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기분이 좋았다. 수와 진은 막 얼큰히 취해서 길을 걷는 중이었다. 진은 연신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렇게만 살면 좋겠다. 맛있는 것도 배불리 먹고.”
추리닝 바람의 고시생들이 담배를 물고 그들을 지나쳤다. 취기가 올라온 그의 눈에는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 행복해져 있었다. 진은 취기에 의미 없는 말을 반복했다.
“아까 저 사람 뚱뚱한 것 봤어? 아까 저 사람 귀걸이 한 것 봤어? 아까 저 사람 입은 옷 봤어?”
수도 취기에 대답했다.
“으응 다 봤어. 좋다. 좋다. 다 좋다.”
그들이 수없이 지나쳤던 거리였다. 수는 지독하게 낙방하는 소설가 지망생이었다. 벌이가 전혀 없었다. 집에서 보내주는 돈은 끊긴지 오래라, 집값이 가장 싼 이곳까지 들어왔다. 수는 여기서 우연히 위층 여자와 인사를 나누었고, 밥을 먹었고, 술을 마셨고, 연인이 되었다.
진이었다. 진은 9급 공무원 준비생이었고, 작년까지 세 번 떨어졌으며, 어제가 네번째였다. 서로 가난했고, 수와 진은 서로를 이해했다. 매번 궁상맞은 데이트를 반복했다. 수는 그래도 오늘만은, 네번째 낙방을 맞은 진을 어떻게든 위로하고 싶었다.
“행복해?”
“응. 행복해.”
수는 남은 현금을 속으로 세어보았다. 고깃집에서 계산을 마치고도 제법 큰 돈이 남았다. 얼마 전 수에게 친한 형이 일거리를 하나 제안했다. 트럭을 타고 지방 행사장에 내려가 이틀간 철제 천막을 치고 걷으면 되는 일이었다. 몸은 고됐지만 보수가 괜찮았다. 수는 돌아와 하루를 앓아누웠다.
정신을 차리니 밥값을 제하고도 돈이 남았다. 수의 생활에서 좀처럼 손에 쥐기 어려운 현금이었다. 수는 이 돈을 남들처럼 쓰기로 했다. 진과 함께 식당에서 고기를 구워먹었다. 잠시나마 제법 남들처럼 먹고 마시는 기분이 들었다.
“저것 봐. 마트 세일한다.”
진은 삼겹살과 소주와 마늘 향이 묘하게 뒤섞인 입으로 말했다.
“정리 세일이래. 진짜 싸다.”
수는 늘 가던 고시마트를 보았다. 평소에도 요란했지만, 더욱 요란한 팻말이 붙어 있었다.
“가자, 우리 이 기회에 군것질거리도 잔뜩 사놓자.”
마트에 들어가니 사람들이 허겁지겁 물건을 바구니에 쓸어 담고 있었다. 술이 약한 진은 비틀거리면서 바구니를 들고 왔다. 음료와 불량식품과 사탕과 껌과 물을 부어 먹는 인스턴트 도시락들. 전부 반값이었다. 마트 안의 사람들은 전쟁 준비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것 봐. 이 주스, 늘 4000원이었는데 2000원에 파네. 이 맛이 너무 궁금했어.”
“마음껏 사, 오늘은.”
진은 벌써 바구니에 음료수와 과자를 밀어넣고 있었다. 수도 바구니를 하나 들고 나섰다. 수중에 돈이 있을 때 군것질거리를 잔뜩 마련하고 싶었다. 둘은 취기로 수북하게 물건을 담았다.
“아, 이것 봐. 사탕이 100원도 안 해.”
수는 막대 사탕을 오십 개쯤 바구니에 쓸어담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 물건을 전부 살 수 있는 부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흡족했다.
물건을 고르려는 사람들과, 계산을 치르려는 사람들로 혼잡한 틈에 수북한 바구니를 들고 줄을 섰다. 취기 어린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아, 좋다.”
“시험만 붙으면 집에 맨날 쌓아두고 살자.”
“우리 나가자마자 이 사탕 까먹자.”
수는 이번에도 현금을 내밀었다. 명세표는 아주 길게 뽑혀 나왔다.
“영수증은 봉지에 넣어주세요.”
수는 이미 부자가 된 기분이었고 이 영수증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그들은 큰 검은 봉지 네 개를 들고 밖에 나왔다. 바람이 약간 싸늘했다. 진은 환희가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다.
“집에 가자.”
사탕을 하나씩 문 그들은 버스 정류장으로 걸었다. 수는 진이 무거운 봉지를 들고 가는 것이 약간 안쓰러웠다.
“무겁지 않아?”
“괜찮아. 이까짓 것.”
수는 아까부터 검은 비닐봉지가 무거워지고 있단 생각을 했다. 진은 비틀거리면서도 봉지를 제법 잘 들고 따라왔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 그들은 바닥에 봉지를 턱 내려놓았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수는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버스가 있나?”
“난 몰라. 난 몰라.”
어지러워 스마트폰으로 막차 시간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정류장 근처를 배회하며 삼십 분정도 시간을 보냈다. 사람도 버스도 오지 않았다. 쌀쌀한 공기에 조금 정신이 들었다.
“수, 버스가 끊겼나보다.”
수는 돈이 하나도 안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택시비 없는데, 걸어가야겠다.”
고시원은 삼십 분은 더 걸어가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오랜만에 마신 술이 그들의 몸을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걸어야지, 별수 있겠어.”
두 사람은 크게 부푼 검은 봉지 다발을 들고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할인받아 산 주스와 백 여 개의 사탕이 짤랑거렸다. 대책 없이 고른 군것질거리는 그들의 손아귀를 힘차게 누르고 있었다. 길거리의 사람들이 더이상 행복하지 않았다. 봉지는 점차 무거워졌고, 싸늘한 바람이 그들을 맨정신으로 만들고 있었다.
“잠깐 쉬었다 가자. 수, 잠깐.”
진은 나른함을 느껴 길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아귀에서 봉지는 급하게 빠져나갔다. 검은 봉지가 찢어지며 사탕들이 차도로 쏟아졌다. 막 트럭 한 대가 내용물을 짓이기고 지나가, 바닥에서부터 들쩍지근한 불량식품 냄새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남궁인 작가는 응급과 긴급이 일상인 응급실에서 응급 의학과 의사로 근무하며 삶과 죽음 어디에도 완벽히 속하지 않는 순간들을 포착해 글로 옮깁니다. 출간작으로는 『만약은 없다』, 『지독한 하루』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