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업(家業)의 마침표
부모님은 수개월 전, 20년을 넘어 25년째를 바라보던 등산장비점을 정리하셨다.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진 아웃도어 대리점들 속에서도 별다른 상술 없이 그저 정직하고 친절하게 영업을 해오셨기 때문인지 소중한 단골들이 가게를 꾸준히 찾아주셨다. 하지만 청주 성안길 상권의 쇠퇴와 함께 찾아온 현대백화점, 아울렛의 개장은 영업에 치명타로 작용했다.
산을 타다가 만난 남녀가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 속에서 넘칠 것도 없지만 부족한 것도 없이 한 외아들이 자랄 수 있게 해주었던 고마운 가게. 2016년 8월의 마지막 주, 나는 소중한 가게에 작별을 고하기 위해서 청주를 방문했다.
메아리산악, 메아리산장, 속리산장, 그리고 트렉스타 청주점에 이르기까지 네 번의 상호 변경. 지하상가 정류장 바로 앞에서 영업을 시작했고, 바로 맞은편 하나은행 옆 건물로 자리를 옮기고, 끝으로 중앙로와 성안로가 만나는 지점에서 영업을 계속하기까지……
나의 기억에도 생생한 가게의 이야기가 부모님에게는 얼마나 복잡미묘한 존재로 남게 될지, 나는 그 무게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가게의 정면 쇼윈도, 내부 모습 하나하나 사진으로 남기면서 나는 나를 키워준 가게에 작별을 고했다. 거기에 더해 나를 키워주신 수많은 이름 모를 손님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마음속으로) 드렸다.
‘폐점 세일’이라는 네 글자가 가슴을 때렸고, 9월이 오면 이 공간, 이 거리가 모두 예전과는 같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먹먹해지는 감정을 느꼈다. 2016년 8월, 25년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한 상점의 이야기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무엇이 되었다.
너와 나의 연결고리
어느 가족의 가업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자그마한 소규모 상점 하나가 문을 닫는다는 것은 단일 점포의 폐점이 이뤄지고 물리적 외형이 사라지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상점의 폐업은 곧 단골이 마음 붙일 가게가 하나 사라짐을 의미하며 가게에서 물건을 구매한 모든 손님의 기억 속 모처가 영원히 과거의 기억 내에 박제됨을 의미한다. 또한, 이웃사촌으로 오가며 안부 인사를 전하던 이웃 상점들은 든든한 이웃을 하나 잃게 되고, 한 가족은 아련한 기억 하나를 쓰라린 마음으로 갈무리하며 새로운 장을 펼쳐나가야 한다.
이처럼 지방 중소도시에 위치한 소규모 상점의 폐점을 통해서 우리는 다양한 개인과 집단이 지닌 유무형의 의식, 기억, 가치 등이 상실, 변곡, 전환을 겪는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보다 큰 규모의 물리적 공간, 다가구주택, 공동체, 마을의 상실이 상상 이상으로 큰 무게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역시도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속도를 논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동시다발적인 변화가 진행되며 그 양상은 갈수록 복잡다단해지고 있다. 그런 변화 속에서 대중은 흔히 사소한 것을 무시하고 구조적, 거시적인 내용만으로 현상을 분석하려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하지만 복잡하게 꼬인 현대사회란 이름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미시적인 현상에 주목하고 이를 분석해야만 한다. 결국, 거시적인 사회현상이란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 가구의 보편적 경향이 모여 발현되는 총합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분석의 첫 단추는 풍경, 이야기, 사물, 의식 등 개별적인 특성은 다르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인 요소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 꿰어질 수 있다.
기록이 필요한 대상을 선정하는 과정에서도 은연중에 귀천(貴賤)을 나누는 사회, 하지만 사소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사건 혹은 사물이 지닌 잠재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이미 앞선 사례를 통해 충분한 설명이 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이쯤에서 우리는 선조들이 남긴 빛나는 아카이브인 『조선왕조실록』이 왕가와 관원에 대한 내용뿐 아니라 의식주 생활 및 풍속, 호구(戶口) 등에 대한 내용까지도 소상히 기록해두었다는 점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회의 뿌리이자 든든한 바탕인 민초의 세세한 삶을 기록하지 않고는 왕조와 국가의 흥망성쇠를 논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했던 선조들의 지혜가 실록이란 이름의 아카이브에 오롯이 담겨 있다.
오래된 미래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에 이르는 한국의 근현대사는 사라지는 것으로 가득한 파괴의 역사, 그리고 개발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1900년대 한국 사회는 오랜 시간에 걸쳐 누적되어야만 만들어질 수 있는 가치에 대한 존중이 없었고 그 결과 전통을 남기지 않는 역사를 써내려 온 것이다.
대한민국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방법을 택했고, 그런 방법론에 따라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일사불란한 속도 경쟁 및 개발 경쟁에 매진해왔다.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와 자본·개발의 논리는 한국 사회의 거룩한 성전(聖典)으로 간주되었으며, 그 영향은 비단 경제 분야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그런 시대정신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예로는 ‘신상품’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들 수 있다.
누군가 가르쳐준 성향도 아닐 텐데 보통 10명 중 6명 정도가 5년 내외의 주기로 차량을 교체한다. 수십 년 연식의 가옥이 지닌 역사적 가치를 되돌아볼 시간을 갖기도 전에 재개발 환영 현수막을 내걸고 새로운 개발이 부동산 가치 상승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뿌듯한 발전으로 여기는 사회. 어쩌면 경제적 가치 중심의 사고와 타인에게 보이는 외형적 삶에 대한 중시야말로 현대 한국인의 새로움과 개발, 발전에 대한 집요한 욕망을 규정하는 것은 아닐까?
경험 또는 경력이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는 사회에 살고 있음에도 유독 유형적 자산과 사회 인프라가 축적하는 시간을 ‘노후화’로 치부하는 모습은 아이러니하다. 마치 한국 도시의 몰개성을 비판하는 사람의 대부분이 유서 깊은 유럽 도시를 동경하며 비교의 대상으로 삼지만 정작 그런 도시가 수백 년에 걸친 유지와 보수, 보존을 통해 개성을 가꿔왔음을 간과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쯤에서 새로움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미래와 직결되는 것인지를 고민해보아야 한다. 사회나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고찰하는 과정에 있어 가장 믿음직한 반면교사는 바로 우리가 살아온 과거이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과 그에 따른 변화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자연스러운 삶에 대한 기록과 그에 따라 축적된 역사야말로 다른 어떤 연구 및 실험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아카이브를 축적하는 작업이란 새로운 창조와 발견, 혁신을 위한 토대를 닦는 과정이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아카이빙을 통해 오늘날 직면한 다양한 문제의 근원을 이해할 수 있고 나아가 그 대안을 발견할 수 있다. 1970-1980년대 청년들의 패션에서 묘하게 오늘날 힙스터 패션을 보는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지듯, 아카이브란 어제의 낡음이 오늘의 유행으로 치환되는 순환 속에서 끊임없이 참고하고 가르침을 얻을 ‘오래된 미래’다.
무형적 가치의 재발견
개발 지향적 사고가 현대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에는 물질적 사고방식이 자리한다. 여기서 물질적 사고방식이란 배금주의적 사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 실체가 존재하는 요소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성을 지칭하는 것이며 다시 말해 통계적, 유물론적, 물질주의적 사고와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잘살아 보세’라는 슬로건 아래 경제적 발전에 집중하던 1960~80년대 고도성장기를 지난 이후로 한국 사회는 물질적 부를 축적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문제에 직면해왔다. 당장 맞벌이 부부, 핵가족 형태의 가정생활이 보편화 되면서 대화와 소통이 단절된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 간 갈등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고 이는 경제적 발전을 국시(國是)로 여겨온 장년 세대와 인권, 자유, 여가가 있는 생활을 중시하는 청년 세대 사이의 갈등으로 확장되는 양상을 보인다.
또한 직장 생활 내 수직적이고 경직된 조직 문화 속에서 자아실현과 직업의식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한다. 가정, 동네, 직장, 학교 등 다양한 조직 생활 속에서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한국인. 그들은 장기적인 경기 침체보다 더욱 치명적인 집단적 우울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일련의 상황이 더욱 심각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90년대 이후로 무려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한국 사회는 좀처럼 우울로 빚어진 터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심리 공황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한국사회가 여전히 물질적 사고를 전제로 비물질적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세대 갈등, 조직 문화 등은 통계적 수치로는 재단할 수 없는 무형적 요소다. 그런데도 정치권 지도자들은 여전히 성장 또는 분배라는 이름의 물질적 접근을 통해서 사회 문제의 해결을 모색한다. 마치 경제적 재화의 분배 방식을 조정하면 비물질적 사회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연설하고 정책을 집행한다.
아카이빙 작업을 진행하는 아키비스트의 역할은 비단 물질적 실체에 대한 기록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들은 기억, 이야기, 소속감, 애정 등 인간의 정신적-심리적 영역에서 발생하는 움직임과 면밀한 변화를 기록하고 저장한다. 그리고 물리적 실체의 형태만을 기록하기보다는 물리적 요소가 지닌 의미, 혹은 그런 객체가 보내온 시간 평가 등 내재적 가치, 정신적 가치, 비물질적 가치 저장과 보존, 분석을 실행한다. 결론적으로 작업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아카이브는 한국인이 직면한 비물질적 난제의 실체에 더욱 명확하게 접근할 실마리가 될 것이다.
우리가 사는 도시와 사회는 그저 의식주 충족을 위한 기능만을 수행하는 생존 기계가 아니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생각하고, 희로애락을 느끼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아를 실현해 나간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있어 물질적 요소만큼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기억과 맥락이다.
아카이브를 축적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 사회는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옭아맸던 기능주의적인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보이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보이지 않는 정신적 가치의 흐름을 읽어낼 것이다.
의미를 고민하지 않고 휩쓸려왔던 발전을 위한 발전, 그로 인해 만들어진 삭막한 무질서와 공허함을 무형적 가치를 통해 회복할 시간이다.
남아 있어 줘서 고마워
2016년 12월 20일, 어느 가업이 마지막 뒷모습을 남기며 멀어져 간 지 어언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물리적 흔적은 청주 성안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부모님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고 아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모습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읽어낼 수 없다. 마치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다는 것처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나의 유년기를 함께했던 청주 수곡동이었고,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나는 그만 반가운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다. 117동, 자그마한 5층 아파트는 여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맞벌이하는 부모님이 없는 날 2층에 살던 나는 종종 아랫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 풀밭에서 동네 아이들의 구기 종목 경기가 펼쳐진 모습, 그리고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벌벌 떨며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가던 어린 내 모습이 25년이 지난 현실 속 아파트 단지에 겹쳐졌다.
아버지가 귀가하실 때면 종종 사 들고 오셨던 강서순대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맛 그대로 같은 자리를 지켰다. 순대를 집어 들어 초장을 듬뿍 묻히고, 뿌듯한 마음으로 입안에 넣는 순간 문득 한마디 말이 맴돌았다.
“남아 있어 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