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금에는 맥주가 빠질 수 없고, 맥주에는 정치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술에 취해 반쯤 혀가 꼬인 친구는 말한다. “한국에 정당이 몇 개나 있는지 알아?” 글쎄 한 7, 8개는 되냐고 말하려는 찰나. 인터넷에서 찾은 정당 목록들을 보여주며 말한다. “35개. 물론 현존으로만”
그런데 그 많은 정당 중에 내 마음속의 정당은 없었다. ‘맥주당’. 지난 55년간 나타났다 사라진 202개의 정당에도 맥주라는 이름은 없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분개했다. 맥주야말로 진보와 보수를 넘는 인류애 가득한 이념이 아니던가! 우리는 한국 정치의 한계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그렇다. 맥주 좀 마신다는 국가에는 언제나 ‘맥주당’이 있었다. 독일은 당연하고 체코, 러시아에도 맥주당은 존재했다. 오늘 소개할 ‘폴란드 맥주 애호가당(PPPP, Polska Partia Przyjaciól Piwa)’은 의회 진출은 물론 장관까지 배출했다. 오늘은 맥덕을 국회에 보낸 폴란드 이야기를 해보자.
맥덕의 시작은 미약해도 끝은 창당하리라
1980년대 말, 폴란드 방송에는 ‘비어 스카우트(Skauci Piwni)’라는 시트콤이 방영되었다. 보이스카우트 옷을 입은 아재들이 맥주를 마시며 노는 이야기다. 비어 스카우트 제작진은 맥주를 마시며 회의를 하다가 한 가지 주정을 부렸다. “맥주 정당 같은 걸 만들 수 없을까?”
잠깐의 술자리 농담은 ‘아담 할베르(Adam Halber)’라는 기자 귀에 들어왔다. 그는 이것이 제법 괜찮다고 생각했다. 당시 폴란드에서 맥주는 쩌리였다. 전체 술 소비량의 60%는 다름 아닌 보드카. 도수 높은 보드카를 들이켜대는 폴란드인은 알콜중독과 숙취를 달고 살았다.
할베르는 “폴란드의 보드카 문화를 안전한 맥주로 바꾸겠다”고 말했다. 당명도 지었다. 폴란드 맥주 애호가당. 하지만 정식 정당이 되려면 5천 명의 당원이 필요했다. 그는 잡지에 당의 소개와 당원 가입 카드를 실었다. 물론 장난이었다. 수천 명의 독자가 당원 가입 카드에 이름과 주소, 서명을 적어 편집부로 보내주기 전까지는.
이렇게 된 이상 선거에 모든 것을 건다
1990년 12월 28일. 폴란드 맥주 애호가당은 정식 정당이 되었다. 당대표는 비어 스카우트의 출연자 ‘야누시 레빈스키(Janusz Rewiński)가 맡았다. 할베르는 부대표로 실무를 담당했다. 이렇게 된 이상 총선까지 간다.
폴란드 맥주 애호가 당은 맥주 문화 장려를 위한 정책을 만들었다. 먼저 보드카의 세금을 올려야 했고, 맥주 양조장과 술집의 개업 절차를 간소화시켜야 했다. 무엇보다 그들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환경법이었다. 깨끗한 물이 없으면 맛있는 맥주를 만들 수 없으니까.
당 대표 레빈스키는 보이 스카우트 옷을 입고 맥주를 마시며 당 선전에 나섰다. 덕분에 지지자는 물론 총선에 출마한 후보를 수 백 명이나 모을 수 있었다. 대부분은 신박한 이름의 정당이 웃겨서 모였지만, 폴란드 맥주 애호가당을 정치적 대안이라 생각한 이들도 있었다.
1991년 10월 선거가 끝났다. 폴란드 최초의 완벽한 자유선거였다. 하지만 투표율은 43.2퍼센트. 그중에 폴란드 맥주 애호가 당은 36만 7천 106표를 받아 16명의 의원을 배출한다. 이것은 전 세계에 있는 맥주당이 해보지 못한 업적이었다.
폴란드 맥주 애호가당, 의회에 입성하다
폴란드 맥주 애호가당의 비전이 승리한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당시 가장 많은 득표를 얻은 정당도 득표율이 12%에 불과했다. 표가 분산되는 틈을 타 폴란드 맥주 애호가 당을 비롯한 여러 정당들이 의회에 들어왔다. 그보다 문제는 의원석 배치였다. 폴란드 맥주 애호가당을 좌파에 앉힐까? 우파에 앉힐까? 결국 출입구와 가까운 맨 뒤쪽 두 줄이 그들의 자리가 되었다. 맥주를 마시는 사람이란 무릇 화장실에 가까워야 하니까.
폴란드 맥주 애호가당은 연일 카메라 셔터 세례를 받았다. 해외에서도 전례 없는 정당의 등장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내부는 빠르게 분열되어 갔다. 당은 맥주를 통해 세상을 보자는 이상주의자와 이젠 술에서 깨고 제대로 된 정당의 모습을 갖추자는 실용주의자로 나뉘었다. 이러한 파벌을 ‘큰 맥주’와 ‘작은 맥주’라고 불렀다.
다수파인 큰 맥주는 레빈스키가 데려온 기업인들이었다. 사실 이들은 맥주를 마시기보다 정치에 입문하고 싶었다. 그들은 기업활동을 위한 새정치를 주장했다. 소수파인 작은 맥주는 보다 진보적이었다. 하지만 ‘맥주’에 관한 이슈 외에는 무지했고 정치적 영향력도 형편없었다. 할베르 역시 이에 실망해 당적을 옮겼다.
폴란드 맥주 애호가당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첫 총선으로 구성된 어설픈 의회는 2년을 못 버티고 해산되었다. 국민들의 실망은 마치 김 빠진 맥주를 마신 기분일 것이다. 다시 돌아온 총선에서 폴란드 맥주 애호가당은 겨우 0.1퍼센트의 득표를 얻어 의회 입성에 실패한다. 결국 그들이 어울리는 무대는 의회가 아닌 술집이 되었다.
의원이 된 맥덕들, 그들이 남긴 것
짧은 역사였지만 폴란드 맥주 애호가당은 정당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경험했다. 사람을 모으고, 이름을 짓고,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생각의 차이가 생기고, 파벌이 나뉘고, 사라진다. 참으로 지리멸렬한 과정이지만 외면보다는 관심이 필요하다고 본다. 정치로 인해 세상은 조금씩 바뀐다는 걸 그들이 보여줬기 때문이다.
맥주 애호가당은 맡은 바 임무를 수행했다. 맥주에 대한 이슈를 끌어올린 덕에 폴란드의 보드카 소비량은 크게 줄었다. 반대로 주목받은 맥주 문화는 질적으로, 양적으로 꽃을 피웠고, 폴란드는 세계 맥주 생산량 10위권에 드는 국가가 되었다. 그들의 소박한 꿈 ‘집에서 편하게 맥주를 마시는 나라’는 어느 정도 이뤄진 것이다.
맥주는 언제나 옳았다. 다만 정치환경이 그리고 사람의 욕심이 문제였던 것이지. 우리는 맥주잔을 마주치며 맥주 한 잔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혹시 모른다. 이러다 돌아오는 선거에서 ‘맥주’를 기치로 든 정당이 탄생할지도.
참고문헌
- 『그때 맥주가 있었다』/ 미카 리싸넨, 유하 타흐바나이넨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