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가 보는 수영은 주로 옆모습이었다. 화폐계수기 너머 손님에게 미소짓고 열중하고 상냥하게 인사하는 얼굴. 들키지 않으려 곁눈질로 볼 때마다 상수는 창구 밖 손님들처럼 수영을 마주 앉아 보고 싶었다. 손님이 아닌, 동료도 아닌 다른 관계로.
수영의 눈동자는 조금 특이할 만큼 밝은 갈색이었다. 갈색 단발머리와 잘 어울렸고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있었다. 얼굴은 갸름했고 피부는 청결할 만큼 맑았다. 입술은 조금 얄팍했는데 빈약해 보이기보다 벚꽃잎 한 장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일솜씨도 훌륭했다. 진상들 앞에서도 어물대지 않고 정확히, 규정에 따라 응대했고 마감도 여축 없이 가장 먼저 끝냈다. 신입행원이던 상수에게는 진부하지만, 그야말로 여신이었다. 바로 곁에 있는 여신, 나직한 목소리를 듣고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어쩌면 사귈 수도 있는 여신. 같은 지점의 경필이 일찌감치 눈치채고 말했다.
“아서라, 임자 있으시다. 그것도 코 앞에.”
지점의 청원경찰이었다. 상현은 수영보다 두 살 어렸고 얼굴선이 곱고 반듯한 미남이었다. 키가 훤칠해 수영이 작은 키가 아닌데도 옆에 서면 제복셔츠 어깨선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수영의 연인, 그럴만한 선남이고 수영 역시 선녀였다. 수영은 이따금 창구에서 잠시 대기를 기다리다 상현과 눈이 마주치면 웃었다. 손님에게든 지점 안 어떤 사람에게든 실수로라도 짓지 않을 웃음, 광채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웃음이었다. 상현은 쑥쓰러운듯 잠시 딴곳을 보다가 슬쩍, 씩 웃어보였다.
상수는 마음을 접으려고 했다. 연인관계에는 지금껏 끼어든 적이 없었고 친구들이 그런 일을 무용담처럼 웅변할 때조차 한귀로 듣고, 흘렸다. 복잡해지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하지만 수영은 가까이 있었고 그 광채 같은 웃음도 너무 자주 보였다. 적응해야 하는 신입행원 생활은 외롭고 고달팠다. 게다가 상대방은 이기려 들면 못 이길 것도 없는 청원경찰이었다. 속물스러운, 구린 생각이었지만, 솔직히 창구 안과 밖에서 매일 보고 겪는 사회라는 것이 그랬다. 자신도 사회인, 더는 잘생긴 연적 앞에서 주눅부터 들던 대학생이 아니었다.
상수는 수영에게 도움을 청하기도하고 주기도 하면서 가깝게 지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예쁘고 잘 써지는 볼펜, 귀여운 컵 받침대 같은 사소하지만 매일 쓰게 되는 선물도 넌지시 건넸다. 하지만 수영이 쌍꺼풀 없는 눈과 벚꽃잎 한 장 즈려물고 있는 것 같은 입술로 환히 짓는 웃음은, 그 광채 같은 웃음은 볼 수 없었다. 수영과 더 마주치고 수영을 더 많이 생각할수록 수영이 상현에게만 그렇게 웃는 것은 더욱 선명해졌고, 속 쓰렸다. 좀처럼 가까워지지 못하자 조바심이 난 상수는 결국 회식자리에서 일을 그르쳤다. 칭찬을 해보려다 일을 어쩌면 그렇게 잘 하냐고, 꼭 텔러로 태어난 사람 같다는, 멍청한 소리를 하고 말았다. 수영의 얼굴이 써늘해졌다. 돌이킬 수 없고 모든 다리는 끊어졌다고, 상수는 직감했다. 절망감, 끊어진 다리와 함께 나락으로 추락하는 절망감뿐이었다. 그때 미경이 나섰다.
“자긴 신입으로 태어난 사람 같애. 맨날 마감도 제일 늦고, 고객들 앞에서는 강아지처럼 끙끙거리고, 그치?”
그 말에 사람들이 웃었고 수영의 얼굴도 조금 풀렸다. 하지만 이미 물 건너 간 것을, 상수는 알았다. 미경이 고맙지도 않았다. 아웃! 하고 자기 앞에서 시커먼 장갑 낀 주먹을 휘두르는 심판 같았다.
데면데면해진 수영이 다시 상수에게 살갑게 말을 건 것은 미경 때문이었다. “박 계장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앞뒤설명도 없이 푹 찔러 넣듯 물었지만, 알만한 말이었다. 상수는 미경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한 기수 선배에 나이는 두 살 어리고 하필 같은 학교 출신이라 학번은 후배여서, 다닐 때는 일면식도 없었지만, 두루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하지만 상수는 기선을 제압하려는 타자처럼 빈 방망이를 휘둘렀다.
“좋은 분이죠. 일도 잘하시고 용모도 깔끔, 단정하시고.”
하지만 수영의 눈에는 아무 동요도 없었고, 그뿐이냐는 실망의 기색만 얼핏 보였다. 상수는 더 크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진지하게 한번 만나봐도 좋을 것 같아요.”
“그렇죠?”
곧바로 수영의 얼굴에 반색이 반짝였다. 상수가 바라던 반응은 아니었다.
미경은 상수가 귀여웠다. 어리바리 구는 것도, 당황하면 목덜미가 빨개지는 것도, 뭐 하나 속일 것도 속일 수도 없어 보이는 주제에 가끔 세상 두려울 것 없다는듯 흰 치아를 드러내며 씩 웃는 허세도. 손가락은 멋있었다. 가늘지도 굵지도 않은, 견고하고 잘 조율된 기계장치를 연상시키는 손가락. 섬세한 미남이 아닌 것도 마음에 들었다. 다듬이돌처럼 단단하고 뭉툭하게 생긴 얼굴, 남자 같았다. 빽빽하다 못해 뻑뻑해 보이는 곱슬머리는 아무래도 좀 싫었지만. 미경은 상수를 빈정거리고 놀렸다. 그러고 싶었다. 자꾸 시비 걸고 싶고 그래서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는지 알고 싶었다. 다른 남자들에게 하듯 깍듯한 태도로 울타리를 둘러치고 싶지 않았다.
미경이 그렇게 쑥 들어올 때마다 상수는 별 것 아니라는듯 넘기거나 종종 재치있게 받아쳤다. 마음이 수영에게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 속내를 미경은 몰랐고, 좀처럼 빠지지 않지만 일단 빠지면 직진하는 것이 미경의 방식이었다. 애정이나 연인관계에 대해 상수가 말하는 사뭇 도덕적인 말과 기준이 미경을 안심시킨 것도 있었다.
미경은 점점 더 진지하고 솔직해졌다. 상수는 부담스럽지 않았다. 미경은 유능하고 자존감이 분명했고, 미인은 아니지만 예쁘다고 느낀 순간이 가끔 있었다. 게다가 착했다. 이렇게 착한 사람이었나 싶을 만큼, 알아갈수록 자신을 편하게 해주고 많은 것을 생색 없이 양보했다. 좋은 연애상대였다. 하지만 좋다고 꼭 갖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갖고 싶지 않다고 꼭 마다하는 것도 아니었다.
꽃내 묻힌 봄바람이 풍덩하게 불던 밤 상수는 미경의 집에 갔고, 잤다. 다음날 새벽 옷을 갈아입으러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다정한 통화를 끝내며 상수는 이제 단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된 이상 미안한 마음 때문에라도 미경에게 전념해야겠다고, 마음은 거기에 몸은 여기에 있다는 식의 졸렬한 남자는 되지 않겠다고.
수영은 상수를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보기와 달리 다감하고 섬세한 사람이라고 이전부터 생각은 했지만 자신에게 끊임없이 호감을 보였기 때문에 늘 불편하고 불안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친언니처럼 지내던 박 계장과, 아직 비밀이기는 했지만, 사내연애를 시작했고 자신이 다리 역할에 그 비밀까지 공유했기 때문에 상수는 박 계장 다음으로 편하고 친밀한 사람이 됐다.
셋이서, 가끔 상현과 넷이서 저녁을 먹기도 했고 시간이 더 지나면서는 네 사람이 함께 놀이공원이나 극장을 다녔다. 은행에서 상수와 둘만 잔업을 하게 되면 이전과 달리 친근하게 잡담을 하거나 끝나고 가볍게 맥주 한잔을 하기도 했다.
“저, 상현이랑 헤어질까요?”
반기 결산 막바지 작업으로 야근하던 중에 수영이 말했다. 이번에도 앞뒤 없이 푹 찌르고 들어왔지만 상수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헤어지고 싶지만, 걸리는 것이 있다. 설명은 간결했다. 상현은 경찰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다. 열심히 하지는 않는다. 준비하고 있다는 자신의 모습,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것 같다.
반면 수영은 마음이 급하다. 어서 원룸에서 벗어나 결혼하고 안정하고 싶다. 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직장으로 이직하려고 이력서도 계속 쓰고 있다. 자기 또래에 보고도 도무지 믿기지 않는 예금액 가진 사람들을 보면 자신이 너무 하찮은 인생 같지만, 더 당당하고 뚜렷해지고 싶어 노력 중이고 상현도 함께 더 노력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상현은 무사태평이다. 그런 말을 꺼내면 작작 좀 하라거나 무시한다. 화가 난다. 못나 보인다.
가끔 수영 자신도 유혹을 느낀다. 적당히 지금을, 젊음을 즐기고 싶은. 그럴 때마다 두렵다. 심장이 마비되는 것처럼 무섭다. 이렇게 자신마저 뒤처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아무 것도 개척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고 정규직 되기만을 고대하는 신세가 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들처럼, 사는 것처럼 살아보지도 못하고 늙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상수는 진지하게 들었다. 하지만 왜 미경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런 속내를 털어놓는지 의아하고 궁금했다. 한편 수영이 상현에게서 느끼는 결핍을 자신이라면 모두 채워줄 수 있다고, 그러고 싶다고 느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일렁거렸다. “저, 상현이랑 헤어질까요?” 그 말 한마디가 수영을 볼 때마다, 울렸다. 귓전이나 가슴만이 아니라 온몸에서, 또 수영에게서도. 괴롭지 않았다.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그래, 제발 어서!
두 사람만 만나는 일이 잦아졌고 속을 터놓고 하는 이야기의 심도도 깊어졌다. 수영은 상현에게서 느끼는 더 내밀한 고민들을 털어놨다. 같은 학원이나 독서실, 일주일에 한두번씩 모여 함께 공부하는 여자애들이 상현에게 자꾸 들이대고 상현은 싫지 않다는 투로 받아주고 있었다. 상수는, 상현을 너무 깎아내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수영의 얘기를 듣고 편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자신 역시 미경과 더욱 친밀해지면서 발견하게 된 엇갈림과 낯섦들을 털어놨다.
두 사람은 은행 근처 맥주집에서 벗어나 일식 요리집이나 칵테일 바에서 만났다. 화제는 더 다양해지고 분위기는 더 농밀해졌다. 상수는 아득한 야경이 보이는 고층 바에서 노을 같은 주황색 등 아래 수영의 갈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불빛 때문에 오렌지색으로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웃을 때 솟는 둥근 광대, 흰 조약돌처럼 반드러운 뺨, 표정이 풍부한 입술을 오로지 혼자, 손님도 동료도 아닌 다른 관계로, 마주보고 있었다. 집으로 바래다 주면서 한 택시를 탔을 때, 서로 다리가 닿았다.
수영이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상수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톰하고 까슬한 가을 옷의 섬유 너머로 전해지는 수영의 체온을 느꼈다. 그 살결을 상상했고 늘씬한 다리를 쓰다듬는 자신을 상상했다. 좁고 밀폐한 공간을 채우는 수영의 향기는 달콤하고 독한 술 같았다. 상수는 아찔했다. 선을 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선을 넘을 지도 모르겠다고 느꼈다.
경필은 다시 한번 아서라, 하고 말했다. 텔러랑 어설프게 엮이는 게 아니라고, 박 계장 정도면 훌륭한 연애상대이자 결혼 상대 아니냐고. 경고도 했다.
“박 계장이 모를 것 같냐?”
미경은 모르는 것 같았다. 통화 때마다 새삼 어디냐고, 누구와 있는지 물어대는 일이 잦기는 했지만. 상수가 그런 걸 왜 자꾸 묻느냐고 되물으면, 연인 간의 그렇고 그런 싸움이 일어났다. 당장 가서 사과하고 안아주면 풀리는. 하지만 상수는 점점 더 귀찮아졌고 미경 역시 갈수록 쉽게 마음을 풀지 않았다.
상수는 조정기, 어쩌면 권태기라고 생각했다. 모든 연인이 겪는, 종종 극복하지 못하고 그렇게 헤어지기도 하는. 토요일 오후, 상수는 수영을 만났고 백화점에 가서 지갑 하나를 선물했다. 파란색, 부드러운 송아지 가죽에 모서리를 은장으로 처리한 지갑이었다. 수영에게 처음으로 선물다운 선물을 하게 된 것도 기뻤지만 여러가지 중에서 그것을 고른 수영의 안목이 더 기뻤다.
그날 저녁 상수는 자신이 다니던 대학교 교정을 수영과 함께 걸었다. 맥주 한 캔씩을 들고 미지근한 늦여름 바람을 맞으며 잘난 척처럼 들리지 않을 대학생 때 이야기를 했다. 수영은 재미있게 들었고 본관을 돌아 내려올 즈음에는 자신도 이 정도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고, 그때 잠깐 엇나가지 않았으면 그랬을 거라고 말했다.
“그랬을 것 같아.”
상수가 말했다.
“정말?”
상수가 정말 그렇다고, 일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고 말하자 기쁘게 웃었다.
학교 앞 술집에서 한잔하고 두 사람은 신촌로터리로 걸어 나왔다. 서점 앞 인도에 피아노 한 대가 있었다. 수영은 피아노로 가 선 채로 드뷔시의 곡을 쳤다. 많지는 않지만 지나가던 사람들이 멈춰 서서 수영을 지켜봤다. 그럴 만한 미모였고 연주도 제법 괜찮았다. 사람들은 귀기울여 들었고 연주가 끝나자 작고 산발적이기는 했지만 박수를 보냈다. 수영은 빨개진 얼굴로 상수에게 돌아갔다. 사람들은 상수를 바라봤고 상수는 그 시선들을 느끼며 수영의 손을 잡았다. 수영도 손을 맞잡았고 가까이, 거의 포옹할듯 몸을 붙였다. 상수는 온몸에서, 한강 위로 솟구치는 불꽃처럼 예쁘고 귀여운 빛의 무늬들이 환하게 펑펑 소리를 내며 터지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밝고 좁은 거리를 조금 더 걸었다. 상수가 바래다 주고 싶다고 말했다. 수영은 마다했다. 상현을 만나기로 한 걸까? 집에 기다리고 있는 걸까? 상수는 날카로운 질투를 느꼈다. 하지만 추궁하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자신과 만나지 않겠냐고. 수영은 머뭇거렸다. 분명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상수의 눈을, 자기 마음을 알아달라는듯 보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말했다. “안 되겠어, 그건 아닌 것 같아.”
“완전 여우네. 지갑은 받고 마음은 안 받겠다고?”
경필이 말했다.
“조심해라, 걔 보통 아닌 애다.”
상수는 그런 것을 기대하고 선물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럼 한번 자자고?”
“그런 거 아니라니까!”
상수는 경필을 똑바로 봤다.
“난 제대로 사귀면 사귀었지, 그런 건 안해. 우리…… 됐고, 어쨌든 그런 건 질색이야. 그리고! 난 걔 좋아해, 좋아한다고. 처음부터 그랬잖아.”
막상 말로 하고 나자 상수는 당황스러웠지만 경필은 그저, 담배를 털어 껐다.
“뭐,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다들 한번 사는 인생인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야지.”
수영이 상현과 헤어졌다고 말한 날, 상수는 촛불이 담긴 작은 어항 같은 유리병 옆으로 수영의 손을 잡았고 수영은 손을 빼지 않았다. 따스한 취기와 연약한 촛불빛에 발그레해진 얼굴. 상수는 좋아했고 좋아한다고 말했다. 수영은 상수의 눈을 봤고, 웃었다. 광채 같은 웃음은 아니었지만 그 웃음까지 멀지 않은 웃음이었다. 창문이 거의 열리고 있었다. 상수는 미경과 관계를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지 마,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하지만 상수를 봤고 손을 빼지도 않았다.
할 말이 있다고, 상수가 미경과 약속을 잡은 그날 낮, 상현이 은행에서 수영의 뺨을 때렸다. “나쁜 년!” 상현은 그 길로 은행을 나갔다. 고객이라는 것들이 텔러의 뺨을 때리거나 창구에 가방을 집어던지는 일 다반사였지만 청원경찰이 텔러 뺨을 때린 것은 처음 본, 기가 찬 지점장은 수영에게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가라고 말했다. 수영은 은행을 나섰다. 상수가 말을 걸어 볼 새도 없이. 상수는 틈 날 때마다 수영에게 계속 전화했다. 수영은 받지 않았다. 상수는 미칠 것 같았다. 수영이 걱정됐고, 그 사실이 새삼 자신이 얼마나 수영을 좋아하는지 말해줬다, 또 그 일이 자기 때문인지 걱정스러웠다.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입을 맞춘 것도, 잠을 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대낮에 은행에서 수영의 뺨을 때릴 정도로 미친놈이었다. 지점장에게 허튼 소리라도 지껄인다면? 놈은 알바지만 자기는 정규직이었다. 하지만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미경이 상현을 통해 이 일을 알게 되는 상황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수영은 저녁이 다 돼서야, 상수가 스무통 가까이 전화를 하고 걱정된다고 별 일 없는지만 말해달라고 잇달아 문자메시지를 보낸 다음에야 문자메시지로 답했다. 자기는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그리고 지금 상현과 함께 있다고.
그날 저녁 미경은, 한번 할 법한 낮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상수를 세심하게 챙겼고 지난 주말 언니 집에 가서 찍은 조카 사진을 보여줬다. 상수는 온통 수영만 생각하고 있었다. 수영이 강제로 상현과 함께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런 것이라면 함께 있다고 말할 리 없었다. 상현도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그래도, 남자새끼들이란 게 꼭지가 돌면 또 몰랐다.
걱정스러웠다. 미칠 것 같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질투가 고양이 발톱처럼 속을 할퀴고 그어댔다. 이럴 때 수영은 어떻게 자신이 아니라 그 새끼와 함께 있을 수 있나, 도대체 왜, 어떻게 그 둘이? 내내 불안하고 심란해 보이던 상수에게, 미경은 같이 있자고 말했다. 상수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미경의 집으로 갔다. 씻고 나온 미경을 봤을 때 상수는 질투와 욕망을 동시에 느꼈다. 행위는 격렬했고 짧았다. 끝나고 난 뒤 미경은 담담하게 물었다. 상수를 보지 않고, 각오를 한 사람처럼. “무슨 일이야?” 상수는 말했다. 은행일 때문에 힘들다고, 요즘 딴 생각이 너무 많이 든다고, 하지만 일반 회사로 가거나 다른 일을 하게 되면 너는 어떻게 볼지, 다른 연인들처럼 자연스럽고 무심하게 차츰 멀어지는 건 아닌지 모르고 두렵다고, 그 모든 것 때문에 요즘 네게 소홀하던 거라고.
다음날 상현은 정시에 출근했다. 수영도 출근했다. 상수와 미경도 마찬가지였고, 그 날은 아무 일도 없었다. 하지만 하루가 더 지나고 점심시간이 되기 조금 전, 상현이 지져버릴 듯한 눈으로 수영을 봤고, 불러냈다. 수영이 나갔다. 옆 창구에 있던 상수도 급히 뒤따라 갔다. 상수가 이층 화장실 앞에 올라섰을 때, 일은 이미 일어난 뒤였다. 수영은 맞아서 벌게진 뺨을 감싼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상현은 씩씩대며 수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상수가 당장 상현의 멱살을 잡고 벽에 밀쳤다.
“무슨 짓이야, 이게!”
“놔, 이거 놓으라고, 네가 뭔데 끼어들어? 네가 뭐라고!”
상현은 수영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이 새끼도야? 이 새끼랑도 붙어 먹었어? 오경필이 그 씹새끼도 모자라서 이 새끼까지한테도 벌려줬어?”
상현의 멱살을 쥔 손이 풀렸다. 상수는 무슨 말이냐는 눈으로 수영을 봤다. 수영은 말없이 상수를 지나쳐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씨발! 상현은 화장실 문을 후려치고 자리를 떴다. 상수는 계단에 주저 앉아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말해줬지. 몇번 잤고 어디서 잤는지.”
경필이 담배 연기를 내불며 말했다.
“알고 왔더라고, 전화기 고장난 거 대신 수리해주러 갔다가 뭘 봤나 봐. 그제 그 일이, 그거더구만. 새끼, 그런다고 청원경찰 주제에 텔러 뺨을 날려?”
경필은 꽁초를 던지고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제 나한테 왔길래 잡아 뗐어. 증거대라. 증거 갖고 와서 얘기하라. 없거든, 나는 알거든? 그래도 지랄하대? 내가 물었어. 감당할 수 있겠냐고, 걔가 어떤 앤지 알면 감당이 되겠냐고, 잘 생각해보라 했지. 몰라서 나은 게 있다고, 좋게 타일렀어, 나는. 근데 알아야겠대. 다, 모조리. 그래서 조건을 걸었지. 다, 모조리 말해주겠다. 대신 나한테 어떤 짓도 해서는 안 된다. 개소리 말래. 자기가 지점장한테도 은행에도 다 말할 거래. 내가 같잖아서 말해 보라고, 대신 증거는 꼭 들이대서 말해야 할 거라고 했지. 아니면 아무도 안 믿을 거고, 그 순간 넌 좆되는 거라고. 난 당장 소송 걸 거고 그럼 넌 여기 관두는 정도가 아니라 경찰 시험도 못 보게 될 테니까. 그래 개뻥이지, 근데 먹히더라고. 전화기 들어서 녹음까지 했어. 나한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겠다고. 그러니 더 겁을 집어 먹어선,”
경필은 피식거렸다.
“여차하면 몇푼 쥐어줄까 했는데, 돈도 안들더라고. 걔는 법도 모르면서 뭔 경찰이 된다고 하는지, 얼굴만 팔고 살아도 평생 편하게 살텐데.”
상수가 소리쳤다.
“그래서? 넌 걔한테 뭔 짓을 한 거야? 뭔 짓을 어떻게 한 거냐고!”
“말했잖아? 잤어, 잤다고. 더 궁금해? 다, 모조리 알려줘?”
상수는 경필을 노려봤다.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기도 했다. 그 주저를, 경필은 태연하게 웃으며 봤다.
“아서라, 감당하지 못할 건 아서야 하는 거다.”
상수는 경필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미친 새끼, 나쁜 이 개새끼!”
잠시 비틀거리던 경필은 상수를 어처구니 없다는듯 쳐다봤다. 성큼성큼 걸어와 상수의 뺨을 서류뭉치 같은 손으로 단번에 날렸다.
“미친새끼,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이 병신아. 내가 진즉 알아봤다고, 너한테 지갑 받고 입닦았다 했을 때부터 그게 썅년일 걸. 넌 나 아니었으면 지금 박 계장이랑 깨지고 골로 가는 고속버스 탔어, 개뿔 그런 줄도 모르고 희희낙락하면서, 알아? 그리고 여기서 지금 제일 나쁜 놈은 내가 아니라 너야, 병신아. 박 계장한테 물어봐 줘? 그래 줄까?”
경필은 담뱃진이 올라온듯 걸게 가래를 뱉었다.
“오해할까봐 말해두는데, 난 아무것도 강제로 안 했다. 나 하고 싶은 대로 했고, 수영이 걔도 저하고 싶은 대로 했어. 한번 사는 인생 각자 하고 싶은 대로. 알겠냐, 병신?”
수영이 먼저 사직서를 냈다. 며칠 뒤 상현도 그만뒀다. 상현이 그만둔 다음날 경필은 이틀 병가를 냈다. 다시 출근했을 때는 얼굴이 엉망이었다. 경필은 술집에서 미친놈을 만났다고 지점장에게 말했고 창구근무를 면제 받자 퍽 죄송한 얼굴을 보였지만 돌아서서는 휘파람이라도 불듯 유유히 금고실로 갔다. 상수는 경필과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았고 그렇게 1년쯤 지났을 무렵 자원해 다른 지점으로 배치받았다. 얼마 뒤 미경과 결혼했다. 경필은 청첩장을 받지 못했지만 결혼식에 참석했고 다른 동기들과 함께 사진도 찍었다. 자신을 잊지 말라는듯.
상수는 그 일을 잊지 못했다. 한동안 자신보다 더 똑똑하거나 경험 많아 보이는 사람과 친해지면 그 일을 털어놨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때 수영이 왜 그랬을지 물어봤다. 대답은 한결 같았다. “걔가 썅년이네.” 많지 않았지만, 여자들조차 그렇게 말했다. 상수의 대답도 한결 같았다. “역시, 그런 걸까요?”
처음 한동안, 그년이 나쁜 거고 네 잘못이 아니라는 답을 들었을 때는 속이 다 시원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만 지나면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왜 그랬을까, 나한테 왜 그랬을까? 한 친구는 그게 다 못 자서, 너만 걔랑 못 자 봐서 그런 거라고 말했다. 정말 그런 걸까? 하지만 아닌 것 같았다.
궁금했다. 그냥 궁금했다. 어떨 때는 정말 미치도록 궁금해 당장 전화해 보자고, 어디든 갈 테니 얘기 좀 하자고, 그렇게 말하고 싶기도 했다. 어쩐지 미경이라면, 그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미경은 그 일에 관해 물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미경 역시 수영이라는 이름을 꺼내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그런 사람이 있지도 않았다는듯, 완강하게.
3년쯤 지났을 때, 상수는 나름대로 납득할 수 있는 답을 찾았다. 점심시간 혼자 사무실에 있다가, 이층 창밖으로 한겨울 바람이 부는 휑한 사거리를 보면서. 그때 수영은 너무 어렸고 그래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갖고 싶어할 만큼 약하고 어리석었다고. 자신이 수영과 미경 사이에서 그랬듯. 그렇게 생각하면 수영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쁜 년이라는, 편리하되 안달하고 질투하고 행복했던 모든 순간을 깡그리 쓰레기 통으로 쓸어넣는 답도 폐기할 수 있었다.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고 수영에게 연락해 묻고 싶은 충동도 사라졌다.
상수가 여의도 스타벅스에서 우연히 수영과 마주친 것은 수영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어쩌다 전해 들은지에서도 한참 지난 후였고 그 일에서도 근 6, 7년이 흐른 뒤였다. 하지만 상수는 사연이 있어 연락이 끊긴 사람들이 그러듯, 가벼운 눈인사로 지나치려는 수영을 불렀다. 한번 만나면 좋겠다고 먼저 전화번호를 주며 편할 때 연락 달라고 말했다. 그래도, 한번은 봤으면 좋겠다고. 며칠 뒤 수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홉시 넘어 지점을 나서자 여름비가 오고 있었다. 상수는 강남으로 차를 몰았다. 시간이 늦었지만 비 때문인지 길이 막혔다. 상수는 담담한 얼굴로 신호등을 봤다. 괜히 보자고 한 건 아닐까? 와이퍼가 빗물을 밀어내자 흐릿해진 강남대로의 풍경이 늘어선 붉은 미등들과 함께 또렷해졌다.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풍경은 점묘화로 바뀌었고 이내 수채화처럼 번졌다가 흘러내렸다. 다시 와이퍼가 움직였다. 그렇게 지나가고 겹쳐지고 지워진 일이었다. 그래도 궁금하기는 했다. 왜 그랬는지,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어쩔 수 없었다.
상수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마주 앉는 자리보다 나란히 창밖을 보는 자리가 좋을 것 같았다. 자리에 앉자 젖은 통유리 창 밖으로 가로등과 주변 고층 건물의 불빛들이,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우비를 덮어 쓰고 가는 배달 오토바이가 보였다.
엔진소리가 멀찍이 들렸다. 마주 앉는 자리 쪽은 붐볐다. 말소리에 음악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대부분 자신과 비슷하거나 조금 어려보였다. 흔들리는 향초 불빛 속에서 여자들은 웃거나 떠들었고 고개를 내밀고 작게 말하거나 가만히 상대방을 바라봤다. 빗물 흐르는 창처럼 정서적 투영이 있는 둥근 눈. 상수는 수영이 그렇게 자신을 보던 밤을 떠올렸다. 납작한 초가 담긴, 작은 어항 같은 유리병 옆으로 서로 잡고 만지작거리던 손도. 그날 수영과 잤다면 그 일의 어떤 부분이, 또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오래 전에 털어버렸다고 여긴 그 질문이 떠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수영은 조금 늦게 도착했다. 뒤로 묶은 머리에 가슴이 패인 흰 티셔츠, 하늘색 리넨 셔츠를 재킷처럼 걸치고 있었다. 상수는 김릿을 시럽 없이 한 잔 더 주문했고 수영은 마르가리타를 주문했다. 잠시 어색했지만, 두 사람이 알고 있는 사람들 얘기로 대화가 풀려나갔다. 상수가 얼마 전 승진한 얘기를 하고 수영이 미국공인회계사 자격증을 얻어 외국계 회사에 취직한 얘기를 하자 분위기는 더욱 좋아졌지만, 그쯤에서 두 사람 모두 화제가 딱 떨어진 기분을 느꼈다. 나비 한 마리가 앞을 지나가는 것 같은 침묵 속에 두 사람은 잔을 비웠고 하나씩 더 주문했다. 술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상수는 추궁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그때 일, 너한테는 어떤 거였어?”
수영은 어떤 일을 얘기하는 건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상수는 의아해 하며 그 일을 요약해 말했다. 왜 자신이 이렇게 설명해야 하는지, 수영이 어떻게 모르겠다고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야기하고 싶었고 이야기 하다보니, 그 일이 예전과 달리 혼란스럽지 않게, 논리정연하게 풀려나왔다. 감정도 동요하지 않았다. 정말 지나 있었고 그것을 그 비슷한 다른 어떤 일보다 선명히 실감할 수 있었다.
상수는 이야기를 계속 했고 자신이 그 일에 관해 얼마나 궁금해 했는지, 그리고 자신 나름대로 답이라고 생각한 것까지 말했다. 어쩌면 그것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정말 맞게 생각했는지, 그것에 수영도 동의하는지, 알고 싶었다고.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수영은 웃었다. 턱을 괴고 창밖을 보고, 둥근 마르가리타 잔을 만지작거리며.
“잘 됐다. 그리고 어쩐지 고마운 마음도 드네. 하지만,”
수영은 창밖에 눈을 둔 채 말했다.
“난 그때 일이, 그 이년 정도 되는 일이 필름이 끊긴 것처럼 생각이 안나.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나.”
상수는 분노를 느꼈지만, 미미했다. 수영의 말이 믿긴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당사자가 기억이 안 난다면, 안 나는 것이다. 새겨두고 싶을 만한 기억도 아니다. 자신이라도 어서 넘겨 덮어버리고 싶을 책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허탈했다. 한숨을 밀어내며 상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넌 그랬구나.”
맥이 풀렸고 상수는 더 할 수 있는 말을 생각할 수 없었다.
“나, 이혼했어.”
수영이 말했다.
“내가 먼저하자고 했어.”
손목을 긋는 것 같은 웃음.
“이상한 게 뭐냐면, 할 때는 정말 안 하면 못 살겠다고, 더는 이렇게 못 살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쯤 되니 꼭 그렇지도 않다는 거야. 난 잘 모르겠어. 뭐가 중요한지, 아닌지. 또 뭐가 맞고, 아닌지. 다 지나갔고 그렇게 지나간다는 거만 분명한 거 아닐까? 이 둥근 술잔에 비친 밤의 불빛들처럼 말이야.”
수영은 마르가리타 잔의 테두리를 매만졌다. 묻어난 설탕이 손가락 끝에서 반짝거렸다.
허무, 아주 예쁜 허무. 상수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납득할 수 있었다. 수영이 끝내 자신과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도.
택시는 곧 잡혔다. “들어가.” 다시 보자는 말은 상수도, 수영도 하지 않았다. 상수가 택시 문을 열고 서 있을 때 우산을 접은 수영은 몸을 넣기 전 고개를 돌려 상수를 봤다. 비어 있던 상수의 손을 꼭 잡았다가, 상수가 반응하기 전에 놨다. 택시는 떠났다. 아주 차가운 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