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스위스에서 흥미로운 재판이 열렸다. 밤늦은 시간 운전하다 주유 칸에 빨간 불이 들어올 때, 24시간 주유소는 구원자다. 심야에 주유소 영업하는 김에 주인은 운전사들을 위해 샌드위치와 커피도 함께 팔았다. 스위스는 법적으로 ‘필수적인 서비스’를 제외하고는 새벽 1시부터 5시까지의 야간 영업을 금하고 있다. 하지만 취리히에 있는 주유소들은 주유소가 문을 연 마당에 매점을 여는 것이 당연하다고 판단하고 영업을 강행했다.
노동조합과 시민단체 측은 강하게 반발했다. 소비자의 마음이야 간절하겠지만, 그 시간에 누가 샌드위치와 커피를 만들 것인가? 찬성 측은 소비자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했다. 누가 이겼을까? 결과는 노동자 측의 승리. 법적 논쟁이 계속되다가 연방 법원이 최종적으로 매점 24시간 영업은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매점에서 파는 샌드위치와 커피는 ‘필수 서비스’가 아니란 것이다. 이에 따라 노동자는 밤새 근무하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나라 사정은 판이하다. 24시간 불이 켜져 있는 편의점. 심야에도 언제든지 부르면 달려오는 대리기사들. 다음 날 물건이 배송될 수 있도록 밤새 허리 한번 못 펴고 짐을 나르는 택배원들. 우리는 자신의 편의에 젖어 밤새 일해야 하는 타인의 수고와 시간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국제노동기구 ILO의 차장인 이상헌 작가는 세계 곳곳을 누비며 임금과 노동시간에 대해 연구했다. 숫자로 점철되어 차가운 경제학과 우리네 인생을 담은 노동이란 불화를 화두로 삼고 산다. 그는 노동이 존중되어야 고객도 존중받을 수 있다며 고객이 더 불편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쉬는 시간에 신문 보는 네덜란드 스튜어디스
‘고객은 왕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듣는 말이다. 편의점을 가던, 음식점을 가던 ‘고객은 왕으로 대접받는다.’ 이에 대해 작가의 주장은 다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객은 왕이 아니다. 고객은 자신이 필요한 물건이나 서비스를 사는 소비자일 뿐이다. (중략) 고객도 기업도 노동자의 영혼을 요구할 권리도 파괴할 권리도 없다.”
그는 한국과 네덜란드 스튜어디스를 비교하며 설명한다.
스튜어디스가 승객에게 샴페인을 흘렸다. 한국에선 스튜어디스가 몇 번을 인사하며 승객에게 중죄를 저지른 듯 사죄한다. 승객은 스튜어디스에게 소리를 지르고 행패를 부린다. 다른 승무원과 사무장까지 단숨에 달려와 용서를 구한다. 네덜란드 비행기에서 스튜어디스가 승객 옷에 샴페인을 흘렸다. 같은 한국인 승객이었다. 그 한국인은 되려 “파티 같다.”라며 스튜어디스를 위로했다.
동일한 사건에 대한 고객의 다른 반응은 노동자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노동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받아 생활한다. 노동과 임금이 자발적 의사에 기초해 교환되는 ‘노동 계약’이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이다. 자발성과 자유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들은 노예 계약을 한 것이 아니다. 스튜어디스는 승객이 안전하게 도착지까지 갈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지 승객의 감정까지 떠맡아야 할 사람이 아니다.
네덜란드 스튜어디스는 쉬는 시간이 보장된다. 비행 근무 중에도 신문이나 책을 읽고 자신의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다. 누구도 나무라지 않는다. 그들은 노동하는 당당한 개인으로 대접받는다. 노동자의 영혼을 존중하지 않는 기업은 고객도 존중하지 않는다.
분배의 실패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당당한 개인으로 살아가는 건 쉽지 않다. 자본주의의 맹점인 ‘부의 불균형’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은 ‘돈’이다. 부를 가진 자는 권고해지고, 없는 자는 소외되는 곳이 자본주의 사회다.
자본주의 초기 때는 풍요가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돈이 많은 자는 많아지고, 돈이 없는 자는 가난해졌다. 풍요 속에 숨겨진 과잉과 불균형은 세계대전과 대공황 참화를 통해 드러났다. 자본주의는 이 고통을 통해 교훈을 얻었고 분배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자동차 회사 포드를 세운 헨리 포드는 하룻밤 새 노동자의 임금을 두 배로 올렸다. 기업과 노동이 합심해 자본주의를 운영해 보자는 이른바 ‘포드주의적 사회 협약’이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으로 도입됐다. 생산력이 더 높아졌고, 그만큼 임금도 늘었다. 경제학자들은 이 시기를 자본주의의 황금기(Golden Age of Capitalism)라고 불렀다.
황금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80년대에는 신자유주의가 도입되고, 1990년대에는 공산주의가 붕괴하면서 세계화가 시대정신으로 등장했다. 노동 소득은 더욱 줄어들고, 자본 소득이 늘어났다. 총소득 중 노동이 가져가는 비율인 노동소득분배율은 2010년 기준으로 1970년대보다 10% 포인트 이상 떨어졌다. 생산은 많아졌지만 노동자들의 구매력이 떨어지자, 각 국가는 잉여 제품을 수출하거나 가계에 싼 대출을 주선해 소비를 부추겼다. 수출 경쟁이 과열되면서 전 세계적 불균형이 심화됐고, 소비자 부문에선 가계 부채의 급속한 증가가 위험수위에 도달했다. 노동자들의 권리는 더욱 약해졌다.
저자는 직면한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고 노동자들의 인간적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 분배를 터부시해 온 편견을 깨고 분배를 중시하는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최저임금과 임금상한제를 동시에 실현해야
19세기 말,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에,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임금을 받았다. 대중적 운동이 시작됐다. 호주 멜버른의 대중적 단체가 처음으로 최저임금법을 만들었다. 이후 미국, 영국 등으로 최저임금법이 만들어져 널리 퍼졌고, 1928년 최저임금에 관한 국제 협약이 채택되었다. 협약은 최소한의 노동착취는 없어야 한다는 안전장치를 지향한다. 최저임금의 시작이다.
저자는 최저임금만으로 노동을 보호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최저임금은 하위 10~15% 저소득 임금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효과도 그만큼 제한적이다.”라고 주장한다. 당연히 최저임금을 노동자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임금 결정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에 반기를 든다. 그나마 최저임금을 제대로 실행하기 위해선 최저임금 지급을 위반하는 사례를 철저히 단속해 위반사례가 더 늘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최저임금 보장이 집의 바닥이라면, 최고 임금을 제한하는 건 지붕의 높이를 결정하는 일이다. 저자는 최저임금으로 저임금 노동자의 살림살이를 조금 개선한다 하더라도 엄청난 연봉 격차를 줄이지 않는다면 소득 격차 축소는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아직 임금 상한제와 소득 상한제에 대한 사회적 논리는 부족하다. 도입한다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어떻게 규제할지 논란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연대와 공존의 힘
소득 불평등을 줄이는 장치로 저자는 시민의 저항과 조직, 정치의 변화, 정책의 변화라는 삼박자를 꼽는다. 그는 소득불평등이 낳는 더 큰 사회문제에 주목한다. 소득 최상층부의 소득 몫이 커지는 만큼 정치권력도 같이 커져, 금력과 권력의 일방적 쏠림 현상이 발생했다. 자본가는 힘이 더욱 세지고 노동자의 권리와 발언권은 더욱 약해졌다.
점점 약해지는 노동자의 권리와 발언권을 지켜주기 위해선 진실을 추구하는 언론의 역할은 중요하다. ‘JTBC 뉴스룸’의 앵커 브리핑에서 손석희 앵커는 “언론의 역할은 국가로부터 합리적 시민사회를 대변하고, 시민사회에겐 진실을 전달하는 것.”라고 한적이 있다.
우리는 촛불을 통해 세상을 시민의 힘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배웠고 또 만들어 냈다. 그것이 바로 연대와 공존의 힘이다. 우리가 같은 노동자이고, 그럼에도 갑이 되어 또 다른 노동자를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심야까지 일해야 하는 다른 노동자들을 위해 더 불편한 삶을 감수하자. 책은 우리가 함께 불편함을 받아들일 때 더불어 잘 살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원문: 단비뉴스 / 필자: 박기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