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ature Reviews Chemistry에 헬무트 슈와르츠 (Helmut Schwartz)가 기고한 「On the usefulness of useless knowledge」를 번역한 글이다. 언제나 그렇듯 전문번역가가 아닌 내 번역은 틀릴 수 있으며 생략일 수도 있다. 번역 불평 말고 원문 보셈.
3줄 요약
기초연구는 새로운 기술을 창출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도박이다. 이런 도박에서 가장 안전하게 베팅하는 방법이라면 가장 똘똘한 인재에게 그의 큰 꿈을 펼 수 있도록 재정적인 지원을 하고 ‘뭘 하든 마음대로 해 보슈’ 하는 자유를 주는 것이다.
과학 연구를 발전시키는 돌파구는 대개 계획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타나며, 계획될 수도 없다. 이런 돌파구들은 오히려 전혀 예상치 않던 변방에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주요한 과학적인 발견이나 발전을 촉발한 것은 연구자 개인의 열정이기 때문에 어떤 학술기관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사람을 골라서 이들에게 지적 자유와 넉넉한 기금을 제공하는 것이 핵심이 된다.
프린스턴 대학 고등과학원의 초대 사무총장인 아브라함 플렉스너 (Abraham Flexner)는 1939년 기초연구의 의의를 설명하는 수필을 하나 썼다. 「쓸모없는 지식의 유용성」이라는 제목의 산문에서 그는 별로 목적이 없어 보이는 몇 가지의 연구가 어떻게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견으로 이어지는지 설명하며 과학 연구의 진흥과 연구비 배분에서 과학 연구의 ‘유용성’을 강하게 논박한다.
그는 과학 연구가 얼마나 유용한 결과를 가져올지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호소했다. 그의 수필은 자유로운 과학 연구의 장점과 미덕을 웅변적으로 대변해 주는 담론이라 할 수 있다. 이미 나온 지 75년이나 된 글이지만 기초연구의 필수적인 역할, 즉 기초연구의 문화적인 역할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기초연구가 인류에 주는 장점을 가장 잘 묘사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개인 연구자의 역할
기초연구는 과학자들이 아직 인류가 모르는 새로운 영역(terra incognita)을 탐험하려는 욕망을 통해서 발전한다. 즉 인류가 잘 모르는 새로운 지식의 영역을 발견하고, 이를 조사해 설명하고, 이것을 이용해 응용하는 것이다.
이런 기초연구의 특성을 말하자면 매우 오랜 기간 한 번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고 반드시 좌절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즉 연구에서의 돌파구라는 것은 이루고 싶다고 계획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설령 연구에서 돌파구를 이룩하더라도 그것의 가치와 유용성은 처음에는 잘 알기 힘들고 평가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과학의 발전과정에서 계속해서 알려져 왔다.
비록 과학은 마치 모자이크처럼 수많은 개인 연구자들의 업적과 열정에 의해서 만들어져왔다. 하지만 이런 돌파구들은 창의성, 지성, 호기심, 끈질김, 그리고 우연의 복합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돌파구들을 만들어내는 개인 연구자들은 그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장소, 자유 및 신뢰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그들이 중요한 과학적 발견을 가능하게 하는 위험을 감수할 용기를 가질 수 있다(3년 안에 SCI 논문 10편 안 내면 님 재임용 빠이빠이 하면 무슨 중요한 과학적 발견이 나오겠냐).
즉 연구원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근시안적인 일정과 매우 협소하게 정의된 목표에 의해서 제한해서는 안 되고 연구 자금의 연속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유럽의 1만 3,000명 이상의 과학자들이 서명하고 유럽의 기관들과 의회에 제출한 성명서인 ‘연구자를 신뢰하라(Trust Researchers)’의 핵심 요구사항이다.
기초연구(Fundamental Research)란
인류에게 새로운 지식은 연구자가 미지의 사실을 이해하려고 하는 욕망, 즉 구체적인 응용이나 확고하게 고정된 목표의 제약에서 벗어난 순수한 지적추구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1차 대전 직후 유럽을 덮은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막스 플랑크는 선언했다.
지식은 응용에 선행되어야 한다.
이것은 막스플랑크 협회가 현재까지 유지하는 모토다. 충분한 재정적인 지원과 함께 기초연구에 대한 집중, 그리고 타협하지 않고 가장 뛰어난 과학자를 고용하겠다는 것이 바로 막스플랑크 협회를 세계 최고의 연구소로 유지하는 동력이다.
1948년 이후 막스플랑크 소속 연구자 중 18명 이상의 노벨 수상자가 나왔다. 이와 비슷한 성공 사례는 영국 캠브리지의 분자생물학 연구소(Laboratory of Molecular Biology, LMB), AT&T의 벨 연구소, 혹은 미국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NIH)을 들 수 있다. 이런 성공적인 연구소의 공통점은 ‘탁월함의 원칙’에 기반 두고 운영한다는 것이다.
기초연구에서부터
과학자의 호기심에 기반 둔 연구가 결국은 혁신을 창출하는 원동력이 되지만 이런 연구의 초반에는 처음 멀고 험한 길을 거쳐야 하고, 조류를 거슬러서 헤엄쳐야만 하고, 지금 당장 지름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장애물을 극복해야만 한다.
한마디로 기초연구는 시간이 많이 소모되며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다. 과학자들이 일반 대중이나 정치가, 정책을 결정하는 관료에게 이런 기초연구의 중요성과 기초 과학의 어려움을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상 많은 국가에서 기초연구는 자기 자신의 존재가치를 정당화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기초과학은 위험에 처했으며 취약해지고 있다.
오늘날 여러 국가에서 지배적인 정책은 연구의 가치를 그 연구가 ‘유용한지’ 여부만 가지고 평가하는 것이다. 즉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거나 몇 년 안에 시장성이 있는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에 따라서 연구의 가치를 측정하는 것이 추세가 되어간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의 많은 학자는 ‘영국 대학 수호 협의회’라는 것을 설립해서 과거에 고등교육기관의 성공에 핵심적인 정신 및 지적 분위기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한다.
분명한 것은 네트워크에서 기초연구의 노드가 삭제되는 경우 응용 연구와 산업 역시 타협 받게 되며, 네트워크에서 하나의 노드에서 다른 노드로의 경로가 선형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전체의 네트워크가 위험을 받게 된다. 따라서 기초연구는 반드시 필요한 것일 뿐 아니라 가장 비용 효율적인 공공재로 작용한다.
혁신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모두 사회에서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사실은 기초연구에서 기인한 여러 지식 없이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불편할지 잘 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은 분명히 어떤 실용적인 응용과도 관계없어 보였지만, 상대성 이론이 없이는 GPS 기기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었다. 또한 뢴트겐의 X선의 발견은 분명히 우연한 실험에서 기인한 것이고 왓슨과 크릭의 DNA 이중나선의 규명은 완벽히 호기심에 의거한 일이었다.
이런 발견 모두 생명과학계를 뒤흔드는 혁명적인 발견이었다. 레이저의 발견은 ‘특정한 문제를 찾기 위한 해결책’ 정도로 간주했다. 폴 디락의 1927년의 반물질 예측(양전자 등의)은 당시에는 거의 쓸모없고 중요하지 않은 요상한 연구의 일환으로만 여겼지만 수십 년 후 대개의 병원에서는 암 조기 진단을 위해 양전자 방출 단층촬영이 이용된다.
마이클 패러데이가 수행한 전기와 자기에 대한 수수께끼에 대한 연구를 생각해보자. 그의 전자기학에 대한 과학적인 흥미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19세기 전반기에만 해도 재미있긴 하나 대개 실용적인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그의 연구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전기 없는 어둠의 세상에 살 것이다!
영국의 글래드스턴 총리가 패러데이에게 “국민의 혈세로 지원한 전기 연구가 과연 무슨 쓸모가 있을 것이냐?”라고 물었을 때 페러데이는 “언젠가 이걸로 세금을 걷을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고 그런데 진짜로 그것이 일어났다. 물론 글래드스턴 자신은 전기 산업의 발전과 여기에 따른 세수증가를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여기서 주는 교훈은 연구 투자에 따른 수익은 장기적이고 막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세계 경제의 약 20% 가 어떤 방식이건 화학 촉매와 관련이 있다. 처음에는 분자 내의 결합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파괴되는지 관련한 순수한 학문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렇게 된 것이다. 또한 전자의 파동 특성을 설명하기 위한 슈뢰딩거의 1926년 공식(방정식 1)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기초 이론 물리학 연구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러나 현재 국내 생산의 약 20%가 양자 역학의 응용에 근거한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목록은 끝이 없다. 그러므로 의심하지 말지어다. 기초연구는 조만간 더 많은 발견이나 발명을 가능하게 하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응용을 창출하는 공익 활동이다. 기초연구의 지원은 궁극적으로 공익의 문제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얼마나 신속하게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느냐, 정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고려와는 무관해야만 한다.
연구지원기관의 역할
독일의 혁신가인 에리히 슈타우트(Erich Staudt)는 “모두가 공감하는 혁신이란 말도 안 된다”며 혁신은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하기 위해서 잘 닦인 길을 피해갈 때만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슈타우트는 기술적인 결과에 의해서만 동기 부여된 프로젝트는 오히려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프로젝트 자체에는 전혀 집중하지 않고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사람들과 이들의 전문성에 중점을 두는 것을 옹호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변화를 주도함으로써 진정한 혁신을 일으키는 것은 항상 개인 또는 소수의견 소유자일 것이라는 것을 주장했다. 이런 대담한 아이디어 중 많은 아이디어는 대개 실패할 것이지만, 몇 가지는 성공할 것이다.
필자가 소속된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재단 (Alexander von Humboldt Stiftung)의 경험에 따르면, 연구자 개인에 대한 지속 가능한 충분한 지원은 이런 연구의 실패의 위험과 변화에서 범위를 제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 재단은 60년 전 설립된 이래로 연구에 대한 지원 원칙이 변하지 않았다. 이 원칙은 그동안 시간의 테스트를 견뎌왔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를 지원하는 것
- 최고의 연구자를 찾는 것
- 균일한 배분: 국가, 분야, 성별, 연령 등은 고려하지 않는 것
- 유행에 따라 변화하는 단기 프로젝트에 관여하지 않는 것
우리는 개인 연구자를 지원하고, 이것이 기초연구를 지원하는 가장 좋은 정책이라는 데 충분한 증거가 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과학자, 특히 젊은 과학자가 꿈을 실현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열심히 노력한다. 그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개발하고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데 방해받지 않고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결국 사회의 꿈과 희망은 젊은이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어떤 공간과 창의적인 기회를 제공받는가에 달렸다.
젊은 과학자와 학자들은 지식 탐구를 추구하고 자신과 아이디어를 시험할 공간이 필요하다. 너무 많은 통제와 너무 많은 제한은 여기에 치명적으로 작용된다. 결국 젊은 사람은 특별히 열정적일 수밖에 없으며, 이런 열정이야말로 진정한 과학에 대한 사랑으로 꽃필 수 있다. 그들의 능력이 펼쳐지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다.
이런 젊은 재능은 창의적인 환경에서 양성되어야 한다. 그들의 능력을 논문 몇 편 냈나, 혹은 얼마나 연구비가 많냐로 평가하는 것은 정말 몰지각한 행위다. 이런 수치는 그들의 과학적인 업적의 창의성이나 독창성을 표현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 학교에서 사람을 고용하거나 테뉴어를 줄 때의 기준을 맥스월, 피셔, 파울링, 크릭, 하이젠베르그에게 적용한다고 해보자. 이들 중 몇 명이 아카데믹 잡을 잡을 수 있을까? 평생 논문 몇 편밖에 못 낸 프레데릭 생거(DNA 시퀀싱의 개발자)한테 매년 결과보고서를 쓰라고 하고, 논문 편수를 채우라고 했다면 그가 과연 현대 과학에서 생존할 수 있었을까?
젊은 연구자를 위한 지도와 지원, 이들이 일할 자리의 확보, 개성 존중과 개성의 강화, 그리고 개인 네트워크의 강화는 연구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모두 다 필수적인 요소이며 모두 연결된 요소다. 이런 것을 중견급 학자들에게나 허용되는 사치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이런 태도가 학계에 만연하면 과학의 장래를 해롭게 할 뿐 아니라 수십 년 후에는 대학의 존재 이유 자체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매우 치명적이다.
기초연구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해안’으로 향하는 기회를 준다.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서 젊은 사람들의 열정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가진 가장 안전한 재산인 것이다. 마치 오페라 창작과 비슷하게 일종의 문화적인 사업이며 사치라기보다는 사회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더욱이 기초연구의 진흥에는 지속성과 인내가 필요하다.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고 감시하는 것보다 사람의 신뢰에 기반 두는 시스템이 충분히 가치 있음이 그동안 확인되었으며, 프로젝트 자체보다는 연구자를 지원한다는 원칙은 시간의 테스트를 거친 검증된 시스템이다. 이런 것을 가장 확실하게 요약한 것은 미국 국립과학재단의 창립자이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자문위원이었던 버니바 부시의 이야기이다.
과학적인 진보는 자신이 선택된 주제에 따라서, 미지에 대한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행해질 때 발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