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이렇게 거창한 제목으로 큰일을 벌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일전 소개한 영원한 7일의 도시와 창람경계(苍蓝境界)가 기존의 중국식 도탑전기 게임과 다른 가챠 BM을 가졌기에 그 차이점을 한번 짚고 싶었을 뿐이죠. 하지만 그 차이점을 설명하자면 기존의 도탑 전기 모델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했고 그 차이점의 근원이 되는 일본식 가챠 게임의 모델을 설명해야 하더군요. 그러다 보니 일-중 수집형 RPG의 캐릭터 판매 BM 및 게임 디자인 전반에 대한 총론의 형식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1. 일본식 가챠 게임 모델
아무래도 이 수집형 게임의 캐릭터 판매 구조를 분석하기 위해선 먼저 가장 기본이 되는 일본식 가챠 게임 모델을 훑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플레이했던 섬란 카구라 시노비 마스터즈(이하 시노마스)를 주로 예시로 다루겠습니다만, 디테일엔 차이가 있을지언정 큰 틀에선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일본식 구조를 설명하는 데 큰 문제는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일본식 가챠 게임 모델이 제 전공은 아니기 때문에 직접 플레이하고 분석한 것 외에 일본 서비스 진행하면서 배운 것, 주변에서 주워들은 내용이 포함되었습니다.
1-1. 과금자 중심의 가챠
수집형 게임을 수집하고 즐기는 형태의 게임이라고 정의할 때, 이 장르에서 일본식 모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캐릭터의 수집이 가챠로 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스토리 진행이나 이벤트를 통해 제한적으로 캐릭터가 공급되긴 하지만 이는 일회성이고, 캐릭터를 지속적으로 공급받는 루트는 가챠 뿐입니다.
위 스크린숏에서 보시는 대로 플레이 보상으로 얻는 것은 골드나 육성에 필요한 재료일 뿐, 게임을 진행하는데 필요한 캐릭터는 드랍되지 않습니다. 플레이 보상으로 지급되는 것은 플레이 토큰으로는 사용할 수 없지만 원하는 캐릭터의 경험치를 높이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경험치 전용 캐릭터와 기타 콘텐츠에 사용할 수 있는 자원입니다. 캐릭터는 가챠를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가챠로 판매되는 캐릭터들의 희귀도에 대한 구분이 엄격하다는 것 또한 특징입니다. 아래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기본 스펙 차이도 클뿐더러, 등급이 낮은 캐릭터는 성장 한도도 낮습니다. 등급을 높이는 방법은 아예 없거나 1단계 정도로 제한됩니다. 등급은 곧 성능이고, 이 등급에 의한 우열은 절대로 바뀔 수 없습니다.
가챠 외에 플레이를 통해서도 1~2성의 낮은 성급의 캐릭터를 얻을 수 있고, 이 캐릭터들을 합성해서 희귀 캐릭터를 얻을 수 있으며 이들을 다시 진화 등으로 쌓아 올리는 한국 게임에 익숙한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등급에 따라 성능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캐릭터의 획득을 유상 콘텐츠로 한정한 구조가 상당히 가혹하고 불공정해 보일 수 있습니다.
또한 플레이를 통해 얻은 자원으로 육성한다고 해도 가챠에서 발생하는 원치 않은 결과물들을 레벨업 재료로 바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육성의 재미가 떨어진다고도 볼 수 있지요. 하지만 이런 공정성이나 육성의 재미에 대한 시비는 사실 무의미합니다. 일본식 가챠 게임 모델은 애초에 그런 ‘공정함’ 혹은 ‘육성’에서 오는 재미를 포기하는 대신 수집의 결과를 갖고 노는 재미에 초점을 맞추거든요.
1-2. 보상과 육성을 단순화
세나로 대표되는 한국식 수집형 RPG나 퍼즐 앤 드래곤(이하 퍼드)과 같이 기본적으로 무상 플레이로 획득과 육성을 동시에 진행하는 게임에서 게임에서 캐릭터를 상품으로 판매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시간단축 서비스를 판매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 시간단축 서비스는 그만큼 무상 플레이에 의한 획득 / 육성이 충분히 물리적으로 길어야만 구매자에겐 상품으로서의 매력을, 비구매자에겐 구매자가 누리는 혜택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게임은 기본적으로 수직 성장을 전제로 한 길고 깊은 성장 구조와 이에 대한 도전 욕구를 자극하고, 성취에 대한 보상을 줄 수 있는 콘텐츠 구조를 가집니다.
반면 일본식 가챠 게임에서 육성은 게임의 핵심이 되는 목표라기보다는 플레이를 담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상에 가깝습니다. 플레이를 통해 육성에 필요한 자원을 얻는 과정이 있고, 이 자원을 캐릭터에 쏟아부어 캐릭터의 레벨을 올리고 능력치를 올리는 구조는 있습니다. 고난도 스테이지로 갈수록 요구 스펙이 높아지고 보상이 좋아지는 구조도 있지요. 하지만 반드시 극복해야 할 도전으로 동작하지는 않습니다. 깰 수 없는 스테이지를 굳이 깨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이유가 없달까요.
위는 시노마스의 초급 6장 7화와 중급 6장 7화의 보상 안내입니다. 3개 난이도가 각기 7개의 스테이지로 구성된 6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초급의 최종 스테이지와 중급의 최종 스테이지인 셈인데, 보상 항목이 동일합니다. 물론 상위 난이도로 갈수록 좋은 보상을 좀 더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만 하위 난이도라서 받을 수 없는 보상은 없습니다.
(기본으로 주는 R등급 1레벨로도 클리어할 수 있는 극 초반 스테이지에선 은상자 금상자가 나오지 않습니다만 큰 의미는 없습니다. 이들 스테이지들은 말 그대로 튜토리얼 단계라 반복 플레이할 이유가 없고 금상자 은상자에서 주는 진화 재료는 SR, SSR 카드가 있어야만 쓸모 있습니다.)
보상이 늘어나는 만큼 행동력 소비도 높아지기 때문에 낮은 난이도를 돌면 약간 더 귀찮아지긴 하지만 시간 대비 효율에서 아주 크게 손해를 보지도 않습니다. 한판에 소모되는 행동력이 30분 이상의 자연회복분이기 때문에 빠르면 12시간 노가다가 18시간으로 늘어난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냥 2시간에 한 번씩 들어왔을 때 2분짜리 2판하고 마느냐 1판 더하느냐 정도의 차이에요. 깰 수 없는 스테이지를 깰 수 없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은 첫 클리어 시 보상으로 주어지는 약간의 공짜 젬 이거 하나뿐입니다.
보상 구조만큼이나 성장 구조 또한 짧고 단순합니다. 가챠로 얻은 꽝이나, 플레이를 통해 얻는 강화 전용 재료를 소모하지만 24시간 내내 돌려도 부족할 만큼 막대한 양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아예 손 놓았다면 모를까 적당히 플레이했으면 SSR 얻었을 때 바로 만렙을 찍을 수 있는 정도입니다.
이전에 좋은 카드가 있었으면 잉여 자원이 더 많을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새 카드를 얻었으니 이전보단 자원을 좀 더 빠르게 모을 수 있겠죠. 특히 시노마스의 경우는 플레이 자체로는 캐릭터에게 경험치가 주어지지 않고 카드를 먹여야만 경험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새로 얻은 쪼렙 캐릭터를 굳이 덱에 구겨 넣고 평소 돌던 것보다 쉬운 (보상이 적은) 난이도에 도전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장기 플레이에 대한 인센티브로 저빈도 고효과의 성장 콘텐츠를 두기도 합니다. 시노마스의 경우 최대 레벨을 달성하고 나면 각성 재료를 사용해 등급을 한 칸 올릴 수 있는데요, 위에서 보시는 것처럼 SSR이 UR이 되는 것만으로 주요 수치가 거의 40%가량 상승합니다. 레벨 한도도 올라가기 때문에 각성 이후 만렙을 찍으면 능력치 차이는 더 커집니다.
각성에 필요한 각성 재료는 주로 전용 스테이지에서 드랍되긴 합니다만 이게 요일별로 제한은 있어도 행동력 외에 플레이 횟수 제한은 없기 때문에 오래 플레이해서 충분히 쌓아뒀다면 바로 패스할 수 있지만 없다고 해도 물량 채우는 게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습니다.
1-3. 비상설 콘텐츠인 이벤트를 강조
플레이한다고 좋은 캐릭터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좋은 캐릭터를 얻는다고 못 얻을 보상을 얻거나 육성이 엄청나게 짧아지는 것도 아니며, 육성에 필요한 자원이 항상 부족해서 계속 파밍할 이유도 없는데 왜 좋은 캐릭터를 얻기 위해 돈을 쓰고 게임을 꾸준히 플레이하는 걸까요?
이에 대한 해답은 일본 가챠 게임에서 중시하는 이벤트 콘텐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게임 내에 기본적으로 쌓여있는 긴 성장 구조를 따라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기간 한정으로 운영되는 이벤트 콘텐츠를 완수하는 것으로 목표를 부여하고, 이에 대한 보상을 지급하는 것이죠.
위 스크린숏은 시노마스 오픈과 동시에 진행된 ‘두근! 풀에서 닌자 특훈'(이하 풀 특훈)이라는 이벤트로 일본식 게임 이벤트의 가장 전형적인 구성을 보여줍니다. 12월 25일 17시까지 진행되는 이벤트로 5개의 스페셜 스테이지가 제공되며, 보상으로 수영복 T셔츠 의상과 기지를 풀사이드로 꾸밀 수 있는 자원이 지급되지요.
이벤트를 이끄는 핵심 동력은 이벤트 보상의 고유함입니다. 기존의 상설 콘텐츠에서도 얻을 수 없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보상이 이벤트에서 지급되기 때문에 무과금 사용자건 폐과금 사용자건 이벤트에 참여합니다. 위의 풀 특훈에서 지급하는 보상은 게임 플레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는 단순 꾸미기 아이템입니다만 게임에 따라서, 또는 이벤트의 강도에 따라서 SSR급 캐릭터나 장비와 같이 게임상 도움이 되는 보상을 걸기도 합니다. 단순 기념품이든 게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중요 게임 토큰이든 간에 특정 이벤트에서만 제공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난이도 차이에 대한 보상의 변별력이 낮은 것은 이 이벤트 보상에도 적용됩니다. 메인 콘텐츠에서 스펙이 부족해 깰 수 없어서 받을 수 없는 보상이 없었던 것처럼, 이벤트의 보상 또한 난이도-스펙을 통해 획득을 제한하는 방식으로는 설정되지 않습니다.
이벤트의 고유 보상을 획득할 기회는 모두에게 열려있는 대신, 이 보상을 획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의 차이로 스펙(바꿔 말하자면 플레이어가 지불한 돈과 시간)에 대한 변별력을 만듭니다. 위의 풀 특훈의 경우, 1스테이지를 깨든 5스테이지를 깨든 획득할 수 있는 보상의 종류는 동일하지만 5스테이지를 깨는 쪽이 보상량이 좀 더 많아서 더 적게 플레이하고도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이벤트에서의 변별력은 이벤트 스테이지 클리어를 통해 획득하는 포인트의 누적량으로 이벤트 한정 카드를 포함한 보상을 받아가는 우타 마크로스의 이벤트가 조금 더 잘 나타내줍니다. 우타 마크로스의 이벤트는 누적 포인트 보상과 랭킹 포인트 보상으로 2개의 보상 테이블이 있습니다.
누적 포인트 보상의 경우 누구라도 자연 회복분을 잘 사용하면 충분히 이벤트 한정 카드를 받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지만 이 이벤트 한정 카드를 7성으로 풀초월하기 위한 마지막 조각은 랭킹 보상에 배치함으로써 캐주얼한 성향의 저과금 사용자와 고과금의 하드코어한 사용자들 양쪽 모두에 목표를 부여합니다.
1-4. 이벤트를 중심으로 한 콘텐츠 소모
이벤트 자체는 낯설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도 크리스마스, 명절, 서비스 X개월/X년 등 특정 시즌에 종종 진행하곤 하니까요. 하지만 일본 가챠 게임은 이 이벤트들을 1년 365일 항상 돌린다는 것이 차이입니다. 아래 스크린숏을 보면 ‘두근! 풀에서 닌자 특훈’과 ‘노멘의 전투 머신’ 2개의 이벤트가 돌지요.
이벤트 한정 보상뿐 아니라 기본 보상도 상설 콘텐츠보다 푸짐하기 때문에, 상설 스테이지의 초회 클리어 보상 무료 젬을 회수하고 나면 플레이어들은 이벤트 콘텐츠 플레이에 집중합니다. 열려있는 이벤트를 순서대로 클리어하면 예전 이벤트가 종료되고 새 이벤트가 추가되죠.
수직 성장 중심의 게임에서 콘텐츠는 플레이어의 성장 단계에 맞춰 배치되고, 플레이어의 성장 정도에 종속되어 소비됩니다. 아직 깰 수 없는 구간의 콘텐츠는 플레이할 수 없는 거죠. 그리고 성장이 둔화하는 구간에 진입하면 콘텐츠 소비도 둔화하고, 허들을 넘기 전까진 같은 콘텐츠를 반복할 수밖에 없죠. 배치된 콘텐츠의 절대량과는 관계없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습니다.
새 콘텐츠를 배치한다고 해도 많은 양의 돈과 시간을 투입해 기존의 콘텐츠를 소진한 최상위 구간의 사용자들에게 우선적으로 할당되어 하위 유저에겐 전달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하위 구간에 신규 콘텐츠를 배치하면 해당 콘텐츠는 순식간에 소비되어버리고, 특히 최상위 사용자들이 겪는 콘텐츠 고갈이 해결되지 못합니다.
단기 이벤트 중심의 콘텐츠 운영은 이 문제를 회피할 수 있는 묘책이 됩니다. 최상위 사용자를 위한 상설 콘텐츠를 업데이트하기보다는 모든 성장 단계를 커버하는 비상설 콘텐츠를 자주 공급함으로써 전체 사용자가 지속적으로 새 콘텐츠를 접합니다. 그리고 끝없이 성장하는 장기 목표 대신 일주일 정도의 짧은 단기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스트레스 없이 가볍게 플레이할 수 있게 하되, 이 콘텐츠를 빠른 주기로 계속 공급함으로써 꾸준히 질리지 않고 새 콘텐츠를 즐길 수 있게 해줍니다. 말하자면 게임의 상설 콘텐츠는 성장 단계를 확인하는 시험대 정도의 역할이고, 짧은 주기로 끊임없이 제공되는 이벤트가 게임의 핵심 콘텐츠가 되는 것이죠.
긴 성장 구간의 끝에 추가되는 콘텐츠들은 그동안의 성장에 대한 보상이라는 성격 또한 가졌기 때문에 콘텐츠의 고유성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3달 만에 최상위 던전이 추가되었는데 알맹이가 기존 던전의 짜집기라면 굉장히 실망스럽겠죠. 하지만 비상설 이벤트 콘텐츠에선 이런 기대가 다소 낮습니다. 물론 모든 구성요소가 새롭다면 만족감이 크겠지만, 적당히 레벨이나 몹 등을 재활용해도 새 콘텐츠로서의 고유성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약간은 억지스러운 고유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독립 콘텐츠로서의 최소한의 포장이 필요합니다. 내부가 완전히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기존의 모험 모드가 아닌, 이벤트 화면에 배치함으로써 독립된 콘텐츠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리듬 액션 게임인 우타 마크로스의 경우 이벤트 전용곡을 따로 만드는 대신 기존에 있던 곡을 플레이하는 것으로 이벤트를 구성하는데도 기존 곡의 스테이지에 이벤트를 거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이벤트 화면을 만들고 그 아래에 스테이지들을 배치합니다.
독자적인 이야기 또한 이벤트 콘텐츠에 고유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짧지만 새로운 이야기가 추가되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신규 이벤트를 새로운 보상 가판대가 아닌 신규 콘텐츠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우타 마크로스의 경우 위와 같은 대화씬이 따로 존재하지 않은 대신 ‘초시공 SNS’라고 해서 캐릭터들의 단톡방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콘텐츠가 있는데 이벤트 진행에 따라 이 단톡방을 업데이트 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1-5. 수집에 의한 수평 성장의 재미를 강조
성장 구조가 깊고 성장에 다량의 자원과 시간을 소비하는 게임은 게임 내 다양한 캐릭터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실제 유저는 투자할만한 가치를 지닌 소수의 캐릭터에게만 자원을 투자합니다. 또 게임 내에 새 캐릭터가 추가되어도 이 신캐가 기존 메타를 뒤흔들 만큼 충분한 성능 향상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면 기존 캐릭터에 투자했던 자원을 매몰 비용으로 간주하고 새 캐릭터를 획득·육성할 당위를 느끼지 못하지요.
신캐의 추가로 라인업이 조금씩 바뀌긴 하지만 항상 ‘얻어야 할’ 캐릭터는 정해져 있고, 그 외 캐릭터는 모두 사실상 무가치합니다. 이 구조에서 신캐의 획득은 놀 거리를 ‘수집’한다기보다는 사실 더 성장할 수 있는 여지를 확률로 획득하는 RPG 게임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금 과격하게 이야기하자면 껍데기는 캐릭터지만 본질적으로는 리니지에서 부위별 최강 아이템을 얻고 강화 띄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죠. 시간이 흐르고 신캐가 추가되고 정답 덱의 구성이 바뀌면서 기존의 최강템들이 하나씩 가치를 잃고 기존의 정답 덱이 있던 사람도 신캐를 얻어야 할 필요는 있겠지만요.
문제는 게임의 성장 구간이 길수록 신캐의 효용이 떨어진다는 겁니다. 신캐를 힘들게 얻어봤자 이미 기존 캐릭터들을 많이 키워놓은 상태라면, 신캐를 그만큼 키워야만 게임에서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생깁니다. 이미 6성 풀 초월 각성 캐릭터로 구성된 캐릭터들을 사용한다면 새 캐릭터도 6성 풀 초월 각성까지 키워야만 게임에서 활용할 수 있는 거죠.
말하자면 힘들게 돈 들여 뽑은 게 매미 상태의 셀이라 계속해서 사람을 흡수하고 희귀 자원인 17호, 18호까지 다 먹여야만 이미 있는 초사이어인 손오공보다 더 쓸만해 지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까지 키우고 나면 신캐 마인 부우가 나오겠죠. 마인부우도 한참 키워야 하긴 합니다만.
일본식 가챠 모델은 성장의 깊이를 낮추면서 소수의 ‘정답캐’가 아닌, 다양한 캐릭터를 모으도록 유도합니다. 가진 캐릭터의 다양성에서 오는 ‘횡적 성장’을 추구하죠. 그래서 일본 가챠 게임에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속성별로 서로 물고 물리는 속성 메타입니다.
불-물-나무-불 가위바위보에 빛↔어둠의 상극의 5속성이나 가위바위보를 4단계로 늘린 6속성이 아주 일반적입니다. 수직 성장을 강조하는 게임들은 속성 없이 탱-딜-힐 역할 분배를 기반으로 하는 직업 메타를 강조하곤 하는데요, 이런 직업 메타와 속성 메타는 게임 내에서 동작하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직업 메타는 기본적으로 각 직업별로 좋은 카드를 얻어 좋은 ‘조합’을 갖추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대부분의 게임이 다양한 능력을 지닌 개성적인 캐릭터의 조합에 의한 다양한 전략을 추구한다고 합니다만 계속해서 자원을 소모해나가는 수직 성장 구조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획득하고 육성하고 운용하면서 테스트하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선구자들이 캐릭터들을 점증한 이후 소수의 캐릭터를 엄선해 ‘이 직업군 중 최강’, ‘얻어야 할 머스트 해브, 잇 캐릭터’의 지위를 부여합니다.
최강 조합이 이미 정해진 상황에서 직업 메타는 신상 판매를 위한 파워 인플레이션에서 따라오는 상품의 가치 소멸을 늦추는 역할을 합니다. 한 달에 한번 신캐를 낸다고 할 때 이번 달의 신캐가 저번 달의 신캐를 대체할 수 있는 상위 호환이라면 비싼 돈을 들여 얻은 지난달의 신캐는 1달 만에 쓰레기가 되지만, 직업군을 달리하면서 신캐들을 추가하면 같은 직업의 신캐가 나올 때까지 직업군별 최강자로서의 효용이 유지되는 거지요.
속성 메타는 보너스를 받을 수 있는 캐릭터를 ‘많이’ 모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나무 속성 스테이지에선 나무에 강한 불 속성 캐릭터로 덱을 채우는 것이 유리합니다. 덱 전체를 불 속성 SSR 최강캐로 꾸리면 좋겠지만, 그건 너무 어려울뿐더러 굳이 그렇게 할 이유도 없습니다. 불 속성 SSR이 부족하다면 보너스는 없지만 페널티는 없는 나무 속성 SSR로 채워도 되고, 나무 속성 SSR도 없다면 불 속성 SR로 채워도 됩니다.
수집 상황에 따라 목표가 SSR로 덱 꾸리기 → 속성별로 SSR 덱 채우기 → 속성별로 SSR 최강 덱 꾸리기 순으로 상향됩니다. 목표로 하지 않았지만 내 손에 떨어진 캐릭터들이 점진적으로 플레이어에게 이득을 제공하면서 가치를 부여받습니다. 다양한 캐릭터의 획득이 풀어야 할 숙제 혹은 누적되는 실패라기보다는 점점 더 나아지는 성장감으로 연결되는 것이죠. 물론 최상위 유저라면 속성별 최강 SSR을 만들고 싶겠지만, 게임 구조 자체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는 기조입니다.
직업 메타 역시 콘텐츠에 따른 다양성을 추구할 수도 있습니다. 잡몹이 많이 나오는 모험모드에선 다수 캐릭터에 적당한 딜을 뿌리는 딜러가 필요하고 왕보스 하나 잡는 레이드에선 한 명의 적에게 폭딜을 넣는 딜러가 필요하다는 식이죠. 하지만 직업 간 균형이 우선이기 때문에 폭딜러 많다고 레이드를 잘 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험용 딜러 A, 레이드용 딜러 B 이런 식으로 정해진 정답캐의 양이 늘어날 뿐이지 캐릭터가 많아진다고 더 많은 선택지를 가지고 더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거죠.
콘텐츠에서 ‘다양성’을 활용하기에도 직업 메타보다는 속성 메타가 더 유리한 점이 많습니다. 속성 메타는 그냥 스테이지 정보 화면에 ‘이 스테이지는 불 속성임’이라고 써놓는 것으로 물 속성이 유리하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려줄 수 있습니다. 상관관계를 미리 알아야 하지만 키라라 판타지아처럼 속성 정보가 표시될 때 이 상관도를 항상 옆에 배치하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레이드는 큰 몹 하나 잡는 거니 단일 타깃 폭딜러가 유리한데 내가 가진 폭딜러 중 가장 쎈 애는 얘니까 얘를 쓰자’는 것보다는 훨씬 쉽죠. 시노마스 같은 경우는 아예 스테이지별로 ‘양 속성에 보너스’ ‘음 속성에 보너스’ 이런 식으로 페널티 없이 스테이지 별로 보너스 받는 속성 하나만 설정하는 식으로 캐주얼하게 풀기도 합니다.
또 속성 메타는 스테이지 별로 필요한 속성을 바꾸는 것으로 손쉽게 모든 속성을 골고루 활용할 수 있지만 직업 메타는 강조하고자 하는 조합의 개수 만큼의 성격이 다른 콘텐츠를 배치해야 한다는 것도 제작하는 입장에서 불리합니다. 뭐 굳이 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한 콘텐츠 안에서 폭딜러가 중요한 스테이지, CC형 탱커가 필요한 스테이지 등등 다양한 특성의 스테이지를 추가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만드는 것도 일이고 그걸 전달하는 것도 일입니다.
이렇게 쓰면 마치 일본에선 속성메타만 중요하고 직업 메타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직업 메타도 쓰입니다. 위의 키라라 판타지아처럼 속성 메타와 직업 메타를 함께 쓰는 경우도 있고, 직업 메타가 명시적으로 표기되어 있지 않더라도 캐릭터 특성을 살리기 위해 방어력이 높은 캐릭터, 힐러 능력을 갖춘 캐릭터 등을 설치합니다. 다만 속성 메타는 거의 필수로 깔고 들어가고 직업 메타는 그만큼 강조되지는 않는다는 정도입니다.
1-6. 비즈니스 측면에서의 장점
이런 수평 성장 중심의 구조는 수직 성장 중심의 게임에 비해 게임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데 있어 꽤 뚜렷한 장점이 있습니다. 일단 캐릭터를 많이 수집하게 하면서도 이 수집을 가챠로 한정하기 때문에 가챠라는 상품에 대한 확실한 구매 동기를 부여합니다.
특히 게임을 계속 운영해도 가챠라는 상품의 가치가 계속 보존된다는 점이 굉장히 큰 장점입니다. 수직 성장 게임에서 플레이를 통해 캐릭터를 수집할 수 있게 할 경우, 게임을 진행하고 성장함에 따라 보상이 더 나아져서 점점 더 플레이를 통해 캐릭터를 획득하기 쉬워지고 행동력의 효용이 점점 증가합니다.
지속적으로 운영하면서 신규 상품을 팔기 위해선 신규 캐릭터는 플레이에선 얻을 수 없고 가챠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식으로 기존의 방침을 깨거나, 얻는 건 마음대로지만 키우는 데 드는 자원이 턱없이 부족해서 자원을 추가로 구매하는 식의 BM이 뒤따라옵니다. 하지만 수집은 가챠에서만 된다고 미리 선을 그어두면 꾸준히 신상품을 가챠에 추가함으로써 가챠의 상품성을 유지할 수가 있지요. 물론 사용자가 이를 받아들여야만 성립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돈을 내고 가챠를 구입하는 입장에선 무과금으로도 획득할 수 있지만 깊게 성장시켜야 하는 구조보다는 가챠로만 구입할 수 있는 대신 육성이 짧은 구조의 만족도가 더 높을 수도 있습니다. 신규 캐릭터를 뽑기만 하면 키우느라 고생할 필요 없이 거의 바로 전력으로 활용할 수 있고 이를 통한 플레이 경험 변화를 바로 체감할 수 있으니까요. 키워야 하는 매미 셀보다는 완전체 셀이 획득 시 만족감이 더 크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이 구조가 갖는 가장 핵심적인 장점은 신규 유저가 정착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성장→더 상위 콘텐츠→더 나은 보상→성장의 사이클을 기반으로 하는 수직 성장 기반의 게임에선 같은 양의 자원을 쓴다고 해도 기존 사용자가 신규/복귀 사용자보다 더 나은 보상을 누리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신규/복귀 사용자는 막대한 돈을 쓰지 않는 한 기존 사용자를 따라잡기 힘들거나, 따라잡을 수 없는 경우도 생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게임 서비스가 길어질수록 신상품의 상품성은 계속 떨어지고 신규 콘텐츠를 투입해도 최상위 일부만 즐길 수 있어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매너리즘에 빠지고, 그 결과 유저가 빠져나가긴 쉬워도 신규/복귀 유저가 정착되지 않아 사용자를 꾸준히 잃어나갑니다.
반면 일본식 가챠 게임은 장기 운영에 굉장히 유리한 구조입니다. 인게임 보상이 캐릭터 수집으로 이어지지 않는, 수집 중심의 수평 성장 구조하에서 기존 유저의 기득권이 큰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또 게임이 길고 긴 장기 성장이 아닌, 1주일 단위 이벤트를 중심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캐릭터가 구리고 시간을 많이 투자하지 못해 이벤트 하나를 놓친다고 하더라도 그 피해는 해당 이벤트를 놓친 것에 국한됩니다. 이후의 이벤트는 모두 함께 다시 시작하는 거니까요.
또 오래 플레이해서 좋은 캐릭터가 많이 있는 사람이 이벤트를 조금 더 쉽게 깰 수 있지만, 새로 유입되거나 복귀한 사용자도 가챠를 뽑는 것으로 이 갭을 비교적 쉽게 줄일 수 있습니다. 신규 / 복귀 유저가 정착하기 쉽지요. 그리고 성장 구간이 짧고 플레이를 통해 캐릭터를 획득할 수 없기 때문에 서비스 기간이 아무리 길어지더라도 가챠를 통한 캐릭터 판매가 지닌 상품성이 유지됩니다. 이런 차이점은 특히 타 IP와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할 때 굉장히 크게 나타납니다.
수직형 게임에서 컬래버레이션은 사실상 기존 유저에 대한 추가 상품 판촉 정도로 국한됩니다. IP를 좋아하지만 해당 게임을 아직 해보지 못한 사용자가 들어와서 유저 풀이 늘어나길 기대하지만 게임 구조상 그런 뉴비가 정착하기 힘드니까요. 하지만 수평형 게임에선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유입된 유저가 잔류할 확률이 더 높고, 그 결과 컬래버레이션이 신규 유저를 모집하고 유저 풀을 늘리는 기회가 될 수 있지요. 괜히 일본 게임이 컬래버레이션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1-7. 게임과 가챠를 떠받치는 것은 캐릭터의 매력
결국 일본 가챠 게임은 장기적으로 가챠를 팔겠다는 목적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챠 확률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요? 위한 시노마스의 확률 표인데요, 통상 SSR 1.5%에 픽업 SSR 1.5%로 합계 확률이 3%밖에 안 되는데 이는 요즘 기준으로는 조금 박한 편이고 5% 정도가 보통이라고 봅니다.
여하튼 시노마스에선 핍업 SSR만 해도 6종이라 1.5% 확률을 각기 육등분해 개당 당첨 확률 0.25%, 획득을 위한 기대 시행이 400번입니다. 일반 SSR은 20종이라 개당 0.075%, 기대 시행 1333번. 무시무시하죠. 가챠에서 좋은 캐릭터 안 떠도 게임 할만하다고는 하지만, 결국 일본 가챠 게임을 떠받치는 것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가챠를 뽑는 무과금러 소과금러가 아니라 ‘나올 때까지’ 혹은 ‘언젠간 나온다’는 마음으로 뽑는 고과금러 핵과금러라는 점은 동일합니다.
물론 리니지M은 전설 무기 0.0031%로 위의 사례보다 낮은 확률로 장사를 잘하고는 있습니다만, 가챠를 구매하는 원동력이 다르죠. 리니지M은 저 확률을 뚫고 전설을 얻기만 하면 엄청난 어드밴티지를 얻습니다. 리니지M은 조금 극단적이지만 다른 게임들 역시 희귀한 캐릭터나 보상을 얻으면 그걸로 못 깨던 곳을 깨고 PVP 경쟁에서 앞서나가거나 뒤처지지 않는 등 강력한 외적 동기를 제공합니다.
반면 일본 가챠 게임에서 SSR의 게임적 효용은 크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만족이죠. ‘사실 쓸모없는 것도 알고, 얻기 힘들며, 얻는 데 많은 돈이 드는 것도 알지만 나는 갖고 싶다. 이유는 없다. 갖고 싶으니까 갖고 싶다’는 강한 내적 충동이 필요합니다.
사실 이런 멘탈리티에 의한 상품 판매는 아이돌 굳즈 장사와 유사합니다. 예전에 동생이 연예기획사에서 일을 했는데 정확한 숫자는 잘 기억이 안 납니다만, 한 자루 100원에 떼온 볼펜에 아이돌 스티커 붙이면 1-2만 원 붙여도 없어서 못 판다더군요. 음반에 포토카드 랜덤으로 끼워 넣어서 최애 카드 뽑으려면 평균 10여 장, 전 멤버 수집하려면 몇십 장 사야 하는 것도 그렇고요.
한마디로 일본 가챠 게임의 캐릭터들은 능력치가 붙어 있는 게임 토큰이라기보다는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최애와 같은 위치를 가지고, 가져야만 합니다(그러고 보니 대표적인 일본 가챠 게임이 아이돌 마스터군요…). 그래야만 게임적으로 큰 의미가 없고 외적으로 큰 보너스가 없다고 하더라도 저런 가격으로 팔 수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게임 구조상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자기만족 상품이기 때문에 캐릭터를 가챠에서만 구입할 수 있어도 공정성에 큰 문제가 없는 것이죠.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이니까요.
결국 일본 가챠 게임을 만들고 운영한다는 것은 한 달에 수십만 원씩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 최애를 만들고 추가해나가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능력치 빠방한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외모, 성격 등에서 사람의 취향을 저격해야 하는 거지요. 때로는 성능이 나쁘지만 애정으로 인기 있는 캐릭터도 성립할 정도로 말이죠.
메인 콘텐츠와 이벤트 콘텐츠에서 스토리가 계속 강조되는 것 또한 ‘게임의 서사’를 전달한다기보다는 ‘캐릭터의 서사’를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5,000년 만에 부활한 마왕이 천년 불침의 제국 수도를 함락하든 말든 사실 아무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항상 침착 냉정함을 유지하던 날카로운 인상의 여 교관 캐릭터가 수도 수복을 외치는 이유가 사실은 피난 나올 때 두고 온 비장의 하드BL 콜렉션을 남들 몰래 회수하기 위함이라는 데서 갭모에가 터지고 캐릭터가 팔리는 거지요.
데레스테, 시노마스, 키라라 판타지아, 소드 아트 온라인 등 IP를 기반으로 한 게임이 많이 나오는 것 또한 이 캐릭터의 중요성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임이 많이 출시되면서 처음 보는 생소한 캐릭터를 소개하고 그 매력을 전달하고 사용자를 포획하기보다는 이미 검증된 캐릭터를 활용하는 편이 훨씬 수월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1-8. 가챠로 최애를 뽑고 즐기는 놀이로서의 수집 게임
이제까지 수평 성장 중심의 일본식 가챠 게임의 구성을 살펴보았는데요, 수직 성장 중심의 게임과 비교하고 그 차이점에 가져다주는 효과를 나열하고 있으니 마치 일본식 가챠 게임이 한국 게임보다 우월하다는 이야기로 비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그게 아니라, 겉보기에 같은 ‘수집형 게임’이라고 해도 한국식 게임과 일본식 게임은 서로 추구하는 재미가 다르고 실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장르라는 겁니다.
일본 가챠 게임이 추구하는 방향은 ‘가챠로 수집해서 즐기는 놀이’에 가깝습니다. 첫 번째 파트인 수집의 재미는 나오나 안 나오나 두근두근하면서 가챠를 까는 과정 자체에서 발생합니다. 원하는 물건이 안 나와도 그 순간의 두근거림이 돈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어요.
10만 원 들고 10시간 파친코를 쳤는데 결국 손에 8만 원이 남았다고 칩시다. 이 상황을 2만 원으로 10시간 재미있게 놀았다고 생각할 때 일본식 가챠 게임은 놀이로써 성립합니다. 2만 원 잃고 왔다 혹은 20만 원 만들어올 생각이었는데 2만 원 잃었으니 무려 12만 원 손해 봤다는 마인드에선 이건 고객 등 털어먹는 날강도 유사게임이에요. 심지어 이 뽑는 기회를 과금으로만 제한한다? 낮은 등급의 캐릭터는 절대로 높은 등급이 될 수 없다? 이건 뭐 돈 없으면 게임도 하지 말라는 슈퍼 불공평 노양심 쓰레기 앱이죠.
플레이에 대한 보상, 성장 인센티브가 적은 것 또한 가차에서 뽑은 물건을 가지고 노는 ‘놀이’이기 때문입니다. 낮은 확률을 뚫고 좋은 캐릭터 뽑았으니 그걸로 한동안 신나게 노는 놀이터에요. 어찌 보면 게임 콘텐츠 자체가 플레이의 대상이 아니라 보상인 것이죠. 재미있게 놀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는 기준은 가챠에서 잭폿이 터졌는지 여부이지 게임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했는지가 아닌 겁니다. 오랜 시간 플레이한 것에 보상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 일본식 가챠 게임은 플레이하기 힘듭니다.
결국 한국식의 성장형 수집 게임과 일본의 가챠형 수집 게임의 차이는 둘 중 누가 더 우수하고 열등한 관계라기보다는, 사용자가 가진 게임을 바라는 관점과 추구하는 재미의 차이라는 겁니다. 일본의 가챠 수집 놀이가 한국의 관점에선 플레이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돈만 밝히는 유사게임일 수 있고, 한국형 수집 게임의 한발 한발 키워나가는 재미가 일본에선 돈 내든 안 내든 똑같이 고생하는 공산주의 지옥일 수도 있지요.
핵심상품인 캐릭터에 요구되는 덕목 또한 게임 토큰으로써의 유용함 / 감정을 이입하는 최애로 다르고요. 다만 이 양자의 차이와 그 원리를 이해하면 게임을 다른 국가에 서비스할 때 사용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측하고, 로컬라이징 하기에 도움이 되겠지요.
2. 도탑전기류
일본 가챠 게임은 육성보다 수집에 방점을 찍었다고 했는데요, 대륙에서 발전한 도탑전기류 게임은 반대로 육성을 크게 강조합니다. 한국 역시 수집형 게임이라고 하지만 수직적인 육성을 강조한다고 했는데, 그래도 시스템상 6성+풀초월+각성+올 스킬 만렙과 같이 육성의 최종 단계라는 것이 존재는 합니다. 도달하기가 더럽게 어렵고, 업데이트를 통해 뒤를 늘려나갈 뿐이죠. 하지만 도탑전기류는 말 그대로 성장이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2-1. 수집이 아닌, 육성 게임
도탑전기류 게임은 굉장히 많은 성장축이 있습니다만 그중 가장 기본이 되는 축은 ‘등급’과 ‘성급’입니다. 흰색-녹색-파란색-보라색 등 색상으로 주로 표현되는 ‘등급’은 일반 스테이지에서 드랍되는 아이템들을 통해 성장합니다. 각 캐릭터마다 각 단계별로 필요한 아이템과, 해당 아이템이 드랍되는 스테이지가 달라지지요.
별의 개수로 표현되는 ‘성급’은 각 캐릭터의 조각이 일정 개수 이상 쌓이면 올라갑니다(아직 보유하지 못한 캐릭터는 조각을 일정 개수 모아서 획득할 수 있습니다). 캐릭터의 조각은 각 캐릭터의 조각이 나오는 영웅 스테이지에서 드랍되기도 하고, 가챠에서 이미 있는 캐릭터가 중복 당첨되었을 때 얻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플레이를 통해 캐릭터의 조각을 얻을 땐 어떤 캐릭터의 조각을 얻을지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다는 부분입니다. 손오공 스테이지에선 손오공의 조각이 드랍되고 크리링 스테이지에선 크리링의 조각이 드랍되기 때문에, 손오공 조각이 필요하면 손오공 스테이지를, 크리링 조각이 필요하면 크리링 스테이지에 들어가면 됩니다.
확률에 따라 조각이 드랍되지 않을 수는 있고(보통 하루 3번 플레이할 수 있는데 3번 다 돌면 1조각 이상은 나옵니다), 내가 원하는 캐릭터의 조각이 나오는 스테이지에 아직 진입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어떤 캐릭터를 얻고 키울 것인지는 전적으로 플레이어의 결정에 따릅니다.
등급 성장 역시 가능한 최고 난이도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캐릭터의 등급을 올릴 수 있는 재료를 주는 스테이지를 도는 형식이죠. 그래서 이 게임의 본질은 한정된 행동력을 사용해서 사용자가 원하는 캐릭터를 육성하는 것에 있습니다. 캐릭터의 획득 자체는 쉽습니다.
2-2. 합리적 상품으로써의 가챠
주어진 행동력을 소모해 원하는 캐릭터를 육성하는 것이 도탑전기의 핵심이라고 할 때, BM의 핵심은 바로 이 행동력의 수급에 달려 있고 여기서 도탑전기류 게임을 다른 수집형 RPG와 구분 짓는 가장 큰 요소인 누진제가 등장합니다.
앞서 한국식 수집형 게임은 플레이로 캐릭터 수급이 가능하고 성장이 보상을 강화하기 때문에 성장에 의해 행동력이 가챠보다 더 큰 효용을 지닐 수 있는 반면 일본 가챠 게임은 가챠에서만 캐릭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가챠의 효용이 일정하게 유지된다고 설명드린 바 있습니다. 도탑전기류 게임은 플레이에 의한 캐릭터 수집과 육성을 기본으로 하지만 이 행동력의 수급을 강하게 제약합니다.
돈을 내고 행동력을 구매할 수는 있지만 살수록 가격이 올라가고, 심지어 일정 이상은 구입할 수 없습니다. 적은 돈으로 보상을 2배 3배로 늘릴 수 있기 때문에 소과금자 입장에선 행동력의 효용이 크지만 게임에 재미를 붙이고 돈을 쓰기 시작하면 행동력의 가격이 높아져 종국에는 차라리 가챠를 사는 편이 더 경제적인 선택이 되는 것이죠.
이런 비교 우위를 확립하기 위해선 행동력을 빨리 소모시켜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행동력이 쓰지 못해 남아돈다면 굳이 행동력을 추가로 구매할 필요가 없고, 가챠가 비교 우위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도탑전기 이후의 도탑전기류 게임들은 소탕권의 형식으로 편하게 행동력을 소모하는 횟수를 제한하는 대신, 소탕을 기본 기능으로 탑재했습니다. 행동력 소진을 어렵게 만들어 소탕권을 팔아 푼돈을 벌기보다는 행동력을 우선적으로 소진시키는 것이 훨씬 더 매출 견인에 유리하다는 것이죠.
가끔 아무리 행동력 누진제 때문에 가챠의 가성비가 보전된다고 하더라도, 조각을 모으는 것이 캐릭터를 얻는 것보다 만족감이 더 떨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일단 가챠에서 얻는 캐릭터를 조각으로 얻는 경우는 이미 해당 캐릭터가 있을 때뿐입니다. 없던 캐릭터를 가챠에서 얻을 땐 항상 바로 사용 가능한 완제의 형식으로 얻습니다. 캐릭이 나왔는데 조각이라 바로 쓸 수 없다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복 캐릭터라 조각을 얻는 것이 과연 매력적이냐는 질문이 따라옵니다. 만일 일본식 가챠 게임처럼 플레이를 통해 조각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조각은 물론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성급 성장이라는 게 결국은 같은 캐릭터를 계속 겹쳐 쌓아 올리는 한계 돌파인데 중복 당첨 몇 번이 모여야 겨우 1한돌이 되고, 한돌에 필요한 중복 당첨이 계속 늘어나는 가혹한 구조니까요. 하지만 영웅 스테이지의 존재가 이 중복에 의한 조각 모음을 굉장히 매력적인 상품으로 변모시킵니다.
중복 당첨으로 얻는 조각의 숫자를 같은 수의 조각을 얻는데 필요한 물리적인 시간과 비교해보면 계산이 바뀌는 것이죠. 위 드래곤볼의 예를 들자면 (KOF98UM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중복 당첨 시 받는 조각의 수는 21개이고, 한 영웅 스테이지를 플레이할 수 있는 횟수는 하루 3번입니다. 크리링의 조각을 하루 최대 3개까지 얻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3번 플레이에서 조각이 1개 정도 떨어지기 때문에 조각 21개면 최소 7일 통상 21일이라는 시간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굉장한 메리트가 있지요.
2-3. 안전한 상품으로써의 가챠
도탑전기는 가챠를 가장 합리적인 상품으로 포장하는 구조를 가졌습니다만, 그래도 가챠가 여전히 결과물을 특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상품이라고 보긴 어려울 수 있습니다. 도탑전기류 게임들은 이 문제를 무엇이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가챠에서 무엇이 나오든 손해는 보지 않음을 보장함으로써 회피합니다.
간단한 예가 바로 모든 캐릭터를 동급으로 취급한다는 부분입니다. 손오공은 최고 등급인 SSR이고 야무치는 그보다 한창 떨어지는 R급이라는 식으로 캐릭터별 성능과 희귀도, 성장 한계를 완전히 갈라놓는 일본식 게임과 달리 도탑구조는 모든 캐릭터가 같은 성급에선 동급이고, 모두 함께 공평하게 무한정의 성급을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위 스크린숏만 보더라도 야무치를 근성으로 키운 야무치가 동급의 손오공에 뒤처지지 않지요.
원치 않는 캐릭터를 뽑을 수는 있어도, 뽑아봤자 아무 쓸모 없는 쓰레기 캐를 뽑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다못해 재채기하면 인격이 변하는 런치까지도 손오공과 같은 가치를 지녔어요. 원하는 손오공이 나오면 손오공 키워서 좋은 것이고, 원치 않는 크리링 나와서 크리링이 더 강해지면 크리링 쓰면서 손오공 모으면 됩니다.
물론 아무리 시스템상 밸런스 상 동급이라고 해도 분명히 선호하는 캐릭터와 비선호하는 캐릭터는 갈리고 비선호하는 캐릭터가 걸리면 실망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게임 진행을 진행하는 덱의 크기는 정해져 있기 때문에 주력 덱을 제외한 나머지 캐릭터는 잉여가 되는 것도 사실이죠. 도탑전기 이후의 도탑전기류 게임은 여러 캐릭터를 보유하는 것에 보너스를 부여하고 많은 캐릭터를 활용하는 콘텐츠를 통해 이 문제를 보완합니다.
예를 들어 KOF98UM의 ‘숙명’은 특정 조건의 캐릭터 조합을 보유했을 때 추가적인 보너스를 부여합니다. 주캐가 친 겐사이라면 당연히 겐사이의 조각 획득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당장 사용하지 않을 켄수, 아테나, 야마자키의 획득도 켄사이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죠. 드래곤볼 용주격투의 경우는 연관 캐릭터의 획득뿐 아니라 획득 이후의 성장에 대해서도 추가 보너스를 부여합니다.
위 스크린숏을 보시면 피콜로는 이미 17호와 피콜로 대마왕이 있어서 보너스를 받지만 17호와 피콜로 대마왕의 등급을 올리면 이 보너스가 더 커지는 구조입니다. 또한, 일본 가챠 게임의 속성처럼 아주 강력하고 노골적이진 않더라도 특정 캐릭터가 있으면 더 유리한 콘텐츠나 패배한 캐릭터는 계속 버려가면서 덱 전체를 활용하는 콘텐츠 등으로 주력/선호 캐릭터가 아니라도 많이 가지고 많이 키우는 것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2-4. 깊고 자잘한 수직 성장 체계
게임의 플레이로 수집과 성장을 병행한다는 점에선 한국의 수집형 게임과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도탑전기류는 훨씬 더 많은 콘텐츠를 통해 끝없이 성장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성급 성장만 하더라도 동일 캐릭터 n장 획득으로 완결되는 한국의 초월이나 일본의 한계돌파와 달리 7성 도달까지 가챠로는 수십번의 중복 당첨에 해당하는 수백 개의 조각을 요구할뿐더러 7성에 도달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조각을 사용하는 성장 콘텐츠가 이어집니다.
등급 성장과 성급 성장은 대표적인 성장 콘텐츠긴 하지만, 사실 도탑전기류 게임들은 그 외에도 다양한 성장 콘텐츠를 구비합니다. 여기에는 플레이 시간 확보와 성장 체험 리듬 보완이라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등급 성장과 성급 성장 모두 스테이지에서의 파밍을 대상으로 하는데 소탕을 기본으로 제공하기 때문에 실제 플레이 타임이 굉장히 짧습니다. 몇 시간씩 사용자들을 붙잡고 괴롭힐 필요는 없지만 계속해서 사용자들을 붙잡아두기 위해선 꾸준히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의 플레이타임은 필요하고, 이를 소탕이 불가능한 추가 콘텐츠로 해결합니다. 그리고 이 스테이지가 아닌 이 추가 콘텐츠에서 드랍되는 자원을 사용한 성장 콘텐츠를 둬서 플레이할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죠.
두 번째 이슈는 성장의 발생 빈도에 관한 것입니다. 도탑전기류 게임은 기본적으로 육성의 깊이가 무제한으로 깊기도 하지만, 그 단계도 굉장히 잘게 쪼개져 있습니다. 조금 하다 보면 성장! 조금 더 하다 보면 또 성장!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성장한다는 피드백을 주지요.
그런데 하나의 축에서 성장 피드백이 나타나는 주기는 계속 길어져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복수의 성장 콘텐츠를 A->B->C 이렇게 직렬로 배치하지 않고 동시에 진행하도록 병렬로 연결해두면 한 콘텐츠의 성장주기 동안 다른 콘텐츠의 성장 피드백이 끼어들면서 지속적으로 성장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도탑전기류 게임의 성장 콘텐츠 전반에 대한 내용은 이전 포스트를 참고해주세요.
하지만 아무리 다수 성장 콘텐츠가 다양하고 끝없이 깊다고 해도 콘텐츠를 빨리 소모한 고과금자들은 성장이 둔화해 매너리즘을 느끼고, 성장의 깊이가 깊어지면 신규 유저가 뒤따라잡기가 힘들어진다는 근본적인 육성 중심 게임의 근본적인 문제는 남습니다. 도탑전기류 게임은 이를 성장 콘텐츠 병렬 추가로 해결합니다.
통상적으로 오픈 후 2~3개월 정도에 새로운 플레이 콘텐츠와 성장 콘텐츠가 추가됩니다. 그런데 이 신규 콘텐츠는 저레벨부터 참여할 수 있도록 기존의 성장콘텐츠와 병렬로 추가됩니다. 모든 난이도를 커버할 수 있도록 병렬로 추가되기 때문에 추가 콘텐츠를 모든 사용자가 체험할 수 있습니다.
게임 초반 단계부터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콘텐츠가 추가되면 추가될수록 뒤에 합류한 사용자들은 이전에 합류한 사용자들보다 합류 이후의 플레이 타임 기준으로 더 많은 보상을 받고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 콘텐츠는 기존에 없었던 것이기 때문에 상위 그룹엔 여전히 새로운 도전이 됩니다. 성장 중심의 게임에서 콘텐츠를 추가하면서 상위 그룹과 하위 그룹의 문제를 동시에 보완할 수 있는 훌륭한 솔루션입니다.
2-5. 수평 확장의 한계와 보완
하지만 이렇게 성장이 깊어질수록 주력 캐릭터를 교체하는데 드는 비용이 커져서 신 캐릭터를 추가해도 신캐로 갈아타기 힘들다는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다른 성장 콘텐츠들이야 갖고 있는 자원을 모두 털어 넣어서 어느 정도 당길 수도 있다지만(사실 무한 성장 때문에 자원이 항상 부족하기 때문에 굉장히 제한적입니다) 성급 성장만큼은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신캐 조각 파밍 스테이지를 추가한다고 해도 최대 하루 3조각 정도인데 7성 이상으로 끌어올리려면 조각이 수백 개는 필요하고, 이를 가챠에서 조달하려고 한다면 기존의 다른 캐릭터들의 조각도 그만큼 쌓여버릴 테니까요. 이는 신캐의 상품성 측면에서도 큰 문제가 되지만 기존에 없던 캐릭터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기 힘들다는 측면에서도 큰 부담이 됩니다.
KOF98UM이나 드래곤볼 용주격투의 경우는 이 문제를 그냥 수용해버립니다. 어차피 깊은 성장이 게임의 핵심 요소인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애초에 IP 기반이기 때문에 신캐를 많이 추가할 수 없지요. 드래곤볼 용주격투만 하더라도 이미 런치까지도 끌어다 쓰는 마당인 걸요. 대신 신캐를 ‘한정’ 판매함으로써 상품성을 극대화합니다.
위의 루갈 이벤트가 예시인데요, 이벤트 기간 판매하는 이벤트 가챠에서만 루갈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챠 까서 루갈이 나올 확률은 극히 드물고, 실제로는 가챠 구매 횟수 누적에 의한 확정 보상으로 루갈을 지급합니다. 단계마다 루갈 조각을 지급하고, 특정 단계까지 가면 루갈 캐릭터를 획득하기에 충분한 수량의 조각이 쌓이는 것이죠. 사실상 몇십만 원의 고정가로 판매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을 지불할 수 있는 유저를 위해선 구매 횟수에 따른 랭킹 보상을 걸어둡니다.
조각 모음에 의한 성급 성장은 끝이 없기 때문에 단계별 보상을 모두 획득하고 가챠 구매 1위를 찍는다고 해도 루갈을 완전히 끝까지 성장시킬 수는 없습니다. 플레이어도 그걸 알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판매가 성립합니다. 신캐의 성장엔 한계가 있다는 것과, 획득에 필요한 비용 등 모든 정보는 공개되어 있습니다(가챠에서 획득할 확률은 공개되진 않지만 누구나 0이라고 생각할 거니까 예외로 칩니다).
그래도 XX만 원 더 내고 획득하고 XX만 원 더 내고 5성까지 키워보는 것은 오롯이 사용자의 선택인 것이죠. 이게 동작하는 것은 IP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캐릭터에 대한 호감이 깔려있기 때문에 게임상 쓸모가 있든 없든 일단 획득하는 것 자체도 상당한 만족감을 줍니다.
게다가 저런 특판 캐릭터들은 이런 수집욕을 자극할 수 있는 상징성 있는 특급 캐릭터로 선별됩니다. 루갈, 폭주 이오리, 초 사이어인 손오공 등이죠. 이미 100만 원 이상 썼고 충분히 육성시킨 단계에선 수십만 원에 루갈이나 초사이어인 손오공을 고작해야 몇십만 원에 확정적으로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까지 나쁜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지갑을 엽니다. 경험담이므로 신뢰하셔도 됩니다.
물론 이 신캐로의 전환 비용 문제를 게임 디자인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나루토 화영닌자의 경우, 조각 모음에 의한 성급 성장을 제외한 다른 모든 성장 콘텐츠가 캐릭터 귀속이 아닌 계정 귀속의 형태를 띕니다. 그래서 성급 성장이 뒤처졌다는 것을 제외하면 새 캐릭터로 갈아탈 때 받는 불이익이 없습니다. 액션 RPG 게임의 특성상 캐릭터 교체로 인한 경험 변화가 크고, 스펙상으론 뒤처질 수 있어도 스킬의 위력이나 효용 측면에서 체감 효용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성급이 기존 캐릭터보다 낮다고 하더라도 갈아탈 동기가 충분히 부여됩니다.
콘트라 리턴의 경우는 육성의 대상과 경험의 변화를 주는 대상을 캐릭터와 무기로 분리하고 있습니다. 플레이를 통해 수집하고 육성할 수 있는 토큰은 무기입니다. 하지만 이 무기를 들고 뛰는 캐릭터는 B급 이하는 장기 플레이로 획득할 수 있지만 A급 이상은 상품으로써 판매합니다. 각 캐릭터는 모든 무기를 들 수 있기 때문에 기존에 성장시킨 보너스를 그대로 신캐에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콘트라 리턴 유료화 관련한 내용은 이전 포스트를 참고 부탁드립니다).
이런 디자인 차이가 실질적으로 어떤 결과를 안겨주고 있는지는 차트를 보면 드러납니다. 드래곤볼은 첫 3개월 이후에 일찌감치 30위권 밖으로 밀려난 반면 나루토 화영닌자는 꾸준히 20위권 안쪽을 드나들고 있고 콘트라 리턴도 제법 오랫동안 선전하고 있지요. 콘트라는 아재 IP이고 나루토가 아무리 중국에서 인기가 좋아도 드래곤볼보다 나은 IP일 리는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IP 차이보다는 이 신캐 친화도의 문제라고 봐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이런 변주가 도탑전기류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냐면 그건 아닙니다. 나루토 화영 닌자와 콘트라 리턴은 실시간 PVP가 강조된 액션 게임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 캐릭터 새 스킬이 주는 플레이 경험 변화가 훨씬 크기 때문에 신캐의 상품성도 더 높고, 장기 운영에서 매너리즘을 해소하는데에도 더 효과적입니다.
나루토든 콘트라든 신캐를 그냥 가챠 풀에 추가하는 수준이 아니라 B급은 일정 액수 젬에 직접 판매하고 A급은 현찰 몇만 원에 판매하고 S급은 몇십만 원에 획득+랭킹 보상으로 추가 성장까지 보장하는 등 아주 적극적으로 판매하고 있지요. KOF98UM이나 드래곤볼 용주격투처럼 사용자가 간접적으로 조작하는 게임에서도 비슷한 전략이 동작할지는 좀 더 고민해볼 문제라고 봅니다.
2-6. 돈 쓰는 재미가 있는 육성 게임
앞서 살펴본 일본 가챠 게임의 경우는 좋은 캐릭터를 얻기는 힘들지만, 일단 얻고 나면 그 캐릭터로 재미있고 신나게 한두 달 즐기는 것으로 보상하는 구조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잭폿은 잘 터지지 않기 때문에 잭폿이고, 터지면 대박이 나야 잭폿이며, 그래야 시도하고 결과를 기대할 때의 두근거림 자체도 돈을 지불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죠.
반면 중국의 도탑전기류 게임은 가챠의 특권성과 불확실성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돈을 내건 안내건 누구나 캐릭터 수집과 육성에 도전할 수 있고, 어떤 캐릭터를 키울지 어떻게 키울지에 관한 모든 사항을 플레이어가 결정합니다. 자원을 원하는 대로 사용해 그 결과로 따라오는 캐릭터의 성장을 즐깁니다.
행동력 구매, 조각 스테이지 플레이 제한 리셋 등 다양한 콘텐츠에 걸려있는 누진제는 무과금자에겐 열린 기회를, 소/중과금자에겐 합리적인 소비 옵션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고과금자에겐 가챠를 합리적이고 안전한 상품으로 포장해줍니다. 그 결과 예산이 얼마이든 항상 매력적인 상품이 존재하고, 얼마를 쓰든 간에 이득을 보면 이득을 보지 손해는 보지 않았다는 긍정적인 경험을 남깁니다.
원하는 캐릭터가 나오지 않으면 들인 비용이 모두 매몰되어 얼마를 쓰건 안 쓴 것과 동일하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가챠 중심 게임에 비하면 확실히 돈을 쓰는 재미가 매우 뚜렷합니다. 특히 이 돈 쓰는 재미가 게임 초반에 아주 강력하다는 것 또한 중국 게임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당장 1~2성 밖에 없는 상태에서 10가차 마다 지급해주는 4성 캐릭터는 초반의 게임 진행에 아주 큰 도움이 되어 만족도가 높습니다.
캐릭터가 부족할 때 가챠 효율이 높은 것은 일본 가챠 게임도 마찬가지지만, SSR SR 같은 태생적 한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말 뭘 뽑아도 도움이 되지요. 각 젬 상품에 대해 처음 1번씩은 2배의 젬을 지급해주는 첫 구매 2배젬 또한 사실상 표준으로, 게임 초기에 적은 비용으로 굉장히 큰 이득을 봤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 게임 초반의 구매 만족도는 한국의 네티즌들이 격렬히 증오하는 VIP 시스템으로 극대화됩니다. VIP 시스템이 지불한 금액에 대해 추가적인 혜택을 준다고는 하지만 사실 저 혜택들은 대부분 누진제 상에서 구매 한도를 높여주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행동력 50점의 6회차 구매 가격이 10연차 절반 가격이고 7회차 구매 가격이 10연차의 2/3 가격인데 하루에 6번 살 수 있던 것을 7번으로 늘려주는 게 뭐 얼마나 대단한 혜택이 되겠습니까.
핵심이 되는 것은 특정 VIP 레벨에 도달했을 때 1번씩 살 수 있는 VIP 전용 상품이죠. 쓰다 보니 VIP 레벨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VIP 레벨을 노리고 돈을 쓴다면, 고정 가격에 VIP 한정 캐릭터를 확정적으로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이 VIP 한정 상품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VIP 상품들은 굉장히 저렴하기 때문에 남는 젬으로는 가챠를 굴리러 갑니다.
이 VIP 한정 상품에서 지급하는 캐릭터의 배치도 굉장히 절묘합니다. KOF98UM에선 마이를, 드래곤볼 용주격투에선 18호를 VIP 1레벨부터 배치했는데 두 캐릭터 모두 4성 전체 공격 특성이 걸려있어서 게임 초반부에 활용성이 매우 좋습니다. 다른 캐릭터 모두 1, 2성 비리비리해도 쟤들 전체 공격 한 번씩에 판이 그냥 깨져요. 그리고 이후로 계속해서 조각을 팔아서 플레이어 진도에 맞춰 5성 정도로 키울 수 있게 해주다가 100만 원 넘어가면 초사이어인 손오공처럼 가격에 걸맞는 물건을 배치하지요.
2-7.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돈 쓰는 재미
이렇게 돈 쓴 것에 대해 아주 화끈하게 혜택을 퍼부어주지만, 이 돈 쓰는 재미가 남의 재미와는 충돌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누구를 얻어서 어디를 깨고 못 깨고는 순전히 자기 개인 만족입니다. PVP의 경쟁이 있긴 하지만 이 또한 스트레스가 매우 적습니다.
성장이 반영되는 동기식 PVP는 사실 개인의 컨트롤보다는 매치 상대와의 스펙 차이가 승부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약한 상대를 만나 입맛대로 갖고 노는 재미도 있지만 반대로 터무니없는 상대에게 농락당하는 불쾌함도 상존하지요. 서비스가 오래되어 쪼렙 구간이 얕아지면 뉴비들은 더더욱 썰림 만을 경험합니다. 설령 아주 완벽하게 매칭을 해준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승률은 50%가 됩니다. 승자와 패자가 동시에 발생하니까요.
하지만 도탑전기류 게임들은 사용자가 대전 상대를 고를 수 있는 비동기식 PVP를 기본으로 탑재합니다. 플레이어의 지금 순위에 맞춰 상대할 후보군을 시스템이 제시하고, 이 중 원하는 상대를 골라서 도전합니다. 비동기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플레이하고 있지 않은 계정도 모두 상대로 지목할 수 있습니다. 도저히 상대가 없는 독보적인 천하제일 지존무쌍이 아닌 이상, 나와 재미있게 겨룰만한 상대는 항상 존재합니다.
이 후보군 중에서도 사용자가 스펙을 비교해서 이길만한 상대를 골라서 싸우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플레이어가 승리합니다. 만일 졌다면 그건 운이 나빴거나, 플레이어가 과욕을 부린 결과인 것이죠. 물론 다른 플레이어가 나에게 도전해서 지고 순위가 내려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플레이어는 이 과정을 보지 못합니다. 즉 플레이어는 PVP에서 이기는 경험만을 합니다. 돈 없어서 지거나 하는 그런 불쾌한 경험은 없는 거지요.
VIP 특전 캐릭터의 효용 또한 제한됩니다. 초반에 주는 마이나 18호의 전체공격은 PVE에선 굉장히 강력하지만 PVP에선 상대 캐릭터를 잡을 만큼 강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대가 스킬을 쓰는데 필요한 분노 게이지만 올려주곤 합니다. VIP 캐릭터 없어서 PVE를 조금 힘들게 플레이할 순 있어도 PVP에서 억울하게 밀릴 일은 없지요. 100만 원 넘어가면 주는 초사이어인 손오공 같은 경우는 분명 PVP에서 쓸만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조각 수급이 어려워서 성급 성장이 제한되기 때문에 전력으로 쓰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2-8. 장기 운영에서의 한계
도탑전기류 게임이 추구하는 것은 성장하는 재미와 돈 쓰는 재미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플레이를 통해 점점 더 강해진다는 기분을 느끼는 것은 한국과 동일하지만 농도가 더 짙습니다. 한국이 힘들게 큰 허들을 넘어갈 때의 쾌감에 중점을 둔다면 중국은 어렵지는 않지만 많이 깔려있는 허들을 하나하나 타고 넘어가는 재미를 중시합니다. 그리고 돈을 쓰더라도 모 아니면 도식의 도박을 한다기보다는 돈을 쓴 만큼 더 빨리 강해진다는 느낌을 주지요.
중국 수출길이 막혔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전에 중국에 나간 게임도 존재합니다. 한국에서 성공한 게임도 있고, 아예 중국 시장에서 먼저 출시한 게임도 있지만 다들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죠. 바로 저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재미를 맞춰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봐요.
하지만 도탑전기류 게임은 시간이 지나고 충분히 성장하고 나면 이 재미가 약해진다는 문제를 안습니다. 아무리 성장축을 많이 깔아둔다고 해도 결국 모두의 주기가 길어지고 나면 성장 단계에서 오는 피드백이 줄어들고 동기 부여가 약해지는 것이죠. 성장에 대한 동기부여가 줄어들면 당연히 돈 쓰는 재미도 떨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구조적으로 이런 피로감을 해소할만한 장치가 마땅치 않다는 점입니다. 매너리즘을 타파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새로운 수집 대상과 새로운 플레이 경험을 줄 수 있는 새 캐릭터를 투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장이 너무 깊기 때문에 새 캐릭터로 갈아타기 힘들고 그래서 새로운 플레이를 경험하기가 힘듭니다. 수집 대상은 될 수 있겠지만 이 또한 게임 내 토큰으로서의 의미가 약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지요.
2016년 여름까지만 하더라도 에반게리온이나 성투사 성시, 원피스 등 도탑전기류 게임들이 그래도 꾸준히 출시되고 차트애도 보였는데 2017년 들어서 거의 자취를 감춘 것 또한 바로 이 문제에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통적인 도탑전기류는 이미 채산성에서 한계를 보인 것이죠.
그리고 최근엔 이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도탑전기류의 틀에서 벗어난 게임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도탑전기류 게임이 가진 장점을 유지하면서도 일본 가챠 게임의 요소를 일부 받아들여서 장기 운영에 유리한 디자인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죠. 관련된 내용은 2부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원문: 잡상그룹부설게임연구소
※ 「일-중 수집형 RPG의 캐릭터 판매를 둘러싼 BM과 게임 디자인 비교 2부」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