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당하지 않고 당을 지킨 남자
리: 아무튼 유명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쩌다가 전남 도지사에 출마하시게 되신 건가요?
신정훈: 이개호 의원님이 지금 전라남도의 유일한 민주당 국회의원이에요. 다른 분들이 다 안철수 바람에 총선 낙방해 버렸으니… 저도 도지사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당연히 우리 당 대표선수는 이 사람이라 생각했죠. 그런데 한 석이 아까운 상태여서, 중앙당에서 이개호 의원님께 좀 양보해 달라… 이렇게 한 거죠. 이개호 의원님이 선당후사의 결심을 내려주셔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출마 결정을 하게 됐습니다.
리: 그러고 보니 후보님도 그때 탈당했으면, 국민의당 소속 국회의원이 되어 있을 텐데, 왜 탈당하지 않은 겁니까(…)
신정훈: 문재인을 믿었죠. 호남 정치인들이 엄청 자기 기득권 챙기려고만 해요. 2014년 문재인 당대표 시절 정당혁신방안이 나왔어요. 소위 김상곤 혁신 안이죠. 이 안의 이 핵심은 선출직 공직자도 평가해서 공천하겠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호남 정치인들이 ‘저건 우리를 죽이려 하는 거다’, ‘무슨 놈의 국회의원이 학생도 아닌데 시험 봐야 되냐’, ‘선출직 공직자 평가제도 없애라’, 그러면서 탈당한 거죠.
리: 그리고 그들은 국회의원이 되고, 님은 백수가 됐습니다(…)
신정훈: 아니, 국민 세금 먹는 국회의원인데 당연히 평가받아야죠. 이게 공복으로의 국민인 정치인으로서의 자세지… 일 잘하면 당연히 통과되는 건데, 평가 안 받겠다? 그건 자리를 거의 개인의 사유물로 보는 거죠. 전 문재인의 혁신안과 비전에 동의했고, 탈당하지 않은 것뿐이에요.
리: 문재인 대통령과 꽤 가까운 사이인가 보군요(…)
신정훈: 문재인 대통령이 생각하는 비전에 공감한 거죠. 지금은 대통령까지 됐지만, 한때 인기가 5%까지 떨어졌을 때도 언젠가는 국민이 알아줄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전남 지역 모든 정치인이 탈당 고민할 때, 저만은 전혀 고민하지 않았어요. ‘탈당 신정훈’, 이렇게 검색해 봐요. 한 건도 안 나온다. 다른 후보들 검색하면 다 탈당 기사 나와요. 탈당을 진지하게 고민한 거죠.
리: 뭐, 다 나갔으니 기사 뜨겠죠…
신정훈: 민주당 안 나간 정치인도 마찬가지에요. 실제 나가진 않았지만, 심각하게 탈당 고민했다. 이번에 제 경쟁상대 후보도 마찬가지였고요. 탈당하려고 보니 다시 민주당 지지율 올라가서 남은 사람들이 많죠.
리: 그때 호남홀대론이 거세긴 했죠…
신정훈: 저는 민주화 이후 가장 큰 프로젝트를 참여정부의 균형발전정책이라 생각해요. 공공기관 이전. 그때 가장 큰 공기업 한전이 광주전남에 들어왔죠. 저는 오히려 호남 정치인이 자기 역할 못 했다고 봐요. 어떤 정치인이든 정권을 통해 자기 자신의 입지 생각하는 건 당연지사에요. 하지만 동시에, 자기 지역 발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지역 의원들이 별로 자기 지역에 관심이 없어요. 지금은 민주당이 전국정당이 됐지만, 호남 의원들은 정말 기득권이었죠. 이제 그들이 다 탈당해서 다행이고요.
리: 문재인의 핫라인이라 우기는데, 솔직히 좀 없어 보인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문프 지지율이 워낙 높다 보니 거기 기대는 거 아닌가…
신: 도지사는 전남의 발전을 책임지는 자리이자,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를 완수하는 자리에요. 제가 이번 대선에서 광주전남 국정과제를 직접 만들었잖아요. 그걸 강조하고 싶었던 거지, 문재인 대통령의 이름을 빌리고자 하는 게 아니에요.
리: 그러니까 내가 문재인 정부의 전남 정책을 만들었는데, 아무도 몰라줘서 그렇게 썼다(…)
신: 문재인 대통령과는 서로 정말 믿는 관계라 생각해요. 보수정부 동안 남북 핫라인이 끊긴 데에서 알 수 있듯, ‘핫라인’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신뢰잖아요. 저 스스로 문재인 정부 시대정신을 잘 실천해온 사람이라 생각하고요.
5.18과 함께 한 20대
리: 요즘 전과로 인해 네거티브 이슈가 있습니다. 한마디 하신다면…
신정훈: 제가 징역살이 한 게 무슨 사리사욕이 아니잖아요. 미문화원을 통해 광주 5.18을 알리려고 한 건데, 어찌 보면 민족운동(…)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리: 어쩌다 젊은 날에 그런 일을 벌이게 된 겁니까?
신정훈: 이걸 이야기하려면 5.18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은데… 제가 고2때 5.18을 겪었어요.
리: 그때 기억은 어떤가요?
신정훈: 생생하죠. 80년대 전라도 살았던 사람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그 경험을 벗어날 수 없어요. 공포감, 억울함, 분노… 이런 게 다 가슴 속에 남아 있죠. 제 친구는 화장실에 낙서했다고, 고등학생이 경찰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리: 시위는 열심히 하셨나요?
신정훈: 어린 나이에 큰 용기가 나진 않았어요. 소위 말해서 데모 때 시내 나오면 그냥 뒷줄에 구경 가듯 서고… 주변에서 총소리 들리면 집에 쳐들어와서 이불 둘러 싸매고… 그런데 저조차도 잘 모르고 있었는데, 나중에 제가 고2때 5.18 당시 썼던 일기장을 보니 그런 내용이 있더라고요. 무고한 시민들을 국민의 세금으로 학살하고 있는데 난 무엇을 해야 하나… 수준 높은 정치의식이 아니라, 광주시민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었던 저항의식이랄까…
리: 그래서 대학 가서 세상을 바꿔야지…. 이런 생각을 한 건가요?
신정훈: 그런 거창한 생각은 없었어요. 제가 82학번인데, 그 당시 대학가는 학생운동 저지하려고 삼청교육대라고 하는 정치깡패들이 대학에 수백 명씩 사복 입고 있었어요. 학내에서 학생 잡아가고 두들겨 패고… 지금 와서야 그때 다 돌 던졌다고 추억하지만, 실제로 뭘 하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던 시대죠.
리: 되게 소심한 듯한데(…) 대체 그런 일을 어떻게 저지른 겁니까. 사실 미국을 깐다는 건 대중에게 등을 돌릴 수도 있는 일인데…
신정훈: 그렇죠. 미국을 다루는 건, 용공 논쟁에 휘말릴 위험성이 크니까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레드컴플렉스가 얼마나 심했겠어요. 그런데 우리가 처음부터 생각한 건 미국 비판보다, 광주학살을 어떻게든 알리려 했어요. 그 학살을 방조한 미국에게 책임을 물으며 관심을 끌었던 거고… 그런 측면에서 반미를 이야기했지만 투쟁은 온건했어요. 덕택에 CNN, NHK 등 세계 유수 언론이 취재하며, 광주학살에 관심을 가졌어요.
리: 미문화원 점거로 깜빵에 가게 될 것도 알고 계셨을 텐데… 무섭지 않았나요?
신정훈: 굉장히 무서웠죠. 물고문, 구타야 잠깐이라 해도 징역 10년은 살 거라 생각했죠. 솔직히 몇 번을 주저하고 두려워하고 후회하고 그랬겠어요… 그렇지만 더 중요한 건, 우리나라가 이런 집단에 지배되면 안 된다… 이런 청년들의 순수한 정의감이었죠.
리: 뭐, 패기야 이해합니다만 막상 고문당하니 기분이 어떻던가요.
신정훈: 끌려가서 많이 맞았죠. 잠도 안 재우고…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재판장에서 판사가 일어나라 할 때 개기며 한마디 했죠. “당신은 우리를 재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우리는 독재정권의 하수인인 재판부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 이게 뉴스를 타며 나름 운동권에서는 슈퍼스타(…)가 됐습니다.
리: 한마디 하니까 반응은 어떻던가요?
신정훈: 판사가 가소롭다는 식으로 훈계를 하더라고요. 판사 판결문 외에 ‘학생들에게 훈계함’이라는 훈계문이 법정에서 낭독됐어요. 재판장이 ‘운동권 학생들이라 해도 합법적으로 싸워야지, 목적이 정당하다고 수단이 정당화되냐…’ 그런 꼰대 훈계질을 해댔고, 덕택에 이 재판장도 슈퍼스타가 됐습니다(…)
리: 지금 그 재판장은 잘살고 있습니까?
신정훈: 이재훈이라고 나중에 자민련 국회의원으로 출마했다가 떨어졌더라고요. 저는 비록 징역살이는 했지만 국회의원 했으니, 결국 제가 이긴 겁니다.
리: …….
신정훈: 아무튼 그때 법정 정말 화려했어요. 우리 변호사는 나중에 대선 출마하는 박찬종이었고, 검사는 MB-박근혜 정부 때 공중파 엉망으로 만든 방송문화진흥회 고영주 이사장… 그때 고영주가 정말 잘생겼었어요. 꽃미남 얼굴로 저 취조하고 조서 작성하고… 아직도 그 잘생긴 얼굴이 생생합니다…
리: 정의를 위해 다시 깜빵 가라면 가시겠습니까.
신정훈: 그때 어떻게 그렇게 열정과 용기가 났는지… 그래도 다행인 건, 우리 사회가 이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깜빵 가야만 될 정도의 사회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전두환, 노태우 때는 그런 극단적 방법이 아니었으면 기성정치나 독재정권의 부패를 고발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었죠. 아무튼 깜빵은 갈 용기는 있는데 몸이 따를지는 모르겠고(…)
리: 뭐, 더 몸이 안 좋은 각하와 공주님도 빵에 계신데요…
신: 버티기 힘들 거에요. 삶에서 늘 자기 입신과 이익만을 추구했던 사람들이잖아요. 투철한 정의감으로 깜빵 자처해도 버티기 힘든데, 어떻게 버티겠어요.
교도소에서 연애에 성공한 슬기로운 깜빵생활
리: 그렇게 빵을 나오고 전남 나주로 내려갔습니다. 왜 중앙에서 정치하지 않았던 거죠?
신정훈: 그때는 독재였으니 정치로 뭘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조차 없었죠. 또 농촌이었던 이유는… 제가 징역 살던 중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께서 계속 제 편이셨거든요. 처음에는 ‘우리 애가 무모한 짓 했구나’하며 걱정하시다가, 재판 과정을 보면서 ‘아이들이 정당하고 사회가 잘못된 거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시고 많이 이해해주셨어요. 그런 아버지에 대해 죄송함이 참 컸어요. 그래서 내 고향에 가서 아버지처럼 고생하신 농민들과 함께, 그분들 위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었죠.
리: 막 내려오니 어색하지 않던가요? 중앙에서 떡 하니 한 놈 내려와서…
신정훈: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신문에 여러 차례 등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관심을 많이 가져왔어요. 농촌 운동하는 청년들이 저를 초청하더라고요. 그분들과 나주와 농촌을 바꿔보자고 의기투합했죠. 그때 가장 큰 이슈로 나온 게 물값, 수세(水稅)였어요. 쌀값이 문제가 아니라, 물값 때문에 아무리 쌀을 많이 수확해도 돈을 벌 수 없었죠. 이 폐지 운동을 시작했어요.
리: 어떤 식으로 운동을 한 거죠?
신정훈: 그냥 정말 열심히 뛰었죠. 마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어르신들께 수세의 부당함을 어필했어요. 그리고 1년 만의 시위에 나주에서만 1만 명이 모였어요. 지금으로 따지면 거의 촛불시위급이었죠.
리: 겨우 1만 명 가지고, 무슨 촛불시위까지(…)
신정훈: 아니, 그때 나주 인구가 10만 겨우 넘었어요. 게다가 그때 시내까지 나오기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런 운동을 통해 수세가 순식간에 1/5로 떨어졌어요. 한 번 승리의 맛을 느끼고 나니 계속해서 운동에 불이 붙었죠.
리: 이후 운동은 계속됐나요?
신정훈: 이제 수세를 넘어서 각종 농민 관련 이슈를 해결해 나갔죠. 그때만 해도 농민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게 수세 대책위원회를 통해 전국농민위원회, 바로 전농으로 발전하게 된 겁니다.
리: 내가 전농의 아버지다!
신정훈: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불이 붙었을 때쯤 전 또 깜빵에 가게 됩니다.
리: 이거 무슨 프로 징역러도 아니고(…)
신정훈: 지금이야 쉽게 이야기하지만, 대중운동이 쉬운 게 없죠. 정부, 일선 경찰서… 다들 농민 운동 막으려고 난리였어요. 충돌이 굉장히 잦았죠. 군청이 강제적으로 수세 걷고 저 구속시키고… 여기에 분노한 우리 지도부가 또 군청에 분뇨 투척하고(…) 그렇게 두 번째 징역을 살게 됐죠.
리: 참 인생은 알 수 없군요……
신정훈: 하지만 덕택에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리: ………………. 참 인생은 알 수 없군요… 교도소 여직원이라도 꼬신 겁니까.
신정훈: 그건 아니고, 제 와이프도 같이 농민운동을 했는데… 같이 빵에 들어갔어요. 교도소 가면 남사(男)와 여사(女)로 갈려 있는데, 여기 오가며 일하는 사람을 비둘기라고 해요. 주로 하는 일은 똥 퍼는 일인데, 이 비둘기 꼬셔서 와이프한테 편지를 보냈죠. 교도소에서 받은 편지라니, 얼마나 로맨틱하겠어요.
리: 편지에서 똥냄새 날 것 같은데(…)
신정훈: …… 그게 당시 종이도 펜도 없어서 책 찢어서 줄 사이에 은박지를 젓가락에 끼워서 글 쓰고 그랬어요. 아무튼 그런 게 먹혀서 결혼하게 됐죠. 나오자마자 거의 바로 결혼했죠.
리: 이후에는 최연소 도의원에 이어 호남에서 유일한 민주당적 없는 무소속 시장까지 아주 승승장구하셨군요. 왜 민주당에 들어가지 않은 겁니까?
신정훈: 당시 지방자치 영역은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영남당과 호남당이 독점한 형태였어요. 저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지역주의에 저항한 거였고요.
리: 당시 혁신도시를 나주에 유치하며 이름을 알렸는데요, 무소속이었음에도 이가 어떻게 가능했나요?
신정훈: 제가 전라도에서 정치하면서 느낀 게, 호남 정치인들이 진짜 허세 부린다 생각했어요. 그때 제 힘이 박지원 대표 5%나 됐을까요? 여수 주성영 의원하고도 비교가 안 됐을 건데… 그분들이 더 관심 갖고 접근했으면 목포나 여수로 갔겠죠. 그런데 호남에 맹주로 딱 만족하니까 그렇게 진지하게 접근을 안 했어요. 제가 나주시장일 때 2년 정도 먼저 혁신도시안을 시작했어요. 전남대에 용역도 주고, 박준영 도지사님, 박광태 광주시장님과 열심히 이야기했죠. 그러니까 나주로 온 거지, 다른 이유는 없었어요.
리: 그런 공적이 있는데, 시장에서 잘렸다?! 이건 무엇 때문입니까.
신정훈: 제가 시장 시절에 대해서는 추호도 부끄러움이 없어요. 이미 80% 완공된 수출단지가 있었는데, 규정에 약간 위배된 게 발견됐어요. 준공한 사업자가 자격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 게 발견된 거죠. 일반 공무원은 전혀 손을 못 대고 있었어요. 괜히 건드렸다가 책임만 덮어 써야 하니까… 근데 저는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고… 감사원, 농림부, 나주시, 이렇게 함께 공개 협의를 시작했죠. 그렇게 완공은 됐고 전 날라갔죠.
리: 음… 뇌물 수수도 아닌데 자리가 날아갈 만한 일이었나요?
신정훈: 지금은 저도 민주당적을 가지고 있지만, 무소속 시절 민주당을 4번이나 물 먹였잖아요. 그러다 보니 2번째 시장이 될 즈음엔 뭘 해도 공격당했어요. 정치적 의도로 35번이나 고발당하다가, 그 35번째에 잘렸죠.
리: 아니, 굳이 그렇게 공격받으며 왜 무소속으로 있었습니까(…)
신정훈: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좀 억지 고집부린 것 같아요. 워낙 지방자치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넘치다 보니, 자꾸 지역 상황을 왜곡하는 지역주의 정치가 비겁해 보였어요. 이제 와서 보면 너무 까칠하게 대응한 게, 정책 발전에 어려움을 준 것도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리: 역으로 이야기해서 질질 끌면(…) 안 잘렸을 수도 있지 않나요.
신정훈: 제가 한국 최초로 친환경 학교 급식을 시작했는데, 이게 처음엔 현행법과 맞지 않았어요. WTO 조항 중 외국 농산물 차별에 걸리거든요. 수세 폐지도 마찬가지로 법에 맞서 싸운 거고… 저는 시장이 법과 질서 속에 움직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법과 시민의 권리-이익이 충돌했을 때는 맞서 싸우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리: 최초의 친환경 학교 급식은 뭐죠?
신정훈: 2003년 어린 학생들과 밥을 같이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 밥을 도저히 못 먹겠더라고요. 2~3년 묵은 정부미를 먹어요. 까칠까칠한… 전남 나주가 좋은 쌀 나오는데, 좋은 쌀 먹여보자. 그래야 애들이 건강하고 공부도 잘 하지 않겠나… 나아가 우리 지역에서 나는 음식물로 애들 다 먹이자. 이게 2003년에 전국 최초로 시작했어요. 10년 가까이 지나니 전국에서 하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미쳤다고 했어요.
리: 원조(?)로서 전국의 무상급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정훈: 여전히 아쉬움이 크죠. 친환경 학교급식은, 가장 좋은 음식을 먹이자는 취지인데 너무 식품 대기업이 장악하고 있어요. 저는 지역에서 실명제 걸고 하는 로컬 푸드 개념으로 운영하는 게 맞다고 봐요. 광주전남 전체를 아우르는 식품 계획을 세우고 각 지역 음식을 최단거리로 공급하며 신선도를 유지하는 거죠.
선거에서 떨어지고, 문재인 캠프의 전남 공약 설계에 나서기까지
리: 아무튼 그런 많은 업적이 있는데, 다들 공격하는 게 더러워서 입당했다(…)
신정훈: 그건 아니고(…) 솔직히 처음 입당할 때만 해도 민주당은 호남당이라는 생각이 강했어요. 누가 나와도 민주당 이름만 달고 있으면 다 당선되고, 동네 사람 뽑자는 분위기니까요. 그런데 2012년 문재인 당대표를 필두로 소장개혁파들이 민주당을 새롭게 바꾸자는 분위기를 만들었죠. 대선을 앞두고 토호라 할만한 정치인이 다들 국민의당으로 가며 딱 분위기 정리됐죠. 그때부터는 이제 기성 정당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아요.
리: 하지만 정작 입당하자마자, 문재인 지지도는 급락했습니다. 탈당하자는 이야기 엄청 나왔을 것 같은데요.
신정훈: 박지원 대표가 나주에 5번 와서 찾아왔어요. 같이 곰탕 먹자고(…) 찾아와서 계속 한 번만 더 생각해보라고 했죠. 그런 이야기하시려면 만날 필요 없을 것 같다고 바로 돌려보냈습니다. 저는 끝까지 당과 문재인 대표를 지킨다고 했죠. 그래서 끝까지 탈당 안 하니까, 총선 때는 저를 떨어뜨리려고 6번이나 나주에 오더라고요. 마이크 잡고 저는 호남 사람들을 위하지 않는다고…
리: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신정훈: 떨어졌죠(…) 국민의당에 밀려서.
리: 한때 최연소 도의원, 호남 유일의 무소속 시장 타이틀 달다가 떨어지니 기분이 어떻던가요?
신정훈: 솔직히 그 당시에는 야속했죠… 그런데 되돌아보니 국민들 선택은 이유가 있어요. 너무 내 잘난 맛에 살지 말고, 좀 더 국민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정치가 뭘까… 새롭게 시작하려면 뭘 더 신경 써야 할까…
리: 그랬던 호남 민심이 짠! 하고 다시 민주당에게 돌아왔습니다. 왜일까요?
신정훈: 흔히들 전략적 판단이라 이야기하는데, 전 그렇게 계산적인 건 아니라고 봅니다. 결국 민심은 바른 방향, 정의로운 방향으로 간다고 봐요. 호남 사람들도, 이번 문재인 정부의 방향이 올바른 방향이라 생각하신 거겠죠.
리: 아무튼 그런 연으로 문재인 캠프의 전남지역 공약이라는 중임을 맡게 됐군요.
신정훈: 아니오. 그건 문재인 대통령이 맡기기 전에, 제가 자임했습니다.
리: -_-??????
신정훈: 전남 공약을 챙기는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정책 담당자들은 가급적이면 지지도 높은 지역에는 신경을 안 쓰려 해요. 공약을 내도 부담 없는 공약 내고… 지지율 낮은 지역, 인구 많은 지역에 신경 쓰려하죠. 그런데 전 계속 전남에서 운동하고 정치하고 그랬으니, 전남에 제대로 된 공약을 제시하자… 그래서 아무도 안 하려는 자리를 맡게 됐습니다. 결국 전남지역 10대 공약은 제가 책임 하에 주도하고 설계됐죠. 개인적으로는 참 뿌듯한 일이었습니다.
농업, 산업, 교통 다 살리겠다는 패기의 남자(…) 신정훈
리: 이번 대선의 농어업 정책도 주도했습니다. 여권 내 최고의 농업 정책 전문가로도 알려져 있는데 사실입니까?
신정훈: 최고의 농업정책전문가는 좀 과한 이야기죠. 이것도 파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제가 수십 년간 현장에서 뛰다 보니 아무래도 주도적으로 역할을 많이 하긴 했죠. 중앙에서는 농업에 별로 눈을 안 돌리지만, 지금 전국에 70만 농가가 있어요. 공산품은 몇몇 회사에서 서로 협의하며 생산량을 조절할 수 있지만, 농산품은 정부가 어느 정도 개입하지 않으면 폭등-폭락이 반복돼요.
리: 그냥 시장에 맡기면 헬게이트가 열리는군요(…)
신정훈: 박근혜 정부는 농산물 가격 조절을 좀 방치했어요. 쌀값 하락을 막기 위한 움직임이 없었죠. 그래서 이번 정부에서도 첫 농업 공약이 농산물 수급 조절입니다. 쌀 생산 조절로 가격을 맞추는 거죠. 쌀이 남아돌면 농민도 힘들지만 쌀값이 떨어지면 정부 보조금도 과하게 나가요. 그래서 이번 정부에서부터는 쌀보다 다른 작물에 좀 더 힘을 쏟게끔 하고 있어요. 그러면 농민 소득도 늘고 정부 예산도 절감할 수 있으니까요.
리: 그렇다고 굳이 농업을 강화할 필요까지 있을까요. 이미 한국은 산업고도화가 상당히 진행돼 있는데…
신정훈: 이미 중국 인구가 15억이고, 인도를 포함한 범 아시아권 인구는 30억 이상이에요. 이들에게 필요한 농산품은 어마어마하겠죠. 자국 내 식량 자립은 농민뿐 아니라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제라 생각해요. 그렇다고 해서 마냥 삽질하는 농사로 가면 안 되겠죠. 4차산업혁명 이야기 많이 나오는데, 기술과 접목된 농업으로 가야 한다고 봐요.
리: 청년들을 농업 쪽으로 유치하기 위해 여러모로 힘쓰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농업은 규모의 경제가 중요한데, 이걸로 답이 나오나요?
신정훈: 농촌이 1차산업에 머물지 않으려면 청년층 유입이 중요해요. 기술을 갖출 수 있게 청년들을 유치하고, 그 가교로 정부가 수급 안정을 해 주고… 그래서 최근에는 그냥 돈이나 던져주고 끝내기보다,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사업내용을 함께 검토하며 매달 100~150만 원을 지원해주고 있어요.
리: 그런데 그 청년층이 뭘 해도 힘든 상황입니다. 특히 지방대는 거의 망했(…)다고 할 위기인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신정훈: 힘들죠. 지방이라고 일자리가 없는 건 아니에요. 근데 젊은 층이 선호하는 일자리가 아니죠. 각 지역에 있는 공공기관, 공기업이 채용인구 30%를 지역에서 뽑기로 했다고는 하지만… 이 미스매치를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죠. 쉽지는 않겠지만 일자리를 대폭 늘리려면 계속해서 산업단지를 유치하고, 지방정부와 학교가 기업 수요를 조사해 맞춤형 일자리를 내놓아야죠. 제가 한전공대 유치를 문재인 후보 공약에 건 것도 이 때문이에요. 품질 좋은 일자리 없이, 취업 장려금만으로 버티기에는 한계가 뚜렷해요.
리: 전라도 가뜩이나 예산 없는데 그런 게 될까요(…)
신정훈: 나주시장 시절에도 예산의 부족함은 많이 느꼈어요. 하지만 예산을 어디에 쓸 것인지가 훨씬 중요하단 것도 알았습니다. 한국은 너무 SOC를 좋아해요. 섬이 있으면 꼭 다리를 놓으려고 하죠. 그런데 여객선을 준공영화하면 어떨까요? 연도교 지을 돈 1600억의 1%, 16억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값싸게 섬까지 왔다 갔다 하고 남은 돈으로 일자리와 산업에 투자할 수 있겠죠.
리: 그 삽질 SOC 끝판왕이 무안국제공항이 아닐까 하는데요(…) 이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광주로 통합하자는 이야기도 많은데.
신정훈: 애초에 무안공항은 호남권 허브공항으로 지었기에, 광주공항을 옮기는 게 맞습니다. 물론 군공항 문제로 무안 군민들 찬성이 필요하겠죠. 장기적으로는 남해안 교류까지 주목하는 게 필요하다고 봐요. 호남지역 KTX가 들어오고 나서 수도권과 교류가 확 늘었어요. 이제 무안공항에서부터 순천을 건너 부산까지 이어진다면 영호남간 교류도 활발해지고 김해공항과 무안공항도 활성화될 거라 생각해요.
데이터 시각화로 알아보는 ‘전라남도’
“해당 기사에 사용된 데이터 시각화는 뉴스젤리의 시각화 솔루션 DAISY를 이용하여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