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월스트리트·부자는 시장을 형성하고 규칙을 시행하는 결정에 여러 형태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예를 들어 선거 후원금을 기부하거나,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특정 정치인의 정적에 대항해 홍보 활동을 벌인다. 로비 회사나 월스트리트의 고소득 직업과 정부 관리직 사이에 회전문을 설치해 서로 넘나들 수 있게 하거나 공직에서 내려오고 나서 고소득 일자리를 주겠다고 암시한다. 전문가를 고용해 두뇌 집단을 결성하고 홍보 활동을 펼쳐 특정 정책이 대중에게 이롭다고 믿게 한다. 몸값 비싼 로비스트와 변호사 군단을 갖추고 입법 기관과 행정 기관의 청문회와 법원을 장악한다. 또한 검사와 판사에게도 손을 뻗는다.
경제 불평등 연구에 집중해온 정치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72· 미국 UC 버클리대 정책대학원) 교수는 지난 2016년 국내에 번역 소개된 『자본주의를 구하라』에서 ‘가진 자들’이 어떻게 정치과정과 정부 정책을 좌우하는지 조목조목 짚었다. 클린턴 대통령 시절 노동부 장관을 지냈고, 2016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버니 샌더스를 지원했던 그는 ‘고장 난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어떻게 위협하는지 누구보다 속속들이 아는 학자로 평가된다.
시장 규칙을 왜곡하는 ‘큰손들’
흔히 경제규제를 둘러싸고 ‘시장이냐 정부냐’의 논쟁이 벌어지지만, 라이시는 사실 이것이 의미 없는 논란이라고 단언했다. 온전한 의미의 ‘자유시장’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시장이 만들어질 때부터 재산권∙독점∙계약∙파산 등에 대한 규칙이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토지, 주택, 자동차, 휴대전화를 소유할 수 있지만 노예, 핵폭탄, 조리법은 소유할 수 없다. 어떤 재산을 보호할 것인지, 어떤 계약을 금지하거나 보장할 것인지에 대해 규칙이 어떻게 정해지느냐에 따라 누구는 이익을 얻고 누구는 손해를 본다.
라이시는 이런 ‘경제규칙’을 정하는 과정에서 갈수록 대기업, 월스트리트(금융자본), 부자들의 영향력이 커져 왔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그들은 점점 더 손쉽게 많은 돈을 벌고, 나머지 사회 구성원들은 상대적으로 더 가난해졌다는 얘기다.
전관예우와 회전문의 덫
라이시는 대기업 경영진, 그들의 변호사, 로비스트, 월스트리트 종사자와 정치 하수인 그리고 수많은 부자들이 입으로는 ‘자유시장’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자기네에게 유리한 쪽으로 시장을 재조직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기 잇속을 챙기기 위해 선거 후원금을 기부하고, 특정 후보를 지지하며, 공직자들에게 퇴임 후 고소득 일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전문가를 고용해 씽크탱크(연구소)를 가동하고 언론홍보 등을 통해 특정 정책이 대중에게 이로운 것처럼 전파되게 한다.
예를 들어 2014년 현재 미국의 대형 케이블회사 컴캐스트의 로비스트 126명 중 104명은 미국 연방통신위원회와 상원 등 정부·의회에서 근무한 전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세계 최대의 종자기업인 몬산토는 2013년 약 700만 달러(약 77억 원)를 로비에 썼는데, 이 회사 직원들은 퇴직 후 식품의약국(FDA)과 농무부, 의회의 농업정책위원회에 진출하거나 백악관 등의 자문을 담당하는 일이 많다. 몬산토의 변호사였다가 대법관이 된 사람도 있다.
미국에서는 법원 판사 중 87%가 선거를 치러야 하는데, 선거자금 대부분을 기업에서 후원받는다. 이 때문에 의회와 행정부는 물론 사법부의 판결도 편파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기술발전 등 다양한 요인으로 시장 조건은 계속 변하고, 이를 이유로 법과 제도가 바뀔 때마다 기득권층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과정을 일반 국민들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라이시는 “자유시장은 이러한 현상 전체를 위장하는 막”이라고 꼬집는다. 마치 중립적인 힘이 작용해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결과를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불평등은 줄일 수 있다
라이시는 이처럼 경제규칙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권과 정부의 의지에 따라 불평등을 줄이는 방향으로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2차 대전 무렵부터 1970년대 말까지 미국엔 이런 일이 일어났다.
1930년대에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공황에 대응해 재정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는 뉴딜정책을 폈고, 이 시기에 상업은행이 고객 예금으로 주식투자를 할 수 없도록 하는 글라스-스티걸법이 통과됐다. 이와 더불어 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각종 사회보장 제도와 주당 40시간 근로, 초과 근무에 대한 1.5배 수당 지급, 고용주의 건강보험료 제공 정책이 수립됐다. 종전 후 30여 년 동안 노동자의 실질 임금은 꾸준히 올랐다. 이 시기 미국 역사상 가장 두터운 중산층이 생겨났고, 불평등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1970년대 말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정치적 보수화의 바람과 함께 미국 경제에 적대적 기업인수 바람이 불었다. 주주 이익 극대화가 기업의 유일한 목적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은 대량 해고를 통해 경영 효율화를 추구했다.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급여 삭감 등 처우 악화를 수용했다.
1981년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신자유주의를 내세우며 복지예산을 삭감하고 기업규제를 대대적으로 풀었다. 또 자유무역협정체결로 많은 일자리가 해외로 빠지면서 노조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중산층∙빈곤층과 이들로 구성된 노조 같은 경제적 이익 집단 즉, 대항 세력이 약해진 것이다.
그 결과 중산층과 빈곤층은 더 가난해지고 부유층은 더 부자가 되는 ‘부의 상향이동’이 일어났다. 대기업, 월스트리트, 부자가 소유한 정치적 힘은 점점 커지는 데 이를 억제해 균형을 맞출 대항적 세력은 점점 무너졌다. 라이시는 “대규모 중산층이 받쳐주지 않으면 어떤 경제도 유지될 수 없다”며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한 자본주의로 바꿔야 한다”고 역설했다.
대항적 세력을 회복하자
라이시는 노조와 자영업자조합, 지역사회모임 등 풀뿌리 대항세력을 회복해서 거대자본의 시장 왜곡을 막고 불평등한 분배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도적으로는 자본가들이 정치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선거자금지출 규제, 정치자금 내용공개, 정부 관리의 전관예우 금지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또 특허권과 저작권의 보호 기간을 줄이는 등 기술보유자들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지적 재산권 제도도 합리적으로 손질하자고 제안했다. 이와 함께 반독점법을 활용해 독점기업을 해체하고 거대기업의 시장지배력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라이시는 이 밖에 글라스-스티걸법을 부활시켜 상업은행의 저축을 위험한 주식과 파생상품 투자로부터 분리하고, 국민에게 직∙간접적인 기본소득을 주며, 부의 상속을 줄이고 공공영역으로 환수할 수 있는 시장 규칙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부 규제를 풀어야 경제가 살아난다’는 주장이 고장 난 녹음기처럼 되풀이된다. 실상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가진 자의 입맛에 맞게 시장규칙이 만들어져온 게 더 문제인데도 말이다. 미국과 한국의 경제환경과 제도엔 차이가 있지만, ‘대항세력을 회복하고 정치를 바꿔야 한다’는 라이시의 주장은 두 나라 모두에 똑같이 유효해 보인다.
원문: 단비뉴스 / 필자: 박경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