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개척자를 꿈꾸며』(약간 의역이다.) 혹은 영어로 『pursuing the endless frontier』는 필자가 운영하는 블로그 이름이자, 작년에 별세한 MIT 前총장 찰스 M. 베스트의 에세이집 제목이기도 하다.
베스트 총장은 제임 기간동안 기초 연구 및 교육 강화, 필요에 기초한 장학금 지급과 학내 구성원의 다양성 유지를 위해 노력했고, 무엇보다 MIT의 온라인 강의 공개 프로젝트인 Open Course Ware의 도입에 큰 역할을 했다. 사실, 이 블로그 이름은 교육 행정가로서 큰 족적을 남긴 베스트 총장에 대한 존경의 표시에서, 그의 에세이집 제목을 딴 것이다.
그러나 사실, 베스트 총장의 에세이집 제목도 오리지날은 아니다. 오리지날은 1945년 당시 미국의 과학연구개발소(the Office of Scientific and Research Development)의 소장이었던 버니바 부시(Vannevar Bush)가 작성한 보고서 ‘과학, 영원한 개척자‘(Science, the Endless Frontier)이다. 베스트 총장의 에세이집 제목은 이 보고서 제목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부시는 오늘날의 웹의 효시가 된 하이퍼텍스트의 개념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고, 2차대전 당시 미국의 R&D 전략을 맡았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전쟁 기간 중 급속히 팽창한 정부의 역할이 과학기술정책 영역에서 어떻게 이뤄져야 할 지에 대해 그에게 자문을 구한다. 다음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요청문의 일부다.
우리 앞에는 지식의 새로운 프론티어가 놓여 있다. 만약 우리가 전쟁에 임했던 것과 같은 똑같은 비전, 용기, 그리고 결단으로 [이 도전에 대응한다면], 우리는 더 충실하고, 향상된 고용과 함께 더 만족스럽고, 발전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프랭클린 D.루스벨트.
1944년 11월 17일.
부시는 그로부터 약 8개월 후인 1945년 7월에 위 보고서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제출하는데, 보고서의 핵심은 명확하다. 미국 국가 정책의 핵심은 새로운 프론티어를 국민에게 열어주는 것, 그리고 그를 위해 국민들이 그 프론티어를 개척할 의지와 열정, 능력을 배양시켜주는 것에 있다. 그리고 현재 그 프론티어 중 가장 중요한 프론티어는 과학이다. 그래서 비록 전쟁 당시의 자유로운 학문 연구에 대한 억압은 사라져야 하겠지만, 공공재로서의 지식 생산을 지속하기 위해 과학 연구를 위한 정부의 투자는 계속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대학은 국가의 연구 인프라로서 역할해야 하며, 이 인프라가 제대로 작동해서 새로운 시장의 가능성을 열어주지 않으면, 첨단 산업의 육성도 불가능하고, 따라서 고용 창출도 어렵다는 것이 부시의 전망이고, 주장이다.
구체적으로, 부시는 국가 연구 재단(National Research Foundation, NRF)을 설립하여 대학에 연구비를 지급하여 기초 연구를 할 수 있는 재정 지원안을 마련하고, 그를 통해 미래의 과학과 사회 발전에 동력이 될 제도(대학)과 인재(대학원생)를 키우자는 안을 마련했다.
미국의 과학기술정책의 근간으로 한 축을 연구, 다른 한 축을 교육으로 삼은 것이다. 부시는 특별히, 과학 발전의 뿌리로서 기초 연구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기초 연구를 과학적 자본(scientific capital)이라 표현했다.
이러한 부시의 안이 수용됨으로써 전후 MIT, 스탠포드 등의 미국의 연구 중심 대학붐이 일어났고, 이런 대학들을 중심으로 인터넷 등 신기술이 개발된 걸 생각하면, 부시가 미국의 고등교육사 및 과학기술정책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것도, 미국의 과학 교육, 고등 교육 발전을 위해 헌신한 베스트 총장의 에세이집 제목이 부시의 보고서 제목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아래는 부시의 보고서의 말미에 포함된 국가의 과학기술정책의 방향성에 대한 다섯 가지 원칙(five fundamentals)이다. 반 세기도 전에 쓰인 글이지만, 오늘날 한국의 연구 풍토를 생각하며, 한 번 다시 생각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특별히, 주의깊게 볼 부분은 어떻게 관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그 부작용인 단기 성과 위주 정책, 정치적 자원 분배 등을 막고, 민간의 창의성을 살리는 가다. 관주도가 아니라, 관이 어떻게 주도하느냐가 문제다.
- 정부 지원이 어떤 형식으로 이뤄지든, [언제 결과가 나올 지, 그리고 결과가 얼마나 실용적일 지 알 수 없는] 장기간의 기초 연구가 수행되기 위해, 펀딩의 안정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 이러한 펀딩 지급을 행정적으로 담당하는 기관[NRF를 뜻한다.]의 구성원은 [정치적 개입을 막기 위해서] 해당 일에 적합한 능력과 관심만을 기준으로 하여 선발된 인재로 구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과학 연구와 교육의 특성에 대한 폭넓은 관심과 이해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 이러한 기관은 연구 사업을 진행할 때 연방 정부 밖에 있는 조직을 계약 혹은 연구비 지원(grant)을 통해서 진행해야 한다. 이러한 기관은 이 기관 산하에 속한 연구소를 [설립하여] 운영해서는 안 된다.
- 공립, 사립 대학, 종합 대학, 그리고 연구 기관에 대한 기초 연구의 지원은 지원에서 그쳐야지, 그런 기관이 어떻게 내부적으로 정책을 만들고, 사람을 관리하고, 연구의 범위와 방법을 정하는 지에 대해 간여해서는 안 된다. [달리 말하면, 연구는 질에 대한 일정 기준만 통과하면, 나머지는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진행할 때 가장 생산적인 결과물이 나온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변수다.
- 공적 펀드를 받는 기관에 대해서 연구의 성격, 범위, 그리고 방법에 대한 철저히 독립성과 자유를 보장하고, 그와 같은 기관들에게 자원을 분배하는 것에 대해서 분별력을 유지하되, NRF는 대통령과 국회에 대하여 책임을 분명하게 져야 한다. 오직 그런 [강한] 책임감이 존재할 때만, 과학과 민주 시스템의 다른 사회 영역간의 적절한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 재단의 행정적, 재정적 운영에 대해서 일반적인 감사, 보고, 예산, 그리고 그와 비슷한 기준이 적용되어야 함은 물론이나, 연구의 특별한 요구 사항을 만족시키기 위해 절차상 수정이 필요하면 [예외가 허락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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