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에게 개발 협력 관련 업무는 상당히 어렵다. 다른 분야에 비해 지식체계 범위가 넓을 뿐 아니라 다른 분야와 연관되는 부분이 적다. 보직이 계속 순환되는 한,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냥 포기할 일이 아니다.
특히, 수원국 공관에 근무하는 외무공무원에게는 당연히 더욱 많은 개발 협력 지식이 필요하다. KOICA의 지원을 받으면 되지 않냐고? KOICA라고 사람이 충분하지는 않다. 그리고 KOICA가 모든 수원국에 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국제적 개발 협력의 메카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을 살펴보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48개국 가운데 우리나라가 공관을 둔 국가는 현재 분관인 적도기니를 포함하여 18개국이다. KOICA가 사무소를 연 국가는 11개국뿐이다. 공관이 없는데 KOICA만 나가 있는 국가는 없다. 북수단, 가봉, 적도기니, 앙골라, 짐바브웨, 마다가스카르와 남아공 7개국에는 공관만 개설된 형편이다. 즉, 아프리카에서 우리 공관은 최전선에 전진 배치되어 있다.
정리하면, KOICA 사무소가 없이 공관이 개설된 국가와 그 겸임국은 15개국이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 최전선에 선 공관에서 개발 협력 일을 처리할 때, KOICA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부정확한 정보가 유통되거나 그릇된 판단이 내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상, 무상이 오락가락하는 보고서
최근 사례를 들어보자. 주 짐바브웨 대사관은 2018년 1월 23일에 ‘2018.1.15-19 주간 정세 동향 보고’를 페이스북에 올렸다. 보고서에는 아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 말라위 중소기업에 13억 콰차 지원
Goodall Gondwe 재정경제계획개발부 장관이 일본 정부와 2억 엔(13억 콰차)의 차관 지원 협정에 서명함. 동 지원금은 중소기업을 지원하여 말라위 경제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것으로 Yanagisawa 주 말라위 일본대사는 사회경제 발전을 통해 빈곤을 퇴치하려는 말라위 정부의 노력을 지원하는 것이 금번 차관 지원의 목표이며, 관련 기금은 중소기업들을 위한 상품 및 장비 조달에 사용될 것이라고 밝힘.
- Yanagisawa 일본대사는 말라위 정부에게 차관 상환을 위해 관련 기금 관리에 만전을 기해 줄 것을 촉구하고, 동 기금이 양국간 합의대로 “Counterpart Funds”를 운영하는 데 투입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함.
- 일본은 1988년 이후로 이러한 보조금을 지원해 왔으며, Gondwe 재정부 장관은 이번 지원금이 과거 지원금의 4분의 1에 불과하다며 지원금의 증액을 고려해 줄 것을 요청함.
개발협력계 종사자라면 대번에 뭔가 앞뒤가 들어맞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일본이 고작 2억 엔(대략 2백만 불)짜리 차관(Loan)을 공여한다고? ‘차관’이란 단어가 3번 나오다가 마지막에 나오는 ‘이러한 보조금’과 ‘이번 지원금’은 또 뭔가?
이럴 때는 원문을 찾아보는게 정답이다. Malawi, Japan, Gondwe, Yanagisawa로 검색하면 바로 나온다. Malawi News Agency인 MANA Online의 2018. 1. 18.자 기사다.
별로 길지 않은 기사에 제목에서부터 Grant(무상공여)가 등장하여 총 13번이나 나온다. 거의 매 문단마다 지겹게 반복된다. 마지막에 등장한 ‘보조금’도 원문에는 Grant다. 그런데 왜 이 기사를 요약 번역한 실무자는 차관이라고 오해했을까? 아무래도 기사 중간에 Loans라는 단어가 딱 한 번 나오는데, 이를 두고 전체를 오해한 것으로 보인다.
Yanagisawa further called for vigilance in management of the loans to ensure that the money is repaid and placed into a revolving scheme called “Counterpart Funds” as agreed by the two countries.
일본대사가 강조했다고 하니 실무자는 중요한 내용으로 여겼을테고, 아래와 같이 번역해 보고했다.
Yanagisawa 일본대사는 말라위 정부에 차관 상환을 위해 관련 기금 관리에 만전을 기해 줄 것을 촉구하고, 동 기금이 양국 간 합의대로 “Counterpart Funds”를 운영하는 데 투입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함.
실무자가 the money is repaid and placed into a revolving scheme called “Counterpart Funds”를 이해하기 어려우니 그냥 “Counterpart Funds”를 운영하는 데 투입되어야 한다라고 얼버무려 두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대출된) 자금이 상환되어 “Counterpart Funds”라 불리는 회전 체제에 (재)투입되도록’ 정도가 된다. 여기서 Revolving scheme은 신용카드에서 ‘리볼빙 카드’나 은행 ‘마이너스 통장’과 비슷한 개념이다.
기사 내용으로 재구성한 사업구도를 자세히 설명하면 아래 그림과 같다.
먼저 말라위 중소기업의 설비구매나 운전자금을 지원할 기금을 조성하기 위해 말라위-일본 정부가 기금의 설립과 운용기준에 합의한다. 합의에 따라 일본 정부는 약정한 금액을 기금에 무상 공여(Grant)한다. 이때 통상적으로 수원국 정부도 성의 표시로 작은 금액이나마 Matching Fund를 같이 넣기도 하는데, 현지 언론이 언급하지 않은 것을 보니 이 사례에는 없나 보다. (아니면 현지 신문기자도 잘 모를 수 있다…)
이렇게 재원을 조달한 기금은 현지 중소기업들의 자금지원 요청을 받아 심사 후 대출해준다. 그러니까 기사 원문에 나온 Loan은 일본 정부가 말라위 정부에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말라위 기금이 말라위 중소기업에 빌려주는 것이므로 ‘차관’이 아니라 ‘대출’이다.
이때 이자는 없거나 매우 낮다. 대출해간 중소기업이 최소한의 원금을 다 갚으면 기금은 또 다른 중소기업에게 대출을 해준다. 이런 과정, 즉 중소기업이 갚은 원금이 기금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다른 중소기업에 대출되는 순환과정을 신문기사에서 Revolving Scheme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기금은 대손으로 재원이 고갈될 때까지 계속 운영하고 중간중간 운영성과를 출자자인 말라위-일본 정부에 보고한다.
이런 방식은 현지의 원조 의존성을 낮추고, 공여국의 사업관리 노력을 절약하면서도, 현지 기관의 자금 운용 역량을 키우는 매우 좋은 원조방법이다. 일본은 민간부문 개발(PSD)에서 이런 방식을 많이 활용하고 있다.
개발마케팅연구소는 JICA가 아예 현지 민간기업(은행)과 민간단체(협회)에 직접 위탁하는 방식을 취한 세네갈 사례도 소개한 바 있다. 아프리카 ODA에는 변화가 필요하다
정말이지 사람 좀 늘리고 지원도 제대로 해주자
자, 다시 원래 문제로 돌아가자. 당신은 주 짐바브웨 대사관에서 말라위 인터넷 신문을 뒤져 주간보고를 작성한 실무자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개발 협력이나 금융에 대한 교육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오늘부터 자네가 원조를 포함한 경제통상 분야를 맡게’ 하는 한 마디로 실무에 투입되었을 그에게, 모르거나 의심쩍은 게 있어도 어디서 무엇을 찾아보고 누구에게 물어볼지도 모르는 그에게, 누가 이런 실수를 이유로 돌을 던질 수 있는가?
문제는 두 가지다. 일단 공관에 나가는 직원 수가 너무 적다. 특히 아프리카 지역 공관은 공관 살림과 현지정부와의 연락 등 기본업무 수행 외에는 여력이 거의 없다.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등 대국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와 경제 규모가 비슷한 스페인, 이탈리아 등과 비교해도 너무 적다. 공관별로 꼭 필요한 직무에는 우선적으로 증원이 필요하다. KOICA 없는 공관의 개발 협력 담당자가 바로 그런 사례다. 엉뚱한 데서 청년 일자리 찾지 말고, 정말 필요한 곳부터 늘려주길 바란다.
두 번째는 담당자에 대한 (교육)지원이 부족하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배우지 않은 일을 어떻게 잘할 수 있겠나? 가끔 개발 협력에 정말 해박한 외국 외교관을 만나면 부럽기 짝이 없다. 창도 방패도 없는 우리 외교관이 맨몸으로 그들과 실전에서 붙는다고 생각하면… 걱정이다. 우리 측도 최소한의 무장은 갖춰 내보내야 한다. 개발 협력에 ‘협력’이 들어간다고 해서 공여국 사이도 협력적일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개발 협력에는 치열한 경쟁이 엄존한다.
개발 협력은 범위가 넓고 현장경험이 중요하다. 공관 실무자가 모든 일을 독립적으로 다 처리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의 기본은 갖춰야 한다. 소양교육에서 ‘개발 협력이란 분야가 있다더라. 모르면 KOICA에 물어봐라’고 대충 넘어가면 안 된다. 또, 실무자가 아무 부담 없이 물어보고 부탁할 수 있는 콜센터 역할을 할 후방지원(Backup) 체제도 갖춰야 한다. 현장 실무자는 총알받이가 아니다.
오지에서 고생하는 분들께 성원을 보내며, 속히 아프리카(와 여건이 비슷하게 열악한 모든) 공관에 근무하는 개발 협력 담당자가 양과 질 모두에서 큰 폭으로 개선되길 바란다.
원문: 개발협력에 마케팅을 더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