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는 ‘도게자(土下座·どげざ)’라는 인사법이 있다. ‘도게자’는 에도 시대 영주인 다이묘(大名·だいみょう)가 행차할 때 서민들이 땅에 엎드려 고개를 숙이는 것에서 유래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죄를 구하는 인사로 굳어졌다. 일본 만화나 영화에는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해 ‘도게자’를 강요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과장된 설정으로 느껴져 웃음이 나올 때도 있다. 하지만 ‘무릎 꿇는 을’을 진부할 정도로 자주 등장시키는 우리나라 콘텐츠를 생각하면 다른 나라 문화를 비웃을 때가 아니다.
최상위 고객이 매출 대부분을 올려주는 백화점에서 을이 무릎을 꿇는 일은 특히 잦다. 2014년 겨울 경기도 부천의 한 백화점 VIP 고객인 모녀는 주차요원 아르바이트생의 무릎을 꿇게 했다. 이듬해 가을 인천의 한 백화점에서는 귀금속 매장 직원이 무상수리 여부를 놓고 고객이 항의하자 자진해서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백화점 ‘갑질 손님’ 문제는 여전히 자주 떠오르는 뉴스지만 사람들은 이제 놀라지도 않는다. 극소수 갑에게 특권을 몰아주는 구조에서 을이 인격 모독을 감내해야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모욕이 시대의 정서로 자리 잡은 사회에서 한화그룹 3세 김동선씨는 신입 변호사 머리채를 쥐어흔들었고, 박찬주 대장 부부는 공관병을 머슴 부리듯 했다. 콧대 바짝 세우는 갑과 땅만 바라보는 을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세상을 보게 된다.
모욕을 견뎌야 하는 을에게는 땅바닥에 초점을 둔 자신의 시선을 높이 올리려는 욕구가 생길 것이다. 멸시의 공포는 신분 상승 욕망을 낳는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틀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 신분 상승을 이룬 을은 갑질의 새로운 주체가 되기도 한다.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는 드라마 대사처럼 그동안 당한 수모를 애먼 사람에게 푼다. ‘내가 어떻게 이룬 성공인데’, ‘어떻게 합격한 시험인데’… 을은 지금까지 쏟은 노력을 보상받기 위해 자신의 갑질을 정당화한다.
미국 심리학자 제임스 길리건은 살인죄로 수감된 재소자들을 인터뷰했다. 재소자들은 범죄의 진짜 이유를 설명할 때 “그놈이 나를 깔봤다(disrespected)”는 표현을 가장 많이 썼다. 어느 범죄자는 “살인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었냐”는 질문에 “자부심, 존엄, 자존감”이라고 대답했다. 모멸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하지만 미래의 폭력을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다.
갑이 되어도 갑질하지 않는, 바람직한 신분 상승을 이룬 을은 또 다른 고난에 좌절한다. 을은 사회의 인정을 받기도 어렵다. ‘잘난 을’을 견디지 못하는 ‘못난 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득권층의 노무현 증오가 그랬다. 고졸 출신 서민 주제에 대통령까지 된 노무현은 탈권위를 외치며 서민이 주인인 세상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참여정부가 미약한 정치 기반으로 지지층의 기대를 저버리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자, 품위 때문에 말을 아꼈던 기득권은 그제야 ‘빼앗긴 권력’ 운운하며 모욕감을 드러냈다.
미국의 사회비평가 크리스토퍼 래시는 <엘리트의 반란과 민주주의의 배반>에서 물려받은 사회경제적 기득권이 성공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지만, 새로운 엘리트는 “오로지 자기 능력으로 성공했다는 ‘소설’을 쓴다”고 지적했다. 사회적 갑인 기득권층이 자기 노력과 힘만으로 성공을 이뤘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진짜 자기 노력으로 성공한 ‘을’에게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미국의 실제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폭스캐쳐>의 존 듀폰은 미국 최대 화학 재벌 듀폰의 상속자다. 권위적인 재벌가에서 외롭게 자라 명예에 집착하는 존은 뒤틀린 인정욕구로 주변의 을에게 갑질을 일삼는다. 자신이 후원하는 레슬링팀의 모든 스태프에게 인정받는 멘토가 되기를 바랐던 그는 진짜로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레슬링 코치 데이브 슐츠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당당한 을을 원하지 않는 갑은 살인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선택한다. “나한테 불만 있어?” 이런 말을 하며 데이브를 총살한 존은 속으로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을은 자신이 무릎을 꿇을 때 멸시의 공포를 느끼고, 갑은 그런 을이 무릎 펴고 일어날 때 모욕을 느낀다. 갑과 을 모두 모욕을 느끼지 않는 ‘유토피아’는 진짜 이 세상에 없는 걸까?
원문: 단비뉴스 / 필자: 민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