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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서는 수업 시작종이 울리기 전에 선생님들이 교실로 들어간대요.”
박 선생님(가명)의 목소리는 살짝 부러움에 차 있는 것 같았다. 김 선생님(가명)이 끼어들었다.
“어머, 수업 시간을 그렇게 빡빡하게 챙기면 학생들이 숨 막혀 하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수업 종이 울려도 떠들고 장난치는 학생들 때문에 교실이 어수선해지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요?”
몇 년 전 교무실에서 들은 이야기다. 수업 시종(始終) 문제로 학교가 조금 어수선해져 있을 때였다. 수업 시작종이 울렸는데도 학생들이 자리에 앉지 않아 수업이 지연되는 사례가 논란이 되었다. 전체 회의를 열었다. 인근 학교 사례를 빌려 예비종 시스템을 만들자고 결정해 시행하기로 했다.
대화를 더 들어보니 예의 ○○고는 수업 시작과 끝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교사가 교실로 향하는 시간이 어중간하면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보다 수업 시작종이 먼저 울릴 수 있다. 그래서 ○○고에서는 교과서와 수업 자료를 옆구리에 낀 교사가 교실 문 앞으로 가 종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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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고등학교에 있을 때였다. ○○고 선생님들처럼 수업 시작 전에 수업 교재를 옆구리에 끼고 교실로 향하곤 했다. 고등학교 3학년을 맡았을 때 특히 더 그랬던 것 같다. 입시 학년이어서였는지 평소 학생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 나눌 시간이 부족했다. 쉬는 시간에 교실로 향하면 몇 마디라도 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시간들이 그럭저럭 괜찮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고 선생님들도 그랬을까. 선생님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쉬는 시간이 끝나갈 무렵 수업 교재를 들고 교실로 향하는 그 선생님들을 상상해 보았다.
원칙적으로 교사들에게는 학교에서 정해 놓은 수업 시종 규칙을 완벽하게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있을 만하다. 나는 별로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떤 강제적인 규율의 적용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학생들의 수업권을 철저하게 지켜주자는 책무의식 같은 게 크지 않았다. 나만의 자율에 따른 결정이자 행동이었다.
○○고 선생님들은 어땠을까. 내겐 그들이 풍겼을 분위기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그 ‘3분 전 입실’ 시스템은 ○○고의 잠재적인 교육과정으로서 하나의 학교문화처럼 통용되고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들이나 학생들이 학교의 자랑스러운 ‘전통’처럼 받아들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문화’나 ‘전통’이라고 해서 ○○고 선생님들과 학생들 모두가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시간과 공간을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의 크기가 작다. 정해진 시간과 공간에서 규정된 행동과 동작에 맞추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3분 전 입실 시스템이 없는 학교의 구성원들보다 더 클 것이다.
기계가 아닌 사람들을 기계에 가깝게 움직이게 만드는 시스템이라고 말하면 지나칠까. ○○고 선생님들 자리에 나를 놓아보니 숨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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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40분, 45분, 50분 따위로 시간을 나누어 수업을 배치하는 방식은 18-19세기 이래 근대적인 학교 교육 시스템이 정립된 이후로 전 세계적인 ‘표준’이 되었다. 학생과 교사는 이 표준 시스템 아래서 일렬로 행진하는 기계처럼 살아간다.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조립과 포장 공정을 거쳐 배출구로 나오는 상품의 생산 공정과 비슷하다. 기실 공교육과 학교 의무교육 시스템의 시원에 그런 목표가 담겨 있다.
비유컨대 학생과 교사를 지배하는 수업 시종표는 일종의 ‘파놉티콘(panopticon)’, 곧 원형감옥이다. 1785년 제러미 벤담이 발표한 감옥 구상안이었던 원형감옥은 말 그대로 건물의 중앙 꼭대기에 앉은 감시자가 둥글게 늘어선 모든(pan) 죄수들의 수감방을 한눈에 볼(optic)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파놉티콘은 최소의 인원으로 최대의 감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구조가 가장 특징적이다. 벤담은 그 건물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전지자가 임재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sentiment of invisible omniscience)”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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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담의 원형감옥에는 공리주의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공리주의 아이디어에 따르면, 가령 하나의 행정 기구로서의 학교는 대단히 복잡하고 정교하면서 거대한 기계처럼 작동되어야 한다. 현대적 공장의 기계 설비 부품들이 그런 것처럼 거대 기계로서의 학교를 움직이는 데 최적화한 ‘부품’들이 만들어지고, 그것들이 고장이 나면 수리되거나 다른 부품으로 교체되거나 하는 식으로 쇄신되고 발전해야 한다. 학교 ‘교육’에서 효율성이 지상의 과제가 된다.
소수의 간수가 다수의 죄수를 효율적으로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벤담의 원형감옥 아이디어는 공리주의에 따라 설계되는 국가 운영의 원리로 확장될 수 있다. 이런 국가에서는 중앙의 장관이나 고위 관료가 꼭대기에 앉아서 모든 하급 행정을 굽어보며 전체에 걸쳐 효과적인 통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수업 시종이라는 상징체계가 정확히 그런 구실을 하고 있다고 본다.
우선 매우 효율적이다. ‘장관’이나 ‘고위 관료’ 쯤에 해당하는 교장을 훨씬 능가하는 고도의 정치사회적 권위체처럼 작동한다. 교사는 교장에게 ‘해명’할 수 있으나 수업 시종 표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제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지자가 임재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적 느낌’에 빠져 컨베이어 벨트 위를 쉼 없이 내달린다. 자기감시와 자기통제 기제가 작동하는 학교가 윤활유를 듬뿍 바른 기계처럼 매끄럽게 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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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뜻하는 영어 단어 ‘스쿨(school)’은 ‘여가’ ‘한가함’을 뜻하는 그리스어 ‘스콜레(schole)’에 어원을 두고 있다. 서양 교육의 시원격에 해당하는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개인이 개성을 발전시키고 교양을 쌓아 자유 시민으로서의 자기 책임을 완수할 수 있는 인간성을 기르는 데 교육의 목표를 두었다. 생업에 종사할 필요가 없이 여가가 있는 자유인들이 지극한 인간 생활과 교양을 위한 지식을 추구하는 곳이 학교였던 셈이다. 그래서 아테네 노예들은 교육의 기회가 없었다.
아테네가 그랬듯이 학교가 노예를 기르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육이 노예를 만들어내는 수단이 될 수 없어야겠다. 존 홀트는 어느 책에서 “교육이야말로 이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현대적 의미의 노예 상태를 유지하는 가장 깊은 토대”라며 절망했다. 그러나 나는 역설적이지만 학교와 교육이 ‘현대적 의미의 노예 상태’를 벗어나는 힘과 의식을 만들 수 있는 기제라고 믿는다.
좋은 학교, 좋은 교육을 위한 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다. 수업 시종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시간을 여유 있게 보낼 수 있는 다양한 시스템을 고민해 보는 것이 그 첫걸음의 하나가 될 수 있다.
다양한 기술과 자원을 소유한 소수는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충분한 여가 시간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들에게 관철시킬 수 있다. 반면, 대다수의 구성원들은 일상적인 생존의 필요에 압도되어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말 그대로 여가란 활용자의 재량에 따라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말한다. 2천 년 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가(schole)란 좋은 사회의 정치에 필요한 한 가지 조건이라 했다.
- 셸던 월린,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후마니타스, 2013년, 423쪽
원문: 정은균의 brun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