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기업의 CF에도 쓰이고, 수많은 정치가의 발언에도 인용되고, 각종 칼럼이나 기사에도 수없이 인용되는 말 중에 “백조는 물 위에 우아하게 떠 있지만, 물속에서는 쉴새 없이 물장구를 치고 있다”가 있습니다.
하지만 백조는 물 밑에서 쉴새 없이 발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저는 이 인용을 고등학생 때 읽었던 “란마 1/2”이라는 만화에서 처음 봤습니다. 작중의 에피소드 중에 이 이야기를 개그의 소재로 써먹는 것이 나왔었죠. 언젠가부터 이 이야기는 너무 당연하게 사실인 것처럼 여기저기서 인용되고 있습니다.
조류학자가 공식 해명까지 하게 한 백조의 발
하지만 아무리 백조를 관찰해봐도 물 밑에서 발을 격렬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호기심에 백조에 대해서 찾아보자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래의 광고가 나간 뒤, 조류학자로 유명한 윤무부 교수의 홈페이지에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문의가 많아서, 윤무부 교수 측에서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님을 공식적으로 해명한 일도 있었습니다.
위 동영상을 보면 오히려 백조는 물 위를 날갯짓하면서 빠르게 움직일 때만 발을 부산하게 움직이고, 물 위에 떠 있을 때는 딱히 발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건 발을 부산하게 움직일 때 수면에 쉽게 파문이 생기는 것을 통해서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물 위에서의 움직임도 그다지 우아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백조를 촬영한 이 영상도 후반부를 자세히 보면 거의 양쪽 발을 반쯤 물 밖으로 내놓고 떠다님에도 불구하고 발을 격렬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야기의 출처는 만화 <거인의 별>
이것은 말하자면 현대의 우화 혹은 도시전설인 셈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원전이 대체 무엇인가가 궁금해졌습니다. 조금 찾아보니, 이 이야기는 이상할 정도로 일본과 한국의 텍스트에서만 눈에 띄고, 서양의 창작물에서는 나올법한 곳에서도 전혀 인용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조금 우습게도 일본의 유명 야구 만화인 <거인의 별>에 나왔던 대사입니다. 거인의 별에 등장하는 강타자 “하나가타 미츠루”가 범인인 자신이 강타자가 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나는 노력을 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대사가 이 이야기의 원전입니다. 일본어 위키피디아에도 이 이야기의 원전이 거인의 별이라는 내용이 게재되어 있을 정도로 일본에서는 이미 이 이야기가 도시전설임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거인의 별은 1966년부터 1971년까지 주간 소년 매거진에 연재된 야구 만화로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져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의 일본 사회 전체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인기 만화입니다. 당연히 이 만화를 보고 자란 전후 1세대들(50년대 이후 태생)에게 이 대사는 강한 인상을 남겼고, 이후엔 “어디에선가 들었던 이야기”가 되어서 50년대 세대들이 만들어낸 텍스트에 많이 인용됐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거인의 별이라는 작품을 실제로 본 적이 없는 1970년대 이후 세대들에게 도시전설로 널리 퍼지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나게 노력하라”는 보편적인 교훈을 담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게 된 것 같습니다.
우익 만화가의 영향으로 명대사로 남은 백조 이야기
이렇게 어디선가 들은 우화였던 백조의 물장구는 1990년대 중반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가 연재한 만화 <신 고마니즘 선언>에 소개되면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신 고마니즘 선언’은 일본의 각종 사회운동을 비판하고 종군위안부를 부정하는 식으로 90년대 후반부터 형성된 넷우익의 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넷우익들의 그럴듯해 보이는 주장의 상당수가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저서들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거인의 별을 그린 카지와라 잇키는 우편향적이고 남성중심주의적인 성향의 만화를 위주로 작품활동을 했고, 고바야시 요시노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신 고마니즘 선언에서 카지와라 잇키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인정하며 그 예시로 “백조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물속에서 필사적으로 발로 물을 차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하나가타 미츠루의 대사를 인용합니다. 이후로는 인터넷을 중심으로 이 우화가 더 널리 퍼지게 됩니다.
이렇게 잘못된 지식이 인터넷에 의해 상식처럼 널리 퍼지던 것이 수정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시 인터넷에 의해서입니다. 해당 대사가 소개된 신고마니즘 선언에는 분명히 그 문장이 작중 캐릭터의 대사임이 언급되면서 “카지와라 잇키에게는 참 많이 배웠다”고 써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우화를 퍼나르는 사람들 중에 신고마니즘 선언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인용된 책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들에 의해서 문제 제기가 시작됐고, 이것이 위키피디아에도 게재됩니다. 2000년대 중반에는 이러한 집단지성에 의해 수정된 정보가 보편화 되면서 이 이야기가 본래는 만화에 나온 대사였음이 일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연원을 알 수 없는 현대 우화로…
카지와라 잇키가 왜 그런 대사를 생각해냈을까에 대해서는 각종 ‘…카더라’가 난립합니다. 하지만 카지와라 잇키 본인이 이 우화가 도시전설화 되기 훨씬 전인 1987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가장 그럴듯하다고 여겨지는 가설은 ‘발레 유래설’입니다. 차이코프스키의 발레극 ‘백조의 호수’는 일본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가장 널리 알려진 발레 공연이었는데, 이 작품에서 오데트의 춤을 자세히 보면 상반신은 매우 우아하게 움직이지만, 발은 총총걸음으로 매우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카지와라 잇키가 이 발레의 움직임이 본래 백조의 모습을 본따서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해 그러한 대사를 만들게 되었다는 가설입니다.
상당히 그럴듯하지만 사실 여부는 당사자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확인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CF에서 사용한 기업은 이 이야기가 사실은 도시전설이고, 그나마 그 원전도 1960년대의 일본 야구만화에 나온 대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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