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에서 이어집니다.
원래는 ‘한국 수학교육이 가지는 근본적인 문제는?’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어서 이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이번 이야기는 구체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예제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모모나라 4년 동안의 대입 수학 문제와 그에 대한 반응에 대한 가상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우선, 3년 동안 교육과정의 변화는 없다는 걸로 가장하고 이야기를 풀어가 보자.
모모나라의 수학 범위
- 극한
- 이차 함수
모모나라의 00년도 수능시험
Q. 다음과 같이 미분을 정의한다고 했을 때,
다음을 구하시오.
이때 모모나라 각 계층의 반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언론: “0년도 수능 수학 예전보다 어려워” “고등학교 때 배우지 않은 범위를 벗어난 문제 출제” “수능 시험 갈수록 어려워져”
- 대학교: 미분 정도는 고등학교 과정에 포함해야…
- 학부모&학생: “학교에서 안 배운 것도 나오는 더러운 세상!” “역시 수능 잘 보내려면 학원 보내야 함!”
- 학원: “위의 문제는 미분을 모르면 풀 수가 없습니다. 학원으로 오세요.”
수능 시험의 분석을 마치고 나면, 학원에서는 수능의 최신 동향을 반영하여 미분에 대한 내용을 학교보다도 신속하게 가르치기 시작한다.
보통 학원에서 가르치는 것
조금 비싼 학원(?)에서 가르치는 것
아주 비싼 학원(?)에서 가르치는 것
그리고 1년이 지나 다음 년도에는 수능 시험이 다음과 같이 출제가 된다.
모모나라의 01년도 수능시험
Q. 다음과 같이 미분을 정의한다고 했을 때
다음을 구하시오.
- 언론 : “수능 시험 갈수록 어려워져… 교육과정 수정 불가피…”
- 학부모&학생: “그냥 학원도 안 된다, 강남의 비싼 학원 내지는 족집게 과외를 해야 대학 갈 수 있구나…” “수능 치려면 미분을 알아야 한다.”
- 학원: 아주 비싼 학원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가르치기 시작
이렇게 수능시험이 출제되면, 가장 비싼 학원은 더 비싼 학원이 될 것이고 학부모들은 ‘더 좋은(이라고 쓰고 ‘더 비싼’으로 읽는다)’ 학원을 보내야지만 대학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1년 후, 모모나라의 02년도 수능시험
Q. 다음과 같이 ‘미분’을 정의했을 때 (3/x)의 미분함수를 구하시오.
- 언론: “수능 난이도 작년과 비슷한 정도…” “학생의 변별력을 고려한 수준으로 출제…”
- 학생&학부모: ??? 멘붕
- 못 푼 부류: “아, 학원을 다녀도 안 되는구나.”
- 푼 부류: “역시, 학원을 다니니까 잘하네.”
상황극은 끝, 하고 싶은 말 시작
위의 가상 상황은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수학 교육과 수능 시험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선 고등학교(혹은 K-12)까지 미분, 적분을 배우지 않는다고 가정했다. 모모나라의 00년도 문제는 극한(고등학교 교과과정 범위)을 알면 풀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언론과 학원은 이 문제를 극한 문제로 보지 않고, 미분 문제(고등학교 범위 밖의 문제)로 본다.
그래서 학생들은 학교에서는 극한을 배우고, 학원에서는 미분을 배운다. 이렇게 대학에 온 신입생들은 대학수학(Calculus)을 추가하여 미분과 특수함수를 배우고 기말고사를 친다. 이 기말고사를 위의 대입 수능 문제와 비슷한 예제로 전개해 보겠다.
(추가로 배운) 대학수학 범위
- 특수함수: Ln(x), Exp(x)
- 미분
02년도 신입생, 대학 수학 기말고사 문제를 풀다
Q. 다음이 성립됨을 증명하시오.
- 신입생: “멘붕, 증명문제 너무 어렵다!” “고등학교 수학 아무 쓸모없다!”
- 교수들: “?? 미분, 특수함수를 배웠는데 이걸 못 풀어?” “미분은 고등학교 때 하고 온 거 아냐?”
물론, 위의 예제 또한 현재 상황을 단순화시킨 것이다. 하지만 배우는 범위와 시험 범위,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들은 대한민국 1990년대 후반까지의 전체적인 현상(학력고사 세대)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요즘은 어떨까? 다음 예제를 보자.
모모나라의 03년도 고등학교 수학 개정 범위
- 극한 (2차함수는 어렵다고 빠짐)
모모나라의 03년도 수능시험
- Exp(x)를 미분하시오. (끝)
대한민국 수학교육이 가지는 근본적인 이유
사실, 어느 동네건 문제가 변별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시험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는 대입 수능이건 IB건 A-Level이건 마찬가지다. 비단 수학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IB의 영어 문제를 볼 기회가 있다면 잘 보시기 바란다. 혹자는 우리나라가 영어권이 아니니 어려운 게 당연하지 않냐고 물어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경제학 문제를 한번 풀어보길 바란다. 당연히 어려울 것이다.
수학도 예외는 아니다. IB-Higher의 수학이나 A-Level의 수학도 상당히 어렵다. 그런데 이 ‘어렵다’는 의미가 외국 시험과 한국 시험은 다소 다르게 통용된다. 어떻게 다른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수학 문제의 난이도를 높이는 방법(즉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잠깐 설명해야 할 듯하다. 수학 문제의 난이도를 높이는 방법은 크게 다음 세 가지가 있다.
- 보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방법 : 1번 유형
- 다른 영역(과학, 경영)에 적용을 하게 하는 방법 : 2번 유형
- 고등학교 지식수준 이상의 내용을 포함하는 방법 : 3번 유형
그리고 이러한 방법은 둘, 혹은 그 이상의 조합도 가능하다. 특히 ‘많은 생각을 하게 하면서, 다른 영역에 적용하는’ 문제는 난이도가 월등히 높다. 이렇게 문제를 분류한 뒤 난이도를 논하게 되면, 한국의 시험에서 변별력을 더하는 방법과 미국/영국 시험에서 변별력을 더하는 방법이 어떻게 다른지 이해가 한 번에 될 것이다. 그렇다.
미국/영국의 시험(SAT-Subject, IB, A-Level)은 주로 1번과 2번 유형의 문제, 혹은 1번과 2번을 더한 문제들로 난이도를 높이는 반면, 한국은 3번 유형의 문제로 난이도를 높이는 경향이 있다.
물론 3번 유형의 문제를 낸다고 해서 문제를 무한정, 예컨대 대학교 수준 이상으로 어렵게 낼 수는 없다. 고등학교 졸업생이 알아야 할 지식수준을 훨씬 넘어선 수준의 문제는 없다. 그렇다고 문제가 쉽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배우지 않으면 풀 수 없다. 마치 모모나라의 00년도부터 02년도 수능 문제들처럼 말이다. 고등학교 과정에는 없다. 학원에서 가르치는 ‘미분(공식)’을 모르면 풀 수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 수능을 치고 입학한 02년도 신입생들이 틀림없이 풀 수 있던 ‘미분’ 문제를 대학생이 도히어서도 풀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학원에서 배운 것은 미분 ‘공식’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분을 배운 적은 없다.
여기서 진정한 반전은, 이렇게 미분 문제를 풀고 입학한 신입생들은 자신이 미분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애초에 미분 문제만 풀 줄 알았지, 원리에 대해서는 관심도 생각도 없는데 말이다.
이러한 문제는 특정한 부분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체인과 같다.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범위 외의 문제를 낸다. 범위 외의 문제를 풀기 위해 학원을 다녀서 ‘문제 풀기’만 배운다. 학생들은 어려운 문제를 풀었으니 안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원리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 신입생들의 수학 능력은 자연스럽게 떨어지게 된다. 그러니 언론에서는 고등학교 교과과정을 어렵게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새롭게 추가된 범위로 수능은 더 어려워진다. 수능이 어려워졌으니 또 학원을 다니고, 학원에서 ‘문제 풀기’만 배우고, 애들은 착각하고, 신입생은 관심 없고… 그러다 ‘볼드모트’가 고등학교 과정은 너무 어렵다고 난리 치면, 정작 필요한 범위는 빼버리고… 수능은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범위 외의 문제를 내고, 학원 다니면서 다시 문제 풀기를 배우고… 이렇게 무한루프가 연결된다.
네? 응용력이요? 깊은 사고력이요? 수능에서요?
이즈음에서, 누군가는 고등학교나 학원에서 문제 풀기만 가르치지 말고 ‘제대로(혹은, 생각하게)’ 가르치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생기는 문제는 또 있다. 그 중 한가지는 지난번에도 언급했듯이 우리나라의 모든 교육과정이
- 수능에서 시작해서 수능에서 끝난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 수능 문제가 생각을 하든 하지 않든, 3분 내외로 한 문제를 풀어야 하도록 구성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제대로 생각하게’ 가르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아무리 수학적 사고를 잘하더라도 수능에서 문제를 빨리 풀지 못하면 그 학생은 수학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특히 ‘볼드모트’에게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볼드모트의 능력은 대학의 입학 사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바로 ‘수능 수학 성적만이 수학 능력을 인정받는 유일 잣대’로 작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혹여나 수능 이외의 다른 잣대로 다른 학생이 입학하기라도 하면, 볼드모트는 입학 사정의 형평성을 빌미로 해당 대학에 재앙을 몰고 올 것이다. 볼드모트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수학 실력이 중요한 게 아니라, 수능 시험에서의 수학 성적이 훨씬 중요하다. 어떤 과정이 실제로 중요한지 아닌지가 아니라, 한 문제라도 더 맞힐 수 있는지 없는지에 더 관심이 많다.
원칙적으로는 생각을 요하는 문제들이 학생들의 실질적 수학 능력을 판단할 수 있는 좋은 지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볼드모트는 이 모든 것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인 모모나라의 00년도 문제를 기억하는가? 기억나지 않는다면 다시 보자.
사실 모모나라의 00년도 수능 문제는 범위 밖의 문제(3번 유형)가 아니라, 생각해야 하는 문제(1번 유형)였다. 문제는 같은데 문제의 풀이 유형이 바뀔 수 있는 이유는 배우는 범위에 따라 요구되는 능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위 문제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 미분(공식)을 알면 단순 계산 문제가 된다 : 3번 유형
- 미분(공식)은 모르고 극한만을 알면, 극한의 원리를 생각해야 하는 문제가 된다 : 1번 유형
이러한 문제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 생각을 해야 하는 문제(특히, 1번 유형)는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다. 이게 무슨 말이냐? 답을 알기 전에는 어렵지만, 답을 알면 쉬운 문제라는 것이다.
단순히 대학을 가기 위한 변별력을 판별하기 위한 게 아니라면, 실질적인 수학적 사고능력을 판별하기 위한 문제라면 답을 모르고도, 배우지 않고도 문제를 풀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모모나라의 00년도 문제는 ‘미분을 배우지 않더라도 극한까지 배운 상태에서 학생들이 깊은 생각을 통해 풀 수 있는 문제, 그래서 실질적인 수학적 사고능력을 판단할 수 있는 문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모모나라에서는 이를 ‘배운 범위인 극한으로 푸는 게 아니라, 배우지 않은 범위인 미분으로 풀면 되는 문제(3번 유형, 범위 외의 문제)’로 인식했다. 어째서 이런 황당한 상황이 가능해진 것일까?
이는 바로 고객이 원하면 뭐든지 다 해주는 거대한 사교육 시장과 관련이 있다. 사교육의 목적은 아이들의 실질적인 수학 능력 향상이 아니다. ‘수능 수학 성적 향상’에 그 목적이 있다. 다들 경제학을 배워서 아시겠지만, 이러한 기형적인 목적의 사교육 공급이 팽창하는 데에는 공급 이상의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요의 핵심에는 ‘볼드모트’가 있다.
그렇다! 한국 수학교육의 근본 문제에는 ‘볼드모트’가 있는 것이다. (4편에서 계속)
원문: Amang Kim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