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90년 3당 합당 구도, 즉 ‘지역 정치 구도’가 완전히 종말을 고했다.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현상이다.
출발점은 2016년 총선이다. 2016년 총선에서 ▴부산지역 17명 중 5명(29.4%) ▴울산지역 6명 중 2명(33.3%) ▴경남지역 16명 중 4명(25%) ▴대구지역 12명 중 2명(16.75%)가 ‘범진보 성향’ 당선자였다. (여기서 범진보성향이란 민주당+정의당+민중당 계열을 지칭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평생 지역 구도의 희생자였던 김대중 대통령과 평생 지역 구도와 맞서 싸운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났다.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죽어서도 국립묘지 안장을 거부하고 ‘봉하마을’에 묻혀 경남 김해 지역을 거점으로 ‘불씨 하나’를 남겼다. 죽어서도 지역 구도와 투쟁하려던 취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지역 정치구도의 쇠락을 대체하는 것은 세대 대결이다. 세대 대결에는 진보/보수 이념 구도가 녹아 있다. 특히 페미니즘, 성소수자 등 신(新)좌파적-사회문화적 이슈일수록 세대 대결의 양상이 강하다. 앞으로 더욱 그렇게 될 것으로 보인다.
2.
영남 지역에서 민주당이 선전했다. 부산-울산-경남에서 민주당이 대승했고, 대구-경북에서도 선전했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가 아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포인트는 영남 지역에서 민주당이 선전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뒤집어서 ‘영남 지역에서,진보정당의 존립기반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정의당을 관통하며 사용되었던 ‘영남 진보벨트’라는 표현이 있다. 울산-부산-거제-창원을 잇는 노동자 밀집 지대, 영남 공업지대에서는 진보정당 세력이 민주당보다 강력했다. 예컨대, 2016년 총선 이전까지 울산지역에서 민주당은 후보를 구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이번 6.13 울산시장 선거에서 민주당 송철호 후보는 52.8%를 받고, 민주노동당 시절 ‘울산연합’의 대장 역할을 하던 민중당 김창현 후보는 4.7%를 받고, 현총련 의장이자 민주노총 정치위원장 출신인 바른미래당 이영희 후보가 2.2%를 받았다. 이는 매우 상징적이다.
현대차 노조가 있어 진보정당이 강세를 보이던 울산 북구의 경우 이번에는 국회의원도 민주당, 구청장도 민주당이 당선됐다. 현대중공업 노조가 있는 울산 동구도 민주당 구청장이 당선됐다. 울산 남구, 울산 중구, 울주군까지 울산광역시 산하 5개 단체장 모두 민주당이 석권했다. ‘전승’이다.
더 놀라운(?) 것은 진보정당과의 후보 단일화 없이 민주당이 압승했다는 점이다. 이는 울산에서 정의당-민중당의 득표율을 합쳐도 민주당의 주도권을 침해할 수준이 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즉, 진보정당은 울산에서 유의미한 득표조차 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노동자 밀집 지역인 창원과 거제에서도 민주당 후보가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진보정당과의 단일화 없이 당선됐다.
3.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됐다. 2002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가 100만 표를 받고 2004년 민주노동당이 첫 원내진입을 했다. 최소한 울산-거제-창원은 진보정당의 ‘정치적 영향력’이 민주당에 비해 강력했다. 왜? 왜 그 시절 영남지역에서 진보정당은 민주당보다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한국 정치에서 지역 구도 정치가 강력하게 작동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민주당=호남당’이고, ‘새누리당, 한나라당=영남당’으로 인식됐다. 옳든 그르든 다수 대중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이런 판단을 근거로 투표했다. 그래서 2002년 대선에서 부산 출신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노무현은 부산에서 35%를 받고, 충청 출신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회창은 부산에서 65%를 받았다. 노동자 밀집, 영남지역에서 진보정당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역 구도 정치의 부산물이었다. 지역 구도가 사라지자 (호남당이 아닌) ‘민주당’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됐다.
둘째, 2010년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 이슈 이전까지만 해도 민주당(계열)은 반독재+정치 민주화에만 관심을 갖고, 사회경제적 이슈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반면 민주노동당 등 진보정당은 부유세, 무상의료, 무상교육, 무상급식 등의 유럽 정치사로 보면 복지국가에 우호적인 20세기 초반 ‘구 사민주의적’ 정책-공약을 이슈화시켰다.
그러나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2010년 지방선거 이후의 민주당 역시 ‘좌클릭’을 세게 한 상태이다. 정책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 문재인 정부의 ‘2020년 최저임금 1만 원 정책’이 대표적이다. 종합해보면, 노동자 밀집 공업지대를 포함한 영남 지역에서 진보정당의 존재감은 앞으로 더욱 취약해질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
4.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부활할 수 있을까? 1950년 한국전쟁 이후 한국 현대사를 관통했던 3가지 이슈가 있었다.
- 외교·안보
- 경제 성장
- 민주주의
한국 유권자들은 이 3가지 이슈에 대해 항상 반응했다. 심지어 박정희 시대에도.
자유한국당의 대다수와 홍준표는 1번과 3번을 적극 반대했다. 바른미래당 유승민 역시 1번에 대해 반대했다. 그런데 1번과 3번은 문재인 정부에게 ‘가장 유리한’ 이슈였다. 국민적 지지가 가장 높은 분야이다. 그러니까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홍준표와 유승민은 문재인 정부가 가장 유리한 이슈에서 계속 싸움을 했던 셈이다. 참으로 멍청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보수정당이 부활하기 위한 방법은 간단하다. 1번 외교·안보 이슈와 3번 민주주의 이슈에서 ‘민주당과 같은 입장’을 밝히면 된다. 한마디로 ‘me too 전략(=민주당과 같은 입장)1을 취하는 것이다.
경쟁하는 상대 정당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고 모욕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역사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 원래 정치발전이란 경쟁 정당이 주도하는 구도, 아젠다를 수용하고 한 차원 높은 다음 이슈로 넘어가는 것과 동의어이다.
이미 좋은 선례도 있다. 참여정부 시절 반미+분배론을 선호하던 열린우리당의 일부 정치인들과 달리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 1번 외교·안보 이슈에서 한미동맹을 강조하고 2번 경제 이슈에서 분배론이 아닌 성장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바꾼 경우이다. (※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 소득 주도 성장론의 진짜 핵심은 소득 주도가 아니라 ‘성장론’이라는 용어를 수용, 채택한 것이다. 실제로 소득 주도에 상응하는 정책적 일관성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보수정당은 1번 이슈와 3번 이슈에서 민주당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그 대신 문재인 정부의 취약점으로 평가받는 2번 경제이슈에서 ‘전선’을 형성하면 된다.
전략, 전술의 기본 중 기본은 ‘어디서’ 싸움을 할 것인지의 문제이다. 이는 현대 민주주의와 선거 정치로 보면 어떤 논점과 어떤 이슈를 갖고 싸움을 할지의 문제이다. 냉전 반공 시대에는 1번 외교·안보 이슈가 보수정당에게 가장 유리했던 게 맞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1번 외교·안보 이슈는 최소한 당분간은 보수정당에게 ‘가장 불리한’ 이슈이다.
만일 보수정당이 1번 외교·안보 이슈로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면 공격할수록 그것은 스스로를 자해하는 것과 같다. 홍준표, 김무성, 김성태, 나경원, 장제원, 전희경 등이 지난 몇 개월간 ‘민주당 선대위’ 역할을 해준 비결이다. 그리고 이들의 브레인 역할을 해준 집단이 조선일보를 위시한 보수언론이었다. 그러나 1번 외교 안보 이슈와 3번 탄핵-적폐청산 이슈를 민주당에 me too를 하면, 1번-3번 이슈는 중립화된다.
남는 이슈는 2번 경제 이슈이다. 보수정당이 2번 경제 이슈에서 제대로 붙기 위해서라도, 1번-3번 이슈에서 과거와 다른 ‘전향적인’ 입장을 취해야 한다. 아니면 계속 늪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외교·안보 이슈에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찬성하고 민주주의 이슈, 즉 탄핵 및 적폐청산(=박근혜·이명박의 사법처리에 관한 건)에서 찬성 입장을 취하는 것. 그때, 한국 정치와 한국 보수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됨과 동시에 경제 이슈의 양대 축인 불평등과 경제성장을 둘러싼 진보-보수의 생산적 논쟁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민주당과 보수정당은 최소한 55 : 45 수준까지 대등해질 것이다.
원문: 최병천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