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7월, 서울 종로구에 대한민국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이 등장합니다. 무허가 판잣집과 윤락업소가 즐비했던 지역에 새로운 명물이 탄생한 것입니다. ‘세운상가’라는 이름은 ‘불도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재개발 사업을 밀어붙인 김현옥 서울시장이 ‘세상의 기운이 다 모여라’는 뜻으로 지었습니다.
세운상가는 개관식 때 대통령과 영부인이 참석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당시 남대문에 있었던 신세계 미도파와 종로 화신, 신신 백화점 등의 건물이 낡고 소매점 중심이었던 데 반해, 세운상가는 새로운 건물에 가격이 도매급으로 저렴해 많은 시민이 찾았습니다.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던 텔레비전 광고를 했고 상품 경매권도 발행했습니다. ‘가격표시 정찰제’라는 현대식 경영 방식도 도입됐습니다.
1970년대는 찾아보기 힘든 국회의원 사무실, 유흥업소, 교회, 사우나, 슈퍼마켓, 미용체조실, 실내골프장 등이 입점하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면서 상가 임대료와 땅값은 치솟았고, 세운상가 아파트는 높은 프리미엄으로 거래됐습니다.
전자·컴퓨터 산업의 메카, 강제 이주정책에 몰락하다
세운상가는 종합 가전제품 상가이자 전자 산업 및 컴퓨터 산업의 메카였습니다. 전자기기와 부품,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찾는 사람으로 항상 북적였습니다. 한때는 ‘미사일과 잠수함도 만들 수 있다’는 얘기가 돌 정도로 못 만드는 제품이 없었습니다.
당시 최첨단이었던 컴퓨터 산업도 세운상가에서 일어났습니다. 국내 벤처기업 1호 ‘TG삼보컴퓨터’와 ‘한글과컴퓨터’ ‘코맥스’도 이곳에서 시작했습니다. 마치 ‘한국의 실리콘 밸리’와 같았습니다. 당시 중·고등학생과 젊은이들은 주말마다 세운상가를 드나들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의 추억을 기억하는 세대를 ‘세운상가 키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잘 나가던 ‘세운상가’의 몰락은 정부가 86아시안게임을 계기로 전기.전자 업종을 ‘도심부적격 업종’으로 지정해 ‘용산전자상가’로 강제 이전되면서 본격화됐습니다.
1987년 정부는 수도권 정비 계획에 따라 용산 농수산물 시장은 송파구 가락동으로 세운상가의 전기, 전자 상인들은 용산으로 강제로 이주시킵니다. 이주를 거부하는 상인에게는 세무조사 등의 방식으로 강하게 압력을 가했고, 그래서 세운상가 일부 상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용산으로 이전했습니다.
처음에는 용산전자상가의 인기가 높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PC 통신 이용자가 늘어나면서 점차 활기를 찾아갔습니다. 용산전자상가의 상권이 새롭게 형성되면서 세운상가를 이용하는 시민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특히 IMF 외환위기 당시 세운상가 상인들의 주거래처인 중소기업이 무너지면서 세운상가의 몰락은 더 가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상인들이 점차 떠나면서 세운상가는 2000년대 들어서는 슬럼화됐고, 점점 도심의 흉물로 전락했습니다.
시작부터 잘못된 건축, 철거와 공원만으로는 살릴 수 없었다
원래 세운상가는 입체도시를 만들고자 하는 거창한 계획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건설사별로 건물을 따로 짓는 바람에 처음 의도와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설계를 맡았던 건축가 김수근씨는 도시 미관을 생각하며 보행자 도로를 확보하며 상가 내 인공정원 등을 고려했습니다. 그러나 공공시설이 갖는 의미는 퇴색해버리고 오로지 상업적인 면만 강조하다 보니 투박하고 위압감을 주는 건물로 바뀌었습니다.
1967년 세운상가, 현대상가 건립을 시작으로 72년 청계상가, 대림상가, 삼풍상가, 풍전호텔, 신성상가, 진양상가로 건립된 세운상가군은 연관성도 없이 그저 각각의 건물이 부동산으로서의 가치만을 추구하게 됐습니다.
부동산의 가치 하락과 상권 퇴색으로 무너지는 세운상가는 철거와 재개발 사업 등을 통해 변신을 꾀했습니다. 그러나 2005년 청계천 복원 당시 철거됐던 세운~대림상가 간 3층 높이 공중보행교 사례에서 보듯이 보행 친화적인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2006년 오세훈 서울시장은 세운상가를 철거하고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당시 입주 상인들의 반대에도 2008년부터 일부 종로 세운상가부터 철거되고, ‘세운 초록 띠 공원’이 조성됐습니다.
건물이 슬럼화됐다고 하지만 엄연히 상인들이 영업하는 공간이었기에 철거는 늘 반발의 대상이 됐습니다. 또한 철거로 인해 지역 상권이 무너지는 결과도 초래하게 됐습니다.
수차례 반복되는 세운상가 철거와 재개발 계획은 지역 주민들과 상인들의 반감을 쌓게 됐고, 현실과 맞지 않는 계획이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세운상가, 4차산업혁명 시대를 따라갈 수 있을까?
서울시는 2014년부터 시민의 보행이 가능해 다시 세운상가를 찾아 함께 상생하는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추진했습니다. 시민의 보행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종로에서 대림상가 구간을 공공 공간으로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세운 보행교’나 ‘옥상 전망대’,’보행데크’,’세운광장’ 등은 초기 설계 의도가 다시 부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주민들과 상인들이 원하는 상권을 부활시키기 위한 ‘도시 재생’입니다.
서울시의 ‘다시․세운 프로젝트’에서 주목할 부분은 스타트업들의 창작, 개발을 지원하는 동시에 이루어진 기존 기술자들과의 협업입니다.
전자산업의 메카였던 세운상가에는 오랜 시간 전문 분야에서 활동했던 기술자들이 있습니다. 사실 이들은 외국이라면 ‘마이스터’라고 불리며 대접을 받았겠지만, 한국에서는 그냥 변두리 뒷골목 상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서울시는 세운상가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기술자 중에서 ‘세운 마이스터 16인’을 선정했습니다. ‘세운 마이스터’는 앞으로 ‘청소년기술대안학교’,’스타트업’ 등 교육 프로그램의 강사 및 멘토로 활동하며 청년 창업자에게 기술 협력 등의 활동을 하게 됩니다.
세운상가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것은 상류층의 고급 아파트와 같은 부동산이 아니었습니다. IT 산업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기술이었습니다. 미사일, 잠수함까지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신뢰받는 기술이 있었기에 한국 IT 산업의 시작을 이끌어 낸 것입니다.
진희선 서울시 도시재생본부장은 “다시세운 프로젝트는 기술장인과 청년 스타트업, 산업기술 전문가, 그리고 미래세대를 이끌 청소년들까지, 제조산업의 발전과 제작기술의 확산이라는 목표아래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의미가 있다”며 “서울시는 앞으로도 세운상가군을 4차산업혁명의 혁신기지로 발전시켜나가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세운상가’가 단순 외형의 도시 재생으로 끝날지, IT산업의 태생지로서의 역할을 다시 해낼지는 불분명 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기술력을 가진 세운상가 장인들과 젊은 창업자가 힘을 합치도록 유도한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시민들이 찾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원문: 아이엠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