 떠나 웹이라는 신종 온라인 플랫폼에 안착해 어마어마한 창작물을 양산합니다. 게다가 양국 모두 ‘유료 연재’라는 유통 방식을 채택했고 드라마, 영화, 게임으로 원작을 진출시키며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저는 솔직히 과거 김용 선생의 영웅문 3부작처럼 중국무협이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웹소설 출현 전, 한국무협과 중국무협 사이에 엄청난 거리가 조성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중국무협도 그사이 정통 무협에서 선협(仙俠), 즉 신선물과 무협물의 혼종물로 무게중심이 옮겨져, 그 이질성을 한국 독자가 극복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저는 제 판단이 틀렸다고, 우리 독자들이 중국무협의 이질성을 급속도로 극복했다고 인정했습니다. 카카오페이지와 네이버에서 연재 중인 중국 선협 웹툰 『요신기』와 중국 선협소설 『학사신공』의 인기 때문입니다.
193화 연재 중인 『요신기』의 독자 수는 31만 명이며 무려 724화 연재 중인 『학사신공』의 독자 수는 24만 명입니다. 그중 『학사신공』의 무협 분야 순위는 카카오페이지에서 15위, 네이버에서는 무려 2위입니다! 중국에서 웹툰의 유료화가 시작된 지는 고작 2년밖에 안 됐고 웹툰을 웹소설과 같은 선상에서 평가하기는 힘들기에 『요신기』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학사신공』의 이런 활약상은 제게는 놀랍기 그지없는 ‘사건’입니다. 지금껏 중국적 판타지의 주요 요소인 ‘도술’이 낄 틈이 없었던 한국무협계에서 어떻게 『학사신공』이 어떻게 이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는지는 아무래도 ‘게임화’라는, 한중 장르소설계의 동일한 거시적 트렌드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로맨스를 제외한 최근 한국 장르소설, 즉 판타지와 무협에서 ‘소환’, 즉 타임슬립 소재의 클리셰화를 제외하고 가장 두드러진 경향은 RPG식 플롯입니다. 플롯 전체가 주인공의 능력치 성장 과정이나 다름없고 주인공이 어떤 새 아이템을 얻어 각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느냐가 독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돼버렸습니다.
무협의 영원한 클리셰인 선과 악의 대립, 주인공의 기구한 출생과 복수는 온전히 남아 있되, 최소한의 문학적인 요소인 인물 간의 갈등과 욕망의 발현은 대단히 부차적인 형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가뜩이나 단순화되었던 문체는 한층 더 ‘매뉴얼’처럼 변하여 ‘글맛’이라는 것은 도저히 느낄 수 없게 돼버렸죠. 단지 재기 넘치는 말장난만 아직 효력을 갖습니다.
여기에 한국 시장에서 나날이 인기가 높아지는 중국 토종게임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미 선협 소재의 중국 게임들이 유통되는 상태이므로 그 게임들의 유저인 한국 독자들은 더 쉽게 중국 선협소설을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학사신공』을 기점으로 한국 웹소설 플랫폼에서 중국무협소설의 비중이 점점 더 커질 것이라고 봅니다. 『학사신공』의 원작인 『범인수선전』의 분량은 한자 770만 자입니다. 번역하면 약 1,600화, 그러니까 현재까지 연재된 분량은 전체의 절반도 안 됩니다. 게다가 이것은 1부에 불과합니다. 중국에서는 『범인수선전』 2부가 또 연재 중입니다!
그뿐인가요? 중국에서 이미 히트한 선협소설을 보면 대부분 500만 자 이상이며 심지어 1,000만 자가 넘는 것까지 있습니다. 중국의 웹소설 플랫폼에 정식 계약된 작가들은 무려 백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들이 이미 써서 완결한, 평균 이상의 퀄리티를 가진 무협소설이 대체 몇백, 몇천 종이나 될까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물론 외국소설의 국내 도입에는 한 가지 거대한 장애물이 있긴 합니다. 그것은 역시 번역이지요. 성장기인 한국 웹소설 시장에 얼마나 많은 빈 곳이 있든, 그리고 우리 독자들이 얼마나 많이 새로운 콘텐츠를 갈구하든, 중국어 구사자들이 이탈리아 장인들이 그렇게 하듯 “한 땀 한 땀 공들여” 번역하지 않는다면 중국무협소설은 우리 독자들을 만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 국내 대학의 중국 관련 학과가 백여 곳이 넘고 중국어 학습자가 백만 명이 넘으며 나아가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중국어 능통자도 나날이 늘어나는 현실을 감안하면 번역의 벽도 그리 높아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머릿속에 “중국무협소설의 한국 침공”이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원문: 김택규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