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창시절이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지극히 평범한 일반계였는데, 한 학급에는 마흔 명 내외의 학생이 있었다. 여기서 마흔이라는 건 꽤 오묘한 숫자다. 한 반에 마흔 명 정도를 모아놓으면 소위 말하는 ‘이상한 애’가 꼭 한두 명 있었으니까.
수업 도중에 별난 행동을 하거나, 때때로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하거나, 아무튼 표현이 서툴러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그런 애들. 교사들이 사전에 파악해서 고르게 배치한 건지,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의 내 생각으로는 모든 반에 ‘이상한 애’로 불릴 친구가 한 명씩 필요했던 것 같다. 가장 쉽게 분리할 수 있고, 가장 편하게 깔아뭉갤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어떤 학기에는 J라는 친구가 있었다. 내가 앉은 자리는 J의 바로 뒤에서 오른쪽이었는데, 생각해보면 J에게 지적장애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랬다. 그냥 J는 말이 없고, 수업시간에 삐뚤빼뚤한 낙서하기를 좋아하고, 쉬는 시간에는 멍하게 바깥을 보거나 엎드려 자고, 역사 시간에는 유난히 눈이 반짝이고, 체격은 조금 왜소한 그런 아이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와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그러나 남학생들만 있는 교실에서, 공부도 못하고, 운동도 못하고, 말도 없고, 몸집도 작은 J는 너무도 쉬운 타겟이었다. J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언제부턴가 이상한 애 혹은 장애인으로 불렸다. J의 실제 이름은 학급 내에서 욕처럼 쓰였다. 누군가 교실에서 바보 같은 짓을 하면 와, 너 방금 완전히 J같았어, 같은 식이었다. 나는 J가 장애인이라고 느낀 적도, 멍청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다만 그렇다고 J를 비호한 적도 없다. 되려 J처럼 따돌려지는 대상이 내가 아니라는 것에 모종의 안정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반 친구들이 J를 고립시키는 일에 대해 침묵하고, 한편으론 동참했다. 이때의 내가 얼마나 추하고 비겁했는지 깨달은 것은 시간이 꽤 지난 뒤였다.
학기가 지속되면서 J에 대한 괴롭힘과 폭력은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J의 뒤통수에 몰래 지우개가루를 날리며 낄낄대던 놈들은 어느 순간부터 대놓고 칠판지우개와 신발 가방을 갖다 던졌다. 자고 있는 J의 등을 팔꿈치로 찍고 도망가는 일은 예사였고, J가 화장실에 간 사이 교과서를 갈가리 찢어놓기도 했다. 역사 교과서였다. 알고 그랬는지, 그냥 마침 애들 손에 잡힌 게 역사교과서였는지는 모르겠다. 난 눈앞에서 보고 있었는데도 막지 않았다. 내가 한 거라곤, J의 역사 교과서가 찢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친구들과 함께 깔깔댄 것뿐이다.
이처럼 이유도 끝도 없는 괴롭힘 앞에서, J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자신에게 누군가 물건을 집어 던지면, 하지마, 그만해, 라고 분명히 말했다. 말도 없고 목소리도 자체도 작았던 J가 최선을 다해 낸 소리였다. 그러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J는 도움도 요청했다. 처음으로 찾아간 것은 반장이었다. 어떻게 이 사실을 알게 됐느냐면, 반장이 얘기해줬기 때문이다. J가 나한테 자기를 지켜달라더라, 걔는 지가 왜 당하고 사는지도 모르나 봐, 라고. 나 역시 J가 왜 당하고 있는지 몰랐다. 정당한 이유가 있었나? 그럼에도 난 그래, 이상한 애네, 하고 말았다.
그다음은 선생님이었다. 어느 날, 거의 교실에만 붙어있던 J가 교무실을 들락날락했다. 다음날 J는 결석했다. J가 없는 조례시간. 담임 선생님은 반 아이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얘들아, J말인데, 너희가 너무 괴롭혀서 학교 다니기가 무섭고 힘들다더라, 내일 돌아오면 먼저 말도 걸어주고 친구도 돼주고 그래, 알겠지, 하고 짧게 말했다. 다음날 J는 정상적으로 출석했지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하나 꼽자면 J를 괴롭히는 말 중에 ‘또 울면서 담임한테 갈 거냐?’가 추가된 것 정도였다.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국어 시간이었는데, 시험 진도까지 일찍 뺀 덕에 반 전체가 자습을 하고 있었다. 쉬는 시간부터 계속 엎드려 있던 J가, 아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교탁에 앉아있던 국어선생님과 다른 친구들이 뭐야, 왜 저래, 하고 당황하고 있을 때, J는 그대로 뚜벅뚜벅 걸어 자신을 가장 악질적으로 괴롭혔던 녀석 자리 앞에 섰다. 그리고 교복 바지 주머니에서 커터칼을 꺼내 휘두르기 시작했다.
교실은 그야말로 충격의 도가니였다. J의 난동은 5초도 안 돼서 주변 친구들에게 저지당했고,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변 친구들에게 붙잡힌 채 소리를 지르는 J, 에게 반 친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욕을 퍼부었다. 저 새끼 돌았나, 제정신이 아닌 건 알았는데, 진짜 미친 새끼였네, 저거는 정말 부모님이 문제다, 같은.
이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큰 충격을 받아서가 아니라, 언젠가 일어날 것 같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J는 양팔을 잡힌 채 교실 바깥으로, 교무실로 끌려갔다.
J는 교내 징계위원회에 회부됐다. 교사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던 국어선생님은 이 사건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담임선생님은 J가 왕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업시간에 칼을 휘두르는 건 도가 지나쳐, 정도로 결론을 내렸다. J는 전학을 갔고, J를 괴롭힌 놈들은 멀쩡하게 학교를 다녔다. 떠나간 J대신 다른 친구를 괴롭히면서. 졸업도 잘 했다.
2.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살아가다 보면, 때때로 극단적인 표현을 마주하게 된다. 폭력적이고, 파괴적이고,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몰지각하고, 공포스럽고, 끔찍한 표현들. 익명성을 등에 업(었다고 생각하)고 할 말 못 할 말 다 하는 인터넷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네이버 기사에 달리는, 누가 봐도 사탄이 달았다고밖에 볼 수 없는 악성 댓글부터, 최근의 일베와 워마드에 이르기까지.
이런 극단적인 표현에는 강도 높은 비판이 뒤따르는 법이다. 음, 이쯤 되면 ‘이 새끼 이거, 설마 일베 워마드를 쉴드 치려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아니다. 그럴 생각도 없고, 가능한 일도 아니다. 최근에 일어난 그런… 것들을 어떻게 쉴드 칠 수 있는가? 누가 돈 줘도 못 한다.
나는 극단적 표현방식에 대한 비판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더 나가선 마땅히 이뤄져야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극단적 표현방식은 원치 않는 다수에게 극도로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나는 ‘표현의 자유’가 자주 오남용 되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내가 배우기로, 자유라는 것은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영역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일베와 워마드의 표현은 자유롭게 허용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사회통념 상 터부시되는 방식이라는 걸 알고도 택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범법이기도 하고.
극단적 표현방식을 좀 더 개인적인 영역으로 좁혀 말하면 자살에 해당된다. 실제로 자살은 언론보도에서 ‘극단적 선택’ 같은 단어로 표현되고, 자살하고 싶다는 사람에게는 ‘당신이 자살함으로써 슬퍼하거나 괴로워할 사람들 때문이라도 죽지 말라’는 말을 자주 하지 않는가. 자살한 사람이 아무리 생전에 괴롭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더라도 ‘아무리 그래도 자살을 할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자살까지 할 건 아니었는데 말야’ 같은 말을 하는 것도 비슷하다. 자살과 얽힌 범법조항이 있다는 것도.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이 뭐냐? 정말로 쉴드를 치는 게 아니라면. 요는 그렇다. 사람들은 극단적인 결과로 말미암아 모든 가치판단을 확정 짓곤 한다. 사람을 죽였으니 나쁜 놈, 칼을 휘둘렀으니 미친 놈, 부모에게 욕을 했으니 불효자식 놈, 자살했으니 좀 불쌍한 놈, 같은 식이다. 어쩔 수 없다. 극단적인 표현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충격과 인상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본디 사람은 전후 맥락 다 고려해가며 결과를 평가하지 않는다. 대신 결과로 대상에 대한 평가를 마무리 짓는다. 쉽고 간편하니까.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난 그냥 사람이 원래 그렇게 단순한 동물이라는 결론이다.
그러나 당신이 이런 극단적인 표현들로부터 견딜 수 없는 분노와 불쾌감을 느낀다면, 이 같은 극단성이 어떤 경위로 인해 발현되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집에서 악취가 난다면 일단 어디서 나는 냄새인지부터 확인할 것이다. ‘씨X, 이게 무슨 냄새야?’ ‘집에서 이런 냄새가 난다니, 해도해도 너무하네’ 같은 말을 해봤자 바뀌는 건 없기 때문이다. 악취가 견딜 수 없다면 악취의 근원을 찾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같은 이유로 악취가 풍기지 않도록 구조를 개선하거나 생활습관을 바꾸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
생선 썩는 냄새가 극도로 불쾌한 것은 생선이 워낙 빨리 썩고 냄새가 극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생선이 썩을 때까지 내버려 두는 인간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이므로. 이미 썩은 것은 별 수 없으니 치워놓고, 생선썩은내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깨달았으면 다음에는 썩지 않도록 하거나 썩기 전에 요리해 먹어야 이치에 맞지 않는가.
3.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극단적 표현들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어쩌면 견딜 수 없는 분노의 표출보다 더 깊고 먼 곳에 있을지 모른다. 불쾌가 재생산될 수밖에 없는 사회를 놔두고 홀로 불쾌하지 않겠다면 좀 욕심 같다. 내게 분노와 불쾌감을 일으키기 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표현과 결과에 대해 분노하되, 그 근원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덩그러니 떠다니는 분노는 단순히 똥개에 침 뱉듯 하는 감정의 배설에 지나지 않으며, 분노의 대상이 재생산되는 일을 방치하는 일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극단적 결과의 맥락을 생각지 않는 것은 생선이 썩어서 나는 악취를 더러 욕만 할 테니 알아서 사라지라는 것과 같다. 물론 맥락이 있고 과정이 있기 때문에 너희들이 느끼는 불쾌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주장하는 것은 감정적인 영역이다. 악취가 나도록 방치해놓고 이제 와서 왜 뭐라 하느냐는 것. 개인적으로 전혀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취가 향기가 될 수는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생선 썩는 냄새를 라벤더 향처럼 느낄 순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이미 썩은 생선더러 왜 X같이 악취를 풍기느냐, 혹은 니네가 썩을 때까지 방치해놓고 왜 냄새난다고 지랄이냐 하는 입장 중에 한쪽을 선택해 치고받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다시 집에서 이상한 냄새가 안 날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하는 것이다. 모든 일이 썩은 생선을 치우는 것처럼 간단하진 않겠지만.
나는 J가 칼을 휘두른 행동에 대해 비호할 생각은 없다. 오랫동안 생각해 내린 결론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라는 말이 진부하다는 건 안다. 그럼에도 칼을 휘두른 건 잘못됐다. 모든 상황과 맥락을 고려해 모든 극단적 결과를 옳다고 할 수 있다면, 어떤 것도 옳지 않다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단지 칼을 휘둘렀다고 해서 J의 본질 자체가 비정상이고, 폭력적인 인간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 일은, 이미 일어나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고, 공포에 떨었고, 혹은 분노했다. 다만 그 속에서 조금의 맥락을 알아버린 나는, 이제 와 늦게나마 생각할 뿐이다. 앞으로 살아가며 만나는 모든 J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걸어주겠다고, 네가 칼을 들기 전에 먼저 손을 잡아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