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의 진앙이었던 매립지, 역동과 보람의 땅으로 변화시킬 것
최준영(인문학자, ㅍㅍㅅㅅ 객원기자, 이하 최): 서구를 닮았다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어떤 면에서 닮은 거죠?
이재현(인천 서구청장 예비후보): 제 고향은 남도의 변방인 영광군입니다. 영광하면 보통 굴비를 떠올리실 텐데, 그것조차 구경할 수 없는 오지 중의 오지입니다. 환경부에서 기획조정실장(1급 공무원)까지 하고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 사장으로 인천 서구에 왔는데, 서구는 어쩌면 제 고향과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전남의 변방 영광군처럼 서구는 인천의 변방이었으니까요.
최: 단지 변방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리 생각하신 건 아니죠?
이재현: 변방에서 태어난 저는 열심히 공부해서 중앙부처의 공무원이 됐습니다. 서구의 미래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천에서 가장 역동적인 땅으로 거듭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물론 저절로 그리되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서구의 매립지를 가까운 미래에 가장 보람된 땅으로 만들 계획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최: 고향에서 정치를 시작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이재현: 사실 30년 공직에서 물러났을 때 고향에 출마하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마지막으로 봉직했던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가 있는 이 서구에 뼈를 묻기로 결심했습니다. 서구에서라면 저의 경험을 살려 보람된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최: 자연스럽게 출마 동기를 여쭙게 됩니다.
이재현: 수도권 매립지는 갈등의 진원지입니다. 새로운 땅은 선물이라기보다 새로운 갈등의 원인이 되었던 겁니다. 환경문제, 주민 간 반목, 개발지와 원주거지 주민들 사이의 갈등 등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타고난 일꾼이고, 일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 저에게 서구는 맞춤한 지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민들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왔고, 곧 실천할 계획입니다. 특히 저는 현장 구정을 서구의 중점구정으로 삼을 생각입니다. 경청의 힘만큼 큰 힘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경청의 리더십’이 낳은 소통전문가
최: 갈등조정의 경험은 있으신지요?
이재현: 매립지공사 사장으로 발령받았을 때 노조에서 출근 저지를 했습니다.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원인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습니다. 가장 먼저 한 것이 노조와의 대화였습니다. 또한 각급 직원들 간의 반목이 심한 조직이었습니다. 노조뿐 아니라 그 외 직원들 사이에도 편 가르기가 있었고, 저마다 다른 주장을 펼쳤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직원들과 꾸준히 만나 대화했습니다. 결재나 보고도 사장실에서 받지 않고 각 부서로 직접 가서 받았습니다. 직원 중에는 몇 년 근무하는 동안 사장 얼굴을 처음 봤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권위적인 분위기였던 거죠. 오랜 기간 소통 행보를 펼친 끝에 직원 간 갈등이 화해국면으로 돌아섰고, 조직역량이 강화되었습니다. 출근 저지를 했던 직원이 지금은 둘도 없는 저의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저의 자서전 『이재현의 소통방정식』에 나와 있습니다.
최: 소통의 기본은 경청이라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남의 말을 잘 듣는 건 집안내력인가요, 아니면 노력의 결과인가요?
이재현: 아무래도 자꾸 하니까 그게 몸에 밴 것 같습니다. 공직에 있을 때도, LS공사에 근무할 때도 늘 듣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내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겐 다시 말하면 되지만 그의 말을 기억하지 못하면 그에게 다가가기 힘들다고 생각했거든요. 현장 행정의 경험도 거기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을 하기 위해 현장에 가고 담당자의 말을 듣는 것으로부터 일이 시작되니까요. 오랜 기간 경청의 습관을 가졌던 덕분에 소통전문가 이재현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도장 파는 소년, 가수의 꿈 접고 고시준비, 중앙부처 1급까지
최: 집안 얘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어린 시절부터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재현: 정말 지긋지긋한 가난이었죠. 영광군 대마면이 고향인데 영광군에서 가장 낙후된 곳이었습니다. 아버님이 장애가 있으셔서 일찌감치 어머님이 가게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7남매를 낳으시면서 산후통을 앓으셨던 어머니를 돕는 방법은 자식들이 각자 자기 앞가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도장 파는 기술을 배워서 돈을 벌었습니다. 작은 형이 하던 버스표 파는 일을 대신하면서 고향 떠날 때까지 도장 파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광주의 살레시오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그 일을 그만두었고요. 대학에 들어가서는 3번씩이나 휴학을 해야 했습니다. 학업과 돈벌이를 번갈아 해야 했으니까요.
최: 그런 와중에 고시에 합격하셨는데, 공부를 엄청 잘하셨나 봅니다.
이재현: ㅎㅎ 장학금을 받긴 했지만 그다지 공부를 잘했다고 하긴 힘들 겁니다. 다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저는 확실히 노력파입니다. 가난을 벗어나고 싶다는 일념으로 시작했던 고시도 오로지 끈기와 노력으로 통과했고요. 대학 졸업은 1988년이지만 기술고시를 1987년에 합격했습니다. 졸업 후 곧바로 공직에 임용돼 초반에 잠시 체신부(훗날 정보통신부)에서 근무했고, 이후 줄곧 환경부에서 근무해 기획조정실장(1급)으로 퇴임했습니다.
최: 애초 공무원이 꿈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이재현: 어려서는 도장 파서 돈을 벌었고, 좀 더 커서는 가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대학 시절 각종 가요제에 출전하기도 했고 더러 입상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작은 대회였지만 대상을 받은 경험도 있고요. 그러다 문득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 가난한 집안 형편에서 제 꿈만 고집할 수 없었고, 결국 가수의 꿈을 접었습니다.
최: 생활고에 시달렸을 텐데 고시 공부는 어떻게 했는지요?
이재현: 1984년 겨울, 군에서 제대한 뒤 우연히 들른 광주 삼복서점에서 고시 합격생들의 수기집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을 읽으면서 고시 공부 결심을 했습니다. 참 어이없는 계기였죠.
서울 올라와서 불광동 산골 고시촌에 들었습니다. 가장 허름하고 가장 싼 방을 얻어서 생활했고, 한양대학교에 도둑 청강을 하면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87년도에 기술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최: 고위공무원, 특히 기조실장까지 하셨는데 내심 차관이나 장관 생각은 없으셨는지요?
이재현: 기획조정실장 당시는 박근혜 정부 때였습니다. 저는 호남 출신이었고요. 더 이상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故 이태석 신부와의 만남, 부끄러움과 존경의 마음으로 그의 길 따를 터
최: 고 이태석 신부와 인연이 깊으시다는…
이재현: 제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은 이태석 신부와의 만남이었습니다. 2000년 아프리카 유엔본부에 파견근무를 하게 되면서 이태석 신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역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의사의 꿈을 접고 아프리카에 와서 ‘1인 20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저와 닮은 점이기도 했지만 그의 헌신과 봉사의 삶은 저를 몹시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를 사랑했고 존경했습니다.
최: 그런 신부님이 선종하셨을 때 충격이 크셨겠습니다.
이재현: 슬프고 안타까웠지만 되레 슬퍼하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지인들과 뜻을 모아 후원회를 만들었고, 추모카페를 만들었습니다. 제가 주로 연락 일을 맡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후원회장이 되고 카페지기가 되었습니다. 지금껏 수단의 어린이에게 장학금을 보내고 있습니다.
최: 이태석 신부님께 어떤 영향을 받으셨나요?
이재현: 저는 가난을 피하려고만 했습니다. 미워했고 증오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을 보면서 저는 굉장히 행복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부정의 생각을 벗고 범사에 감사하는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줄곧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단 1%라도 이태석 신부님을 닮자. 단 1%라도 그분이 하셨던 일을 실천하면서 살자. 행복은 많이 갖는 것이 아니라 많이 나누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마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우선적으로 돌보는 구정계획 수립
최: 선거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구도는 어떻습니까?
이재현: 여론조사에선 제가 앞서는 거로 나옵니다. 그러나 저는 그걸 믿지 않습니다. 대통령과 당에 의지해 선거 치를 생각 없습니다. 저는 오로지 서구의 미래를 위해 소통전문가 이재현을 선택해 달라고 호소할 것입니다. 저도 선거 구도의 중요성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구도를 넘어서는 소통캠페인을 이어나갈 생각입니다.
최: 이재현 캠프의 전략을 살짝 공개하신다면?
이재현: 특별한 전략이 있는 건 아닙니다. 저는 주로 가난하고 힘든 분들을 만날 것입니다. 선거 기간뿐 아니라 구청장이 된 뒤에서 계속해서 밑바닥 행보를 이어갈 것입니다. 모두에 말씀드렸듯 서구는 인천에서 가장 낙후된 구입니다. 그만큼 경제적 약자가 많습니다. 장애인, 환경미화원, 노조, 소상공인을 우선적으로 돌보는 구청장이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서구의 발전도 중요하지만 서구의 서민들이 더욱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서구를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정치적 과제이며 시대적 가치라고 믿습니다. 저희 캠프의 전략은 오로지 서구민들의 삶을 돌보는 것, 그를 위해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최: 정치 신인다운 패기가 느껴집니다. 그러나 더욱 섬세한 전략도 필요한 것이 선거입니다.
이재현: 물론입니다. 조금 정리해서 말씀드리자면 저의 구상은 이런 겁니다.
- 첫째, 서구의 시대적 가치는 늘 그늘에 있는 사람들, 어렵게 사는 분들을 위해서 어떤 가치 있는 공약을 만들 수 있는가.
- 둘째, 서구민 전체의 삶의 질을 향상할 방안은 무엇인가. 5대 인프라(환경, 교통, 교육, 문화체육, 복지)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 셋째, 도시의 가치, 즉 서구의 가치와 검단의 가치를 어떻게 극대화할 것인가. 구도심 활성화의 방안은 무엇인가.
최: 기본적이면서 가장 중요한 구상인 듯합니다. 연구와 준비도 중요하지만 역시 구민의 의견도 많이 들으셔야 할 듯합니다.
이재현: 소통전문가로서의 경험을 유감없이 발휘할 생각입니다. 부지런히 찾아다니고 부지런히 듣고 부지런히 연구하겠습니다. 특히 저는 표가 되는 곳을 찾기보다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곧 결실을 맺으리라 확신합니다.
최: 서구에 제가 강의했던 미혼모 시설이 있습니다. 많은 표가 나오진 않겠지만 그런 곳도 놓치지 않는 세심한 구정을 펼쳐주시기 바랍니다.
이재현: 반드시 찾아가겠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저는 가난한 마을에서 살았지만 꿈을 잃지 않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미혼모는 물론 사회적 약자들에게 꿈을 만들어주는 서구청장이 될 것입니다. 이 인터뷰를 통해 만천하에 공약합니다. 제가 약속을 지키는 걸 작가님도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