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서 ‘(나처럼) 이렇게 저렇게 살라’는 오지랖들이 넘친다.
‘글쎄요 저는 다르게 살고 싶어요’라는 말을 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경우들도 많이 보인다. ‘여자/남자친구는 있니?’, ‘취직은 어떻게 됐니?’, ‘결혼은 언제 할 거야?’, ‘빨리 애 낳아야지’ 등 오지랖 파티가 벌어지는 추석도 다가오는데 이런 불편한 오지랖 또는 꼰대질이 어디에서 오는지 심리학 연구들을 빌려서 이야기 해 보자.
*중요: 여기서 이야기 하는 오지랖 및 꼰대질은 ‘조언을 원하지 않는 타인에게 자신의 조언을 휘두르거나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 자신의 삶의 방식을 강요하는 일’에 제한되며 건설적이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은 해당되지 않는다.
내 조언은 상대방에게 정말 유용할까?
오지랖에는 보통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나는 너를 잘 알기 때문에 너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할 수 있으며, 따라서 너는 내가 말하는 대로 살면 된다는 전제들. 그런데 우리는 진짜 다른 사람들을 잘 이해하고 있을까? 그리고 내 입장에서 참으로 옳고 당연해 보이는 삶의 방식들이 과연 상대방에게도 정말 옳은 것일까?
퀴즈를 하나 풀어보자. 샐리와 앤이 있다. 샐리가 바구니에 공을 넣고 자리를 비운다. 샐리가 없는 사이 앤은 바구니에서 공을 꺼내 상자에 집어 넣는다. 잠시 후 돌아온 샐리는 바구니와 상자 둘 중 어디에서 공을 찾을까?
답은 ‘바구니’이다. 공은 상자에 있지만 샐리는 앤이 공을 상자로 옮겼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공이 상자에 옮겨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샐리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공을 본 바구니에서 공을 찾게 될 수 밖에 없다.
매우 쉬워 보이는 문제이지만 4살 이하의 아이들은 ‘상자’라고 대답한다(당신도 혹시 그랬는가?). 이 상황을 전부 지켜본 나는 앤이 공을 상자로 옮겼다는 사실을 알지만 자리에 없었던 샐리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 즉 비슷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타인과 내가 서로 다른 입장에 놓일 수 있고 결과적으로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타인을 마음을 읽으려면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나와는 다른 그 사람의 입장과 정보수준, 경험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 또한 알지 못한다. 샐리의 생각을 읽으려면 ‘나는 거기에 있었지만 샐리는 없었다’라는 나와 다른 샐리만의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벗어나기 힘든 자기중심적 사고, 어른들도 마찬가지
이렇게 나와 타인의 세상이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나와는 다른 타인의 상태를 추론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혹시 아이들에게만 어려운 게 아닐까? 하지만 연구들은 어른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러 가지 물건이 올려진 책장을 사이에 두고 나와 다른 사람이 앉는다. 나는 반대편에 앉은 사람이 집으라고 지시하는 물건을 집어야 한다. 책장은 양쪽으로 뚫려있었으나 나무판으로 군데군데 가려져 있었다. 왼쪽이 내 쪽에서 본 책장의 모습이고 오른쪽이 반대편에 앉은 사람의 시야에서 보인 책장의 모습이다.
책장 반대편 사람으로부터 ‘접착제(아래 중앙) 위의 작은 차’를 집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당신은 어떤 차를 집을 것인가? 만약 접착제 바로 위칸 오른쪽에 있는 작은 차를 집었다면 미션 실패이다. 이 차는 칸막이에 가려 반대편에 앉은 지시자의 시야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차를 지시자가 집으라고 했을 리 없다. 지시자가 언급한 차는 위에서 두 번째 줄 왼쪽에 있는 차이다.
이런 과제를 받았을 때 아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제일 먼저 자신의 시야에서만 접착제 위에 있는 차를 쳐다보게 된다. 차이는 어른들이 좀 더 빨리 ‘아 이게 아니구나’를 깨닫는다는 것뿐이다. 아이이든 어른이든 ‘남과 내 시야가, 경험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 눈에서 보이는 장면이 아닌, 상대방의 눈에서 보이는 장면이 어떠한지를 떠올리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
이렇게 우리는 서로의 세상이 다름을 이해하는 것과 내 경험에서 벗어나, 내 경험과 독립적인 타인의 경험을 이해하는 데에 아직 서툴다. 남과 나의 생각, 느낌, 경험이 다를 수 있음을 이해하는 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어느 정도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귀찮고 힘든 일이다. 따라서 딱히 그럴 필요가 없을 때(특히 상대적으로 자신이 갑의 위치에 있는 경우) 우리는 상대방과 내가 서로 다를 가능성을 떠올리거나 내 입장에서 벗어나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수고를 거치지 않고 편하고 익숙한 내 시야에서 보이는 풍경만 가지고 다른 사람의 세상을 판단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나에게는 공이 옮겨졌다는 정보가 너무 당연하게 있기 때문에 그 느낌에 빠져 샐리에게는 그 정보가 없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하는 아이들처럼, 우리는 나에게는 당연한 듯 있는 정보나 능력, 성격 특성, 의지력 등이 남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가능성, 서로가 가진 능력이나 특성들이 상이할 가능성을 잘 고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 스탯뿐 아니라 서로가 처한 환경이 매우 다를 가능성 또한 고려하지 않고 쉽게 지나쳐 버린다.
오지랖과 꼰대질의 함정, “내가 그랬으니까, 너도 당연히 그럴 거야”
그래서 그냥 내가 이렇게 보고 느꼈으니까 너도 그렇게 보고 느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내가 이랬으니까 너도 그럴 거야’라며 나에게는 먹혔던 인생의 방식 등이 상대방에게도 잘 작동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너에게도 당연히 잘 작동할) 나의 조언을 왜 따르지 않아?’라는 의문을 갖기도 한다.
때로는 “내가 이렇게 해서 성공했으니 여러분도 그렇게 해서 성공하세요.”류의 이야기들이 넘치고 때로 “네가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만큼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야.”라는 비난까지 보인다.
여기에도 타인의 입장과 삶의 방식들을 자신이 편한 대로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만 비추어 해석하고 심하게는 암묵적으로 ‘내 삶의 방식이 모두에게 먹히는 진리’라고 하는 모습들이 깔려있는 듯 하다. 반면 서로의 삶과 조건이 많이 다를 가능성과 ‘그래서 사실 내 삶의 방식이 타인에게는 별로 유용하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 모습은 발견하기 어렵다.
그 흔한 ‘내가 해 봐서 아는데~’류의 조언들 역시 나와 타인의 능력치와 환경들이 매우 다를 수 있음을 고려하면 그건 그냥 나한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참고 정도로 사용될 수 있어도 타인의 삶에 대한 완벽 가이드가 되기는 어렵다.
※ 이 글은 「꼰대와 오지라퍼의 심리학: 우리는 왜 꼰대가 되는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