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무척 재미있다”는 Opelia에게 책을 빌렸다. 회사 독서모임 새해 첫 책. 그날 못 가게 되어 안 읽고 넘어갔는데, 재미있다니!
그런데 연휴 첫날 시작해서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닌데, 특히 앞부분이 그렇다. 정말 중요한 의문은 ‘로봇들이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갈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는 과연 어떤 사회인가?’인 것이다.
몇 해 전만 해도 모든 사람이 스포츠나 부동산 가격 얘기를 했다. 하지만 요즘엔 오직 한가지, 즉 일 얘기뿐이다. 실업률이 점점 오르고 있다. 현재의 직업 47% 정도는 자동화될 전망이라고 한다. 당장 아이들이 어떤 일을 찾게 될지 걱정이다.
책은 ‘일’에 대해, 그리고 ‘노동 없는 미래’에 대해 얘기한다. 새로운 기술들로 인해 우리 삶은 변화되지만, 자동차 발명 후 단순히 주유소만 생긴게 아니라 직접적으로는 카센터, 공업사 등 관련 산업이 발전했고, 간접적으로는 숙박시설 휴양시설 등 가족 여행과 관련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나왔던 걸 고려하면, 자율주행차로 열리는 새로운 세상은 완전히 다르지 않을까? (최소한 운전하는 시간에 미디어 콘텐츠를 소비하는 경향은 확실히 늘어날 전망이다)
이와 같은 희망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저자는 상당히 냉정하다.
일이란 본디
책의 앞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 그를 인용한 한나 아렌트 등 온갖 레퍼런스를 인용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의 삶을 ‘올바른 삶’이라 불렀다. 노동과 일에서 해방되고, 생존 욕구를 극복하여 더는 생물학적 삶의 과정에 얽매이지 않을 만큼 ‘올바른’ 삶. 여성과 노예들의 집안일은 사적 영역으로 평가절하됐고, 그들은 ‘올바른 삶’을 사는 시민이 아니다. 일이란 소득과 자본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잘 훈련된 개인, 통치하기 쉬운 국민, 훌륭한 시민, 책임감 있는 가족 구성원을 만들어내는 것이 본질.
저자는 일이란 게 본디 ‘천한 개념’이었고, 사실 통치하기 쉽도록 해주는 제도라고 역설한다. 천직 개념을 도입해 천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일까지도 존중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일을 존엄성과 관련된 것으로 믿게 했을 뿐이란 주장이다. 사람들이 자기 일을 기계가 대신하는데 거부감 나타내는 것도 존엄성, 인간성을 박탈당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란다. 일에 정신적으로 중독된 상태란 얘기다.
오늘날 일이란
국제화된 신자유주의는 극소수 글로벌 엘리트가 군림하는 구조. 그 아래 안정적 정직원으로 연금 받고 유급휴가 가는 샐러리아트(salariat). 그 아래 프로페셔널+테크니션=전문가나 기술자 계층인 프로피시언(profician). 그리고 불안정한(precarious) 프롤레티라아인 프레카리아트(precariat)가 있다.
글로벌 경제 속에 기업들은 세계 어디에서든 사업을 하고,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점점 더 임금인상 요구를 하기가 어렵고, 기업들은 예전만큼 자신이 속한 지역에 충성스럽지 않다. 오바마 전 미 대통령은 일이 계속 불안정해지는 걸 당연시했고, 기본적 안정성을 위한 혜택과 예방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교육이나 재훈련, 그 이상 뭐가 가능할까.
저자는 “그러나 불안정한 고용이 일반화되는 상황에 직업윤리는 그대로. 고용의 물리적 조건들은 2차대전 후 번영기 이래 변한 게 없다는 듯 열심히 일해 경력 쌓는 게 여전히 높이 평가되는 가치”라고 지적한다. 일에 대한 개념부터 잘못됐다는 주장이 일관되게 나온다.
이미 흔들리는 일자리
ILO에 따르면 세계 34억 노동인구 중 2009년엔 7.1%가 실직 상태이며 9.3억 명이 하루 소득 2달러 미만 빈곤 노동자고, 48%는 ‘취약한 고용 상태’. 5~17세 아동 노동자는 1.6억 명이나 된다고 한다. 불안정한 직업시장에서 스스로 끝없이 자기계발을 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구조란 얘기다.
요지는 기술 때문에 일자리가 줄어들지만,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새로운 일자리들도 생겨날 것이라는 건데, 모든 사람이 기술 발전은 거의 기하급수적으로 빨리 일어나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상황에서 정말 문제 있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산업 분야로 간 노동자는 놀랄 만큼 적다. 2010년 미국 노동인구 0.5%가 2000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분야에 고용됐다. IBM과 델은 각각 43만 명, 10만 명을 고용했지만, 페이스북 직원은 13년 7,185명 밖에 안됐다.
그래서 저자는 다시 문제를 제기한다. 로봇이 우리 일을 빼앗아 갈 것인지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그런 의문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이미 경제는 과잉 노동력을 양산하고 있으니 이 문제를 봐야 한다고.
우버나 에어비앤비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다. 긱(Gig) 경제에 대한 비판이다. 특히 에어비앤비에 대한 이 대목은 짐작하고 있었으나 수치로 보니 무척 다른 느낌이다.
에어비앤비에 등록된 집주인 중 6%가 전체 이익의 37%를 가져가고 있다. 뉴욕 최고 큰손은 272채를 소유해 3만 차례 임대로 700만 달러를 벌었다. 이들의 저비용 구조로 인해 노동자에게 전통적 급여와 근무조건을 제공하던 기업들은 문을 닫을 처지가 되었다.
기승전 기본소득
일이란 개념이 원래 이러했고, 쉽게 통치하려는 수단이었고, 근데 일자리가 이미 완전 부족하고..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그래서? 결국, 또다시 기승전 기본소득 얘기다. 그런데 거의 모든 국가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기본소득을 연구하는 건..사실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저자는 유니세프가 2013년 인도에서 시행한 기본소득 실험을 소개한다.
런던대 Guy Standing 교수의 분석을 인용한다. 11가지 분석이 있다.
- 많은 이들이 집과 화장실 지붕 등을 개선하고 말라리아 예방하는데 돈을 썼다
- 영양상태 개선. 특히 여아 체중
- 식량배급소에서 시장으로 눈돌려 정보보조곡식 외 채소와 과일을 더 섭취해 식생활 개선
- 건강 좋아져 아이들 학교 출석&성적 개선. 신발 사고 교통비 해결 덕분
- 긍정적 자기자본 성과. 신분낮고 여성 장애인 등 약자에게 더 큰 효과
- 소규모 투자로 이어져 더 좋은 씨앗,재봉틀 사고 조그만 가게 열면서 더 많은 생산/소득
- 더 많은 이들이 임시직 그만두고 자영농업과 사업. 인구 유출 감소
- 담보노동(?) 감소
- 월 5% 고리 대출 감소. 기본소득실험에 사채업자들만 불만
- 부패 감소
- 마을과 지역사회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기회가 더 늘어남
기본소득 때문에 일 안 하고 놀거라고? 그렇지 않다는 방증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에서 각각 걱정하는 바를 모두 풀어내고 반박한다. 저자는 상당히 많은 논문을 인용하고 조목조목 인용하거나 반박하는 편인데, 사실 이게 아주 정교한 느낌은 아니다.
호주 출신의 ‘정치 및 철학박사’라는 저자는 이론으로 똘똘 뭉친 선동가 같다. 그래서 그가 제시한 팩트들에는 수긍하고, 그가 제기한 주장들에 대해서는 한 번 더 생각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최소한 내게는 그랬다. (궁금하면 읽어보시길)
책의 한글 부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이 온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일이란 게 여성이나 노예나 할 일이지 시민이 할 일은 아니라면. 그 일을 기계가 대신해준다면 모두가 시민이 될 수 있다는 걸까. 경제는 결핍보다 과잉이 문제. 우리가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는 생산도 심지어 소비도 아닌 분배라는 저자의 주장을 곰곰이 살펴보자.
‘탈 노동(Post-work)’ 주장의 급진성 대신 현실부터 보자는 얘기도 생각해보자. 어쩌면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논의.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도 생산적 논의가 이어져야 한다. 이 책은 진짜 독서모임에서 토론했으면 훨씬 알찼을 것 같은데.. 뭐, 앞으로도 계속 토론하고 또 토론하지 않을까.
원문: 마냐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