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필리버스터에서 눈물을 흘린 이유
리(이승환 ㅍㅍㅅㅅ 대표): 국회의원 기간 동안 유명했는데, 이에 대해 설명 좀 해주십시오.
강기정(광주광역시장 예비후보): 장소는 국회, 시기는 MB정부와 박근혜 정부 8년간 있었던 일입니다. 절대다수의 힘으로 4대강 예산안 날치기, 종편 날치기를 하고, 국정원 대선 부정 여직원을 보호했어요. 저에게 씌워진 여러 나쁜 이미지, 다 국회에서 MB정부, 박근혜 정부의 일방처리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부당함에 대한 저항이었죠.
리: 그 분들과 실제 관계는 어떤가요?
강기정: 다 달라요. 차명진 의원 같은 경우는 관계가 나쁘진 않죠. 생각은 많이 다르지만… 또, 다른 의원은 악수도 안 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요.
리: 그래도 결국은 공천배제당했습니다.
강기정: 그런 일도 있었고, 친노… 친문… 그렇게 공천배제당했죠.
리: 이제 친노–친문의 전성시대라는데 축하드립니다(…) 공천배제 때 기분은 어땠나요?
강기정: 이걸로 내 정치 인생을 사실상 그만하는갑다… 왜냐면 호남에선 공천 못 받으면 정치 인생이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 수도권은 공천 못 받아도 4년 뒤에 또 기회를 보면 되는데, 광주-호남에서는 다른 사람이 바로 그 자리 들어오며 끝나는 거죠. 나름 12년간 정의롭게 성실하게 잘 한 것 같은데, 타의에 정치를 멈추게 되는 게 참 아쉽다… 그런 마음이었죠.
리: 필리버스터 때 스타로 등극했습니다. 눈물까지 흘렸는데, 어떤 회한이 있으셔서…
강기정: 제가 8년 내내 날치기 저지하고 싸웠잖아요. 국민들에게 강기정은 손가락질당하고 낙인 찍혔는데… 필리버스터처럼 이야기하고 대화하고 이럴 기회가 한 번도 없었어요. 저 혼자 5시간 6분 이야기했는데, 국회가 이럴 수 있었다면 왜 싸웠을까요? 그동안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이나 이런 걸 위해서 싸우거나 한 적이 없어요. 오직… 옳지 않은 것을 바로잡기 위해 강한 모습만 보였는데, 이것 때문에 내가 공천에 탈락한다? 나에게 토론의 기회, 대화의 기회, 소통의 기회가 있으면 왜 싸웠을까? 그런 회한이 몰려온 거죠.
리: 그때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 건 어떤 의미였죠.
강기정: 이건 노래가 아니라 그냥… 저로 보면 철든 이후 삶의 전부였습니다. 예를 들면 감옥에 있을 때 혼자 독방에서 외롭죠. 책도 맘대로 못 봅니다. 성경, 사서삼경, 이런 책만 접할 수 있죠. 모든 게 통제되고 고립되고 혼자만 있을 때, 자기 스스로 극복하고 이겨가는 유일한 방법이 노래였어요. 그중에서도 임을 위한 행진곡은… 빠르게 부를 때, 느리게 부를 때, 처량하게 부를 때, 힘 있게 부를 때, 가사를 바꾸어 부를 때… 저 스스로를 더 강하게 만들었던 삶의 한 요소였죠.
모범생의 인생을 바꾼 5·18
리: 아무튼 이미지는 저격수니… 학교 다닐 때도 강경한 편이셨나요.
강기정: 어릴 때는 완전 모범생이었어요. 우리 집이 거금도(금산)라고 소록도 앞 작은 섬이었어요. 나름 그때는 섬에서 제일 잘 살았어요. 그리 가난하진 않아서 어려움 없이 순탄하게 공부만 했죠.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광주 대동고에 입학합니다. 그때만 해도 섬사람, 섬놈이었고 광주는 도회지… 그래서 더 주눅 들어서 공부만 했죠.
리: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5.18이…
강기정: 그렇죠. 고2 때… 우리 광주 대동고가 휴교령 내린 전국 최초의 학교였어요. 선생님들 중에서도 해직된 분들이 많았죠. 박석무 선생님, 윤한봉 선생님, 박행삼 선생님… 앞장서서 시위하시다가 구속되고 해고당하고… 박석무 선생님은 직접 정약용 선생 책 번역해서 애들한테 올바로 사회를 보라고 하신 분이었는데…
리: 선생님들이 애들보고 시위 나오라고도 했나요?
강기정: 그건 아니고… 당시 광주 대동고는 뭔가 문화가 형성됐다 해야 하나… 전국 최초로 휴교령 내려진 것도 고등학생들이 워낙 시위해서 그래요. 그 5.18 영화 중에 〈화려한 휴가〉 있잖아요. 거기 전경들이 교문 막는 장면이 광주 대동고 모습이에요. 막으니까 애들끼리 뒷산 넘어서 뛰어다녔죠.
리: 말이 뛰어다녔지, 도망간 것 같은데요-_-?
강기정: 그렇죠… 그땐 아직 다들 애였으니까… 근데 21일인가? 고3 선배 한 분 죽고… 전영진 선배라고… 또 제가 좋아하는 선배들 여럿이 구속당하고… 다들 난리도 아니었죠. 고등학생은 산수동 오거리 나오고, 대학생은 전남도청 나오라고 방송 나오고… 다 나가서 시위하고…
리: 기억나는 일이 있다거나…
강기정: 그날이 5월 22일이었나? 제가 삼립식품 빵을 배달하는 역할이었어요. 근데 갑자기 차에서 다 내리라고 해요. 왜냐 했더니 바로 앞에 사상자가 있어서 태우기 위해서라 하더라고요. 그 길로 집에 터덜터덜 걸어갔더니, 얹혀살던 큰 형님한테 잡힌 거죠. 형님은 학교 선생님이니까 학생 지도하는 생각에서 절 못 나가게 했죠.
리: 그리고 곧 피바람이 몰아쳤죠. 이후 고등학교 생활은 좀 바뀌었나요?
강기정: 그렇진 않았어요. 이내 고3 됐고 공부했죠. 대학 가려고…
스무 살, 인생이 바뀌어 감방에 갇히기까지
리: 대학은 전남대 잘 갔고… 그때부터 무슨 변화가 있었나요?
강기정: 제가 어릴 때 모범생이라 했잖아요. 사회성을 좀 키워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러려면 사람 많이 사귀고 웅변도 좀 해야겠다… 그러다 보니 소위 말하는 학회, 서클에 든 거죠. 사회조사연구회라는 이름이었는데, 어느 날 박관현 열사가 온다는 거예요. 얼굴도 모르는 서클 선배였는데 이 분이 교도소에서도 5.18 진상규명을 외치며 단식하다가 전남대 병원에 온 거예요. 그리고 이내 돌아가셨죠. 10월 11일 날 운명하셨는데, 그때 시신 지키면서 경찰들과 싸우다가 최초로 경찰서에 끌려갔어요. 그때부터 급격하게 인생이 변했죠.
리: 20살에 무섭지 않던가요?
강기정: 제 딸이 이제 대학 3학년인데 정말 어리게 보여요. 내가 저 나이에 어떻게 용기가 냈을까, 내가 세상을 알고 저런 주장을 했을까… 어쨌든 지금 생각하면 대단했던 것 같아요. 요즘 촛불 드는 대학생들 봐도 여전히 대단하다는 생각 들지만… 제 대학생활은 전체가 5.18 진상규명, 전두환-노태우 처벌… 이런 시대정신,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겠다는 정신… 그것밖에 없었어요.
리: 그리고 그 훌륭한 정신으로 깜빵에 갑니다.
강기정: 근데 저는 좀 억울한 게, 서울은 실제로 미문화원 점거 농성을 했고. 우리는 실패했어요. 점거 농성이 아니라 점거하기 위한 계획만 세우다가 미수에 그친 거예요(주: 전남도지사에 출마한 신정훈 후보는 실제 점거했다 깜빵에 갔다).
리: 근데 왜 깜빵 간 거죠?
강기정: 그때 제가 삼민투위원장이었는데, 늘상 5.18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미국은 전두환 어떻게 배후조정했는지 밝혀라… 이런 일을 했죠. 이게 국보법, 집시법에 걸리고, 심지어 돌멩이랑 화염병 던진 게 경찰차 맞은 건, 방화, 폭력… 이런 거로 간 거죠.
리: 감옥 갈 건 알고 있었죠?
강기정: 그렇죠. 각오했지… 그런데 몇 년 살 줄 알았지, 17년 구형에 8년 형 받을 줄은 몰랐죠. 아니, 내가 무슨 죽을죄를 지었다고…
리: 차이가 너무 큰데요(…) 깜빵 생활은 어떠셨나요?
강기정: 첫날 기억인데… 0.75평이면 발 겨우 뻗고 옆에 몸이 막 닿는 사이즈에요. 벽은 시멘트, 바닥은 마루… 겨울철 습기로 벽 타고 물 주르륵 흐르고, 창문은 막혀있고 위에 24시간 백열전등… 여기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대체 그 좁은 공간에서 운동하는 15분 외에 하루 24시간 어떻게 있냐…
리: 어떻게 버티셨어요?
강기정: 근데 적응이 되니까 그 공간이 너무 넓게 보이고, 그 공간이 너무 아늑하고… 놀라운 인간의 적응력인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가석방될 때까지 3년 7개월을 독방에 살았어요. 미결수 때 광주교도소에서 1년 있다가, 안동교도소 갔다가, 대전교도소, 대구교도소, 원주교도소, 서대문구치소, 마지막 진주교도소에서 출소하게 되죠.
리: 왜 그렇게 뺑뺑이 돈 거죠?
강기정: 제가 감옥 안에서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어요. 재소자 처우 개선 투쟁을 했죠. 80년대가 얼마나 먹는 거, 인권 문제가 심했겠어요? 재소자에게 인권을 보장하라고 맨 앞에 선 저를 고통스럽게 하는 게 이감이었죠. 잘살고 있는 사람을 낯선 곳으로 이감시키면 엄청나게 힘들거든요. 아무튼 그 당시 양심수가 22명 있었는데, 87년 직선제 확정됐을 때 저랑 민병두 의원 둘이만 못 나가고 나머지는 다 나갔어요.
리: 왜 둘만 남았죠?
강기정: 찍혔겠죠. 결국 1년 뒤에 나갔습니다.
아내와의 만남, 그리고 정치의 시작
리: 그 사이에 여자친구와 헤어진 건 어떤 일이었습니까?
강기정: 선고를 세게 받았죠. 15년… 그러니까 6개월 만에 면회가 끊긴 거죠. 그다음부터는 어머니가 주로 왔어요. 그때 어머니는 늘 한숨이었겠죠. 한겨울에도 방에 불을 안 때고 주무셨다고 하더라고요. 아들이 추운 데 있는데 어미가 어떻게 따뜻한 방에 잘 수 있냐며…
리: 그런 훌륭한 어머니께서 정신 차리라고 안 하던가요…
강기정: 오히려 어머니가 투사가 됐어요. 민가협이라고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가 있어요. 민주화 운동 하다가 구속된 자식들을 둔 어머니들 모임이었어요. 거기 운영위원으로 엄청 열심히 일했어요. 내 아들을 위해 내가 싸우겠다, 아들이 못 싸워도 어머니가 싸우겠다… 그게 대한민국의 양심수 어머님들의 모습이셨죠. 출소하는 날 같이 민주화 운동 한 친구들이 버스 대절해서 어머니 모시고 오고…
리: 효도하셔야겠군요.
강기정: 어머니가 올해 아흔아홉인데… 제가 2년 전 독일 떠날 때 22년 모시던 어머니를 누님께 보냈는데, 돌아오니까 치매가 오셨더라고요. 저랑 있을 때는 엄청 활달하셨는데, 지금은 요양원 계시죠.
리: 빵을 나오시고서는 무얼 하셨습니까?
강기정: 졸업까지 1년이 남아 있었어요. 고민했죠. 졸업하고 내가 뭘 해야 하지, 어떻게 살지… 그러다가 새날청년회라는 청년회를 만들어요. 제가 감옥에 있을 때 정말 어린 청년들이 감옥을 많이 들락날락했어요. 19살, 20살… 그때 제 나이도 24~25살이었지만, 더 어린 젊은 청년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했죠. 그래서 책 좋아하는 사람은 책 읽고 토론하고, 노래 좋아하는 사람은 노래 만들어 부르고… 풍물, 등산, 역사기행 등 여러 분야를 다뤘죠.
리: 일종의 문화 운동인 건가요?
강기정: 요즘이야 정말 다양한 문화가 있지만, 그때만 해도 문화라 할 게 얼마 없었죠. 청년들이 문화적 활동 하면서 사회적 깨우침 얻고 자연히 민주화운동도 접하게 됐죠. 지금으로 말하면 NGO, 시민단체지만 그때만 해도 재야운동이라고 했어요. 계속해서 5.18 진상 규명을 외쳤고, 결국 전두환이 법정에 서게 됩니다.
리: 운동만 하고 돈은 없었을 텐데 결혼은 어찌 한 거죠?
강기정: 빵에 가며 첫사랑에 실패하고(…) 석방 후 만난 아내가 정말 똑똑해서 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저 때문에 공부를 접게 됐죠. 전남대 축제에 맞춰서 둘이 결혼하려고 청첩장 돌리고 있는데, 그 당시 안기부 국정원에서 결혼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이제 와서 식을 취소할 수는 없으니 강행했죠. 그런데 결혼식 1주일 앞두고 옛날 건수로 아내를 갑자기 구속을 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고시 준비는 망하고(…) 그 뒤로는 거의 제 수석 보좌관… 저와 함께 정치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리: 나름 성공적인 시민운동을 시작하고서, 어쩌다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겁니까?
강기정: 그렇게 사회민주화운동, 5.18 진상규명을 오래 해온 어느 날, 법과 제도를 바꾸는 투쟁을 통해서 사회를 더 혁신시킬 수 있겠다, 변혁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98년 같이 운동하던 사람들하고 섬진강 압록에 모여서 이야기했죠. 제도정치에 나가서 사회를 바꿔야겠다고.
리: 일반적으로 운동권에서 현실정치로 들어오는 건, 이미 현실정치 들어온 선배들이 픽하는 거 아닌가요?
강기정: 우리 같은 386 대부분이 그렇게 영입됐죠. 새 피가 들어온다고 수혈이라고 불렀죠. 우상호, 임종석, 원희룡, 다 그 케이스죠. 그런데 호남은 달라요. 호남은 숙명처럼 수혈 대상이 아니에요. 여기는 늘 정치 예비군이 많으니까요. 저도 현장에서 몸으로 도전하며 시작했죠. 그래서 같은 386 운동권 출신 국회의원들과 호남 쪽 국회의원들은 좀 결을 달리한다고 서로들 이야기하죠. 호남은 바닥에서 올라간 사람들이니.
쉽지 않은 정치 인생: 2연속 낙마, 개혁당 해산, 열린우리당 해체…
리: 하지만 그 현실정치에서 2연속 낙마를 합니다.
강기정: 호남에도 강고한 민주당 기득권이 있었죠. 제가 떨어진 2000년, 2002년 당시에는 민주당이 좀 구태스러웠습니다. 물론 저도 거기에 저항하다 두 번 떨어지고 느꼈죠. 정치는 정당을 통해서 해야겠다, 정당을 만들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게 개혁적국민정당이죠. 개혁당 만들겠다고 홈페이지에 글 올리고, 이런 과정에서 당시 같은 생각한 유시민과 함께하게 되죠. 그렇게 개혁당이 우리 둘과 함께 시작됐습니다.
리: 하지만 그 개혁당은 얼마 못 가고 망하지 않았습니까?
강기정: 망한 게 아니라 개혁당이 열린우리당 만드는 데 일조한 거죠. 개혁당과 민주당 다수파가 만나서 열린우리당이 됐으니까요. 물론 그 열린우리당이 오래 못 가고 좌초한 건 사실입니다.
리: 덕택에 2004년 무려 6선 김상현 의원을 제치고 국회의원이 되죠.
강기정: 그것 때문에 제가 대단하다는 이야기 듣는데, 솔직히 그때는 이미 구태의 벽이 대통령 탄핵으로 사라졌습니다. 이미 시대는 변화하기 시작했던 거죠. 그 변화를 못 읽었던 사람들이 탄핵을 주도했던 거고요.
리: 말씀 들으니 친노, 열린우리당이 호남 민주당의 구태를 바꾼 세력이라 보시는 건가요?
강기정: 시대의 큰 흐름으로 볼 때는 열린우리당은 시대정신 반영한 정당이었죠. 그런 정당이 2008년, 4~5년 만에 문 닫은 건 참 아픈 일이었죠.
리: 열린우리당은 왜 그렇게 빨리 무너졌을까요?
강기정: 여러 가지로 볼 수 있겠지만 결국 정당의 허약함 같아요. 정당은 정권 창출의 주역, 주체가 돼야 해요. 대통령은 정당에서 파견한 사람이죠. 그런데 대한민국 정당은 늘 헤쳐모여만 반복해요. 그러니 대통령이나 지방자치단체장이 늘 정당 위에 있는 식이죠. 정당의 허약함… 이 때문에 열린우리당이 망하게 된 거죠.
리: 지금 생각할 때 노무현이란 인물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강기정: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고 도전하는 사람. 도전… 제가 쭉 ‘도전정신’을 거의 모든 커뮤니티의 ID로 썼는데, 노무현 대통령은 원칙적이면서 자기를 버리고 도전하는… 그런 분이었던 것 같아요.
리: 김대중, 문재인 대통령과 비교한다면…
강기정: 복잡하죠.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오랫동안 저항과 준비의 과정을 거친, 완전히 성숙되고 준비된 대통령이었죠. 간난신고를 거쳐서 준비해온 대통령이었어요. 노무현 대통령은 매우 도전적이고 원칙적이면서도, 변화에 강한 도전정신 가진 분이었고요.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오랜 시간 모든 내공을 하나하나 면면히 쌓아놓았던 준비된 대통령… 이런 차이가 있는 것 같네요.
리: 그래도 첫 국회의원 시기를 함께 했는데, 서거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이 무거웠겠습니다.
강기정: 저는 그때 남아프리카공화국 가던 길 비행기 갈아타기 위해 이집트에 있었어요. 마침 제가 묵게 된 숙소가 과거 노무현 대통령이 묵었던 숙소란 이야기를 들었죠. 그런데 잠시 눈 붙이고 나니 전화벨이 미치도록 울려서… 숙소에 온 지 2시간 만에 서거 소식을 들었죠.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모든 일정을 중간에 관두고 귀국했죠.
충격의 공천배제: 그래도 민주당에 남은 사나이
리: 다시 광주 이야기를 해보죠. 슬로건이 지나치게 문재인 마케팅 아니냐는 비판이 있습니다.
강기정: 제가 문재인 대선후보의 종합상황실장을 맡았어요. 특히 광주전남분야는 상황실장 신분으로 한전공대 유치, 에너지밸리 확대 등을 공약에 넣었고요. 5.18 민주화운동 정신을 헌법에 넣자고 한 것도 제 주장입니다. 이처럼 제 공약으로 광주 발전을 이뤄보겠다, 나라는 국민과 함께 문재인이 바꾸듯이, 광주는 광주시민과 함께 강기정이 문재인 정부 공약을 이행시켜보겠다. 이런 의지의 표현이에요.
리: ‘민주당 지킨 사람 광주를 바꿀 사람’의 뜻은?
강기정: ‘민주당 지킨 사람’은, 대부분 사람이 공천배제되면 당 떠나고 당과 맞서요. 저도 2년 전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일 때 마음이 안 좋았죠. 그래도 당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민주당이 내게는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민주당 지킨 사람으로 남았죠. ‘광주를 바꿀 사람’은 광주는 지금 변화를 요구하고 있어요. 그렇기에 더 큰 광주로 만들 큰 구상과 강한 추진력 가진 사람이 바로 강기정이다. 이런 의미입니다.
리: 공천배제됐을 때 민주당 나가고 싶지 않았습니까?
강기정: 나가고 싶다 아니다가 아니라 너무 억울했죠. 사실 그런 일을 당하면 누구나 다 억울한 점이 있습니다. 고민했죠. 나가냐 마냐가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본 거예요. 내가 왜 공천배제당했지? 나는 당을 나갈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탈당 바람 불고 국민의당으로 다 떠나가는 사람들은 대체 뭐지…
리: 그래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습니까?
강기정: 그러고 있는데 아내가 이러는 거예요. “여보, 당신이랑 같이 민주화 운동 했던 많은 80년대 동지들이 죽거나 고문당하거나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사라지지 않았냐? 아직도 목구멍이 포도청인 채 사는 사람 많지 않소? 당신은 운 좋게 국회의원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 했는데, 뭐가 더 아쉽고 뭘 더 보상받고 싶어서, 당신에게 공천 주고 국회의원 만들어줬던 그 민주당과 맞서려 하냐. 당신 지금 50대 초반에 돌뿌리 걸려 넘어졌는데, 그간 소진된 열정과 에너지 채워야 할 거 아니냐. 배워야 할 거 아니냐. 지금 당신은 당장 죽어도 호상이다.”
리: 논리왕인데요(…)
강기정: 대부분 사람 그런 일을 당하거나 공천 못 받으면 주변에서 당과 싸우라고 해요. 붙으면 이길 수 있다고 주변에서 막 부추기죠.
리: 님도 국민의당에서 엄청 오라고 그러지 않았음?
강기정: 저는 뭐 처음부터 유일하게, 어떤 사람도 국민의당에서 콜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아니까. 강기정은 오라고 그런다고 오는 사람 아니라는 거 다 아니까…
리: 친문이라서요?
강기정: 그건 둘째치고(…) 강기정은 원칙과 소신의 정치인이란 거죠. 전 예전부터 탈당하거나 이런 거 혐오했어요. 최근 경선에서 탈당자 감점 주는 것도 옳다고 보고요.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고, 당연히 당의 정체성, 당의 규율을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리: 그래서 공천배제된 후 무얼 하셨습니까?
강기정: 공부하러 독일에 갔어요. 제 전공도 전기과고 한전의 이전에도 기여했으니, 독일의 기업과 에너지 정책을 배우러 갔죠. 베를린자유대학에서 7개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다가 갑자기 탄핵으로 대선이 빨라져서, 문재인 후보가 빨리 들어와 달라 해서 귀국했죠.
리: 베를린 가서 뭘 배웠나요?
강기정: 기업을 많이 다니며 주로 에너지 정책과 기술을 공부했죠. 탈원전, 신재생 에너지, 4차산업혁명에 따른 제조 강소기업… 독일은 어떻게 하기에 이런 일자리와 산업이 유지되는지를 현장에서 배우려 노력했죠. 에너지 기업 방문하고 독일 정치인 만나고 현장 전문가들도 보고…
리: 사실 호남은 일자리 사라지고 젊은 인재 유출되는 상황이니 정말 쉽지 않아 보입니다…
강기정: 제가 대선을 치르고 광주에 내려와서 39주째 중소기업 현장을 보고 있어요. 여러 공단의 중소기업을 죽 방문하면서 느낀 게… 중소기업이 강소기업으로 커지지 않으면, 즉 기술에 의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키우지 않으면 경쟁력을 잃게 되겠단 생각이에요. 광주는 기아차, 금호타이어 정도 빼면 대기업이 별로 없어요. 기아차야 친환경 등 업그레이드가 되겠지만, 당장 금호타이어부터 어렵잖아요. 결국 있는 일자리도 지키기 힘든 게 현재 대한민국이고 광주에요. 새로운 일자리는 복지 서비스와 혁신적인 스타트업 벤처에서밖에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해요.
리: 글쎄요… 미국 벤처는 다 샌프란시스코에 몰리고, 한국도 강남 판교에 몰려 있죠. 호남권에서 가능할까요?
강기정: 이를 위해 2,000억 혁신 펀드 만들겠다고 공약했어요. 모태펀드 제도를 통해 30%에 해당하는 600억을 모으면 정부에서 1,400억을 지원하게 돼 있어요. 금융기관이나 기업의 참여를 충분히 이끌어낼 수 있다고 봅니다. 요즘 투자처를 못 찾는 돈이 많아요. 주식으로 가긴 그렇고 부동산 가긴 더 힘든… 그런 굴러다니는 돈을 혁신, 크라우드펀딩으로 모아야 하죠.
어쨌든 강기정이 이긴다, ‘강기정답게’
리: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사실상 2파전인데, 상대 후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기정: 이번에 단일화를 했잖아요. 8년간 현장 행정을 해왔던 민형배, 최영호라는 강력한 풀뿌리정책의 소유자들과 12년 중앙정치를 해온 원칙과 소신의 강기정이 만났습니다. 최영호의 최, 강기정의 강, 민형배의 민을 따고, 주인인 광주시민의 의미를 담아서 ‘최강 민주 단일 후보’라고 이름 지었죠.
리: 이름 구린데요(…)
강기정: 아무튼(…) 이용섭 후보의 명성과 스펙 때문에 여전히 묻지마 지지가 있는 건 사실입니다. 이용섭 후보가 정말 뛰어난 사람이란 것도 인정하지만, 전 그분이 가지지 못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단일화로 함께한 진짜 지역전문가, 또 하나는 시대정신을 지키며 살아왔다는 자부심과 일을 반드시 이뤄내는 추진력이죠.
리: 시대정신?
강기정: 이용섭 후보는 시대정신에 역행한 이력이 있죠. 똑같이 공천배제당했는데 그분은 탈당했고 전 안 했죠. 또 제가 5·18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위해 삼민투위 활동하다 구속되어 3년 7개월 징역을 살 때, 이용섭 후보는 논란되고 있는 것처럼 전두환 청와대의 비서가 돼서 일했죠. 한쪽은 전두환 잡아서 책임을 묻자고 할 때, 한쪽은 전두환의 비서가 돼서 일했다… 이건 명백한 차이라고 봅니다.
리: 뭐, 선거에서 네거티브는 당연하지만… 전두환 밑에서 일한 게 현격한 흠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강기정: 이번 선거는 촛불혁명 이후의 첫 시장 선거예요. 그것도 광주시장이죠. 서울시장, 인천시장과 다릅니다. 지금 광주는 5·18 정신을 헌법에 넣는 상황에 처해 있어요. 과거 무슨 일 했는지는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다르니까, ‘절대 안 돼’라는 건 존재하지 않죠. 장관 할 수 있고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 다 할 수 있죠. 그러나 막 5.18 진상 규명 요구가 불타오르던 85년~87년 6월까지 전두환 비서를 했다는 건, 촛불혁명 이후 첫 광주광역시 시장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봅니다.
리: 경선 지면 이용섭 후보 지지하고 함께할 겁니까?
강기정: 당연히 경선에서 제가 이깁니다.
리: 질 수도 있잖아요?
강기정: 이깁니다.
리: 그래도 지면(…)
강기정: 안 집니다(…)
리: 아니, 지금 여론조사 밀리면서(…)
강기정: 여론조사야 그럴 수 있죠. 하지만 민주당을 사랑하거나 당원이거나, 이런 분들 지지는 제가 훨씬 높습니다.
리: 혹시 떨어지면 은퇴할 겁니까?
강기정: 무슨 은퇴입니까. 새로운 광주 변화 노력해야죠.
리: 정치 오래 했는데, 쉬고 싶지 않습니까?
강기정: 올해 54밖에 안 됐어요. 제가 늘 강조하는 게 도전정신이죠. 제가 신영복 선생님을 참 좋아하는데, 선생이 노신의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오르거라”를 인용하잖아요. 저도 늘 후진 양성하고, 커나갈 사람 뒷받침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언제든 꼭 할 생각이에요.
리: 마지막 질문. 인생에서 자기 자신이 젤 멋져 보였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강기정: 글쎄요… 컷오프 이후 모든 걸 버리고 독일로 떠날 때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후련히 독일로 가기로 결정할 때… 그때가 젤 나이스했던 잘했던 것 같아요. 강기정답게.
리: 그렇다면 시장이 된다면 ‘강기정답게’가 뭘까요?
강기정: 여러 가지인데 약속을 지키는 게 아닐까 싶어요. 수많은 사람과 이렇게 하겠습니다, 저렇게 하겠습니다… 이랬던 그 약속을 어떻게 지키는가. 옆에서 지켜보니 문재인 대통령의 장점 중 하나가, 약속한 건 지키려 하는 겁니다. 저 역시 스스로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란 생각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데이터 시각화로 알아보는 ‘광주광역시’
“해당 기사에 사용된 데이터 시각화는 뉴스젤리의 시각화 솔루션 DAISY를 이용하여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