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트위터(Twitter)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매체로든 설득력 있는 주장을 세우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생각하기와 쓰기 그리고 의사소통 능력이 필요하다. (…) 마찬가지로 컴퓨터 사용법을 배우는 것은 쉽지만, 회계나 공학의 바탕이 되는 수학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컴퓨터가 있든 없든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추는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
트위터리안답게 저 문장으로 시작해본다. 과학 기술은 인류의 구원자인가. 질문 자체가 부정적 답변을 품고 있다. 디지털 민주주의가 구현되는 공론장이라던 트위터가 달걀 계정으로 뒤덮이기도 하고, 트럼프의 선전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누구나 새로운 플랫폼을 쓴다고 해도 그게 전부는 아니다. 『기술 중독 사회』의 저자 켄타로 토야마의 주장은 어찌보면 단순하다. “바보야, 기술이 전부는 아니야.”
즉 이 책은 기술보다 ‘기승전 정치’ ‘기승전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저자는 직접 기술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에 투신했던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하루 2달러도 못 버는 8억 명이 있는 인도에서 겪은 일들이 많고, 이후 생각대로 되지 않는 사례가 줄줄이 이어진다.
혁신가의 프레임 vs. 현장의 니즈
벵갈루루 시 예산 공개 프로젝트의 사례를 보면 NGO는 터무니 없는 지출에 항의했고 예산 공개를 통해 시의 재정이 투명해질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몇달 후 정부가 해당 시스템을 내려 버렸다. 공무원은 비리가 공개되길 원치 않았다. 기술이 정치를 이긴게 아니라 정치가 기술을 이긴 사례다. 저자는 컴퓨터 교육을 시작했다가 학생들이 게임에만 몰두하고 고장난 PC는 방치되는 상황, 여자가 많이 배우는 걸 싫어하는 문화적 환경 등에 당황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만성적 불평등에 익숙해진다. 게다가 빈곤한 사람들은 삶이 고되어 살아가는 데 자신의 에너지를 다 소모한다. 동기부여가 된다는 생각은 오산이다. 매일 스스로 공부? 자유를 원한다고 모두 시위? 백신마저도 수혜자가 원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 ‘이게 당신네 공동체에 꼭 필요한 일이야’라고 생각해서 하는 일도 꼭 그렇지는 않다. 엉뚱하게도 ‘선교사 체위’가 생각났다. 정상(?) 체위만이 신의 뜻이라며 나머지는 동물과 비슷하다고 매도했던 백인 선교사들. 선진국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주입하는 건 ‘베푸는 헌신’이라는 착각이다.
하지만 대체로 저자가 시도한 건 IT 교육이다. 선택의 기회를 넓혀주는 건 필요한 게 아닐까? 꼭 컴퓨터 활용만 답일까? 게임을 즐겁게 하는 자체도 좋고, 게임을 통해서 상상력을 키우고 다른 도전에 나설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이 책의 함정은 너무 일방적으로 몰아가려는 저자의 주관에 있지 않나 싶다. 선진국 기술이라는 컴퓨터 교육에 현지 사람들이 적응을 못할 수도 있고,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100명 중 단 몇 명이라도 새 세상을 발견한다면 그가 씨앗이 될 가능성은 없을까. 50개 프로젝트 중 일부라도 성공했으면 괜찮은 게 아닐까?
기술 낙관주의의 함정
이란에서 ‘트위터 혁명’이 일어났다곤 하지만 실제 트위터 이용자는 적었다. 마치 중동 사람에게 미국 기업가의 선물이 없었더라면 스스로 저항할 수 없었을 거라는 식의 착각은 없는지 저자는 냉정하게 돌아본다. ‘기술에 대한 환상은 자본주의 기술이 공산주의 비효율성보다 우세하다는 냉전 시대 사상과 같다’는 예브게니 모로조프의 지적에 한 번 더 생각해볼 여지는 분명 있다. 모로조프는 『인터넷 망상(The Net Delusion)』에서 인터넷으로 압제 정권의 영향력을 오히려 키우게 된 사례도 언급한다. 중국의 경우 소셜미디어는 공산당의 선전 도구며, 아제르바이잔에서는 투표소 웹캠 때문에 정부가 원하는대로 투표해야 했다.
사회학자 자크 엘륄은 1965년에 이미 정보 과잉의 위험을 경고했다. 데이터가 과도하면 사람들이 깨우치는게 아니라 오히려 압도된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우리는 소셜미디어로 지속적인 주의력 분산 상태’에 빠진 좀비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이래도 기술이 마냥 근사한가? 저자는 조목조목 따진다.
물론 스티븐 호킹도 ‘인류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로봇이 아니라 그 로봇들이 만들어낸 소득을 제대로 분배하지 못하는 자본주의’라고 말했다. 기술이나 경제보다 정치가 사회를 바꾸는 게 더 중요할 수 있다. 트레바리 친구 강민구 님은 “기술은 도구”라며 “왜 필요한지, 뭘 할지 고민이 먼저”라고 했다. 또한 “의지를 갖고 있다면, 잘 쓸 수 있는 게 기술”이라며 “다만 결과적으로 격차가 벌어진다면 사회적 배려가 필요하다”고도 말했다. 즉 이건 다른 차원의 문제지 기술 낙관주의를 부정할 근거는 아닌 것 같다.
영화 〈스타트랙〉이 보여주는 미래에서는 적어도 기술의 발달로 전쟁, 기근, 질병, 그리고 사람 간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음식과 에너지는 모두 공짜. 싸우지 않고도 평화와 평등주의가 세상을 지배한다. 그러나 꼭 이 단계까지 가야만, 기술 발달로 경제 자체가 필요 없어지는 단계까지 가야만 된다고는 믿지 않는다.
기승전 사람, 결국 사람이 문제
사회 프로그램이 막대한 재능과 동기부여로 시험단계에서 잘 되는 것처럼 보여도 대규모로 확대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덜 뛰어난 사람과 덜 헌신적 사람에게 일을 시켜 운영하는 건 큰 차이가 있다. 성패는 프로그램 설계가 아니라 실행자에 달렸다.
저자가 인도에서 진행한 50개 기술 프로젝트 일부는 성공했다.
- 연구자가 연구결과가 아니라 사회 영향에 전념한 경우
- 협력단체의 헌신과 역량 수준이 높은 경우
- 수혜대상자가 제공받은 기술 사용에 노력한 경우
기술로 사회심리의 관성이 저절로 바뀌지않으며 결국 사람 문제란 얘기다. 그러나 이건 기술 만의 문제가 아니다. 거의 모든 세상 만사는 사람이 핵심이다. 성공에 대해 기술이 아니라 담당자의 헌신 때문이라고 줄 긋고 정리하기 어렵다.
이 책은 회사 ‘임팩트 북리뷰’라는 회사 독서 모임에서도 함께 읽었다. 절반은 전반부가, 나머지 절반은 후반부가 좋았다고 했으며 개발자 J는 흥미롭게도 “인생의 책”이라고 말할 정도로 구구절절 가슴에 담게 됐다고 했다. 내 경우 기술의 부정적 활용을 읽을수록 은근히 기술 낙관주의자인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중간중간 솔깃하다가도 다시 의문이 생겼다. 그만큼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좋았다.
놓치고 있는 포인트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균형의 문제일 뿐이다. 하나의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 해답을 찾아가는 다양한 과정이 있을 테고, 기술로 인해 인류가 더 편리하고 행복해진 것도 분명하지 않겠나. 마치 스티븐 핑커가 인류의 진보를 숫자로 얘기할 때, 알랭 드 보통이 “부자도 불행할 수 있어”라고 엉뚱하게 반박하는 거랑 비슷한 느낌도 들었다.
기술중심 접근의 편견들이 담긴 ‘기술 십계명’ 정리도 일부 유의미하지만 읽다 보면 까칠까칠해진다. 아마 기술을 애정하는 이들도 ‘으응?’하며 갸웃할 수도 있겠다.
- 의미보다 측정을 중시. 측정할 수 있는 것만 가치 → 피터 디아만디스는 『Bold』에서 대담한 프로젝트는 무모해서 투자받지 못하는 게 아니라 측정 수단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반드시 측정 가능해야 성과로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읽을 때는 수긍했으나 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 질보다 양. 수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만 하라 → 소셜 임팩트를 고민하면서 결국은 소셜보다 임팩트인가. 영향이 큰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사실 한정된 리소스로 당연한 건 아닌지.
- 근본적 원인보다 궁극적 목표 중시 → 뭐가 먼저냐가 문제 아닐까. 정답이 있는 문제일까.
- 과정보다 목적 중시 → 기술로 뭔가를 바꾸는 것도 좋지만 그 기술을 찾아가는 과정도 괜찮은데… 기술을 긍정하는 게 꼭 저런 건 아니잖나.
- 내적요인보다 외적요인 → 뭐래니.
- 확신보다 혁신. 했던 거 하지 마라 → 글쎄.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어디 있나.
- 지혜보다 지성. 평범한 노력보다 총명함·독창성 최대화 → 그렇다고 평범한 노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잖나?
- 가치참여보다 가치중립. 중립적인 체하며 가치와 도덕성을 피하라 → ‘중립’이라는 자체가 중립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많은 일에. 이건 기술만의 문제는 아니고.
- 집단주의보다 개인주의. 협력은 나태와 부패 부른다 → 이건 또 뭐래니.
- 책임보다 자유 중시 → 이게?
책의 원제는 『Geek Heresy』. ‘heresy’는 이단이란 뜻이긴 한데 좀 복잡미묘한 뉘앙스가 있나 보다. 직역하자면 ‘Geek’의 눈에서 바라본 엉뚱하고 이단 같은 소리? 그런데 이게 한국에 건너 와서 『기술 중독 사회』가 됐다.
나는 ‘새 기술이 위험해’ ‘인간을 잃어버려’ ‘생각이 줄어들어’ 뭐 이런 종류의 주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돈키호테가 책을 많이 읽어 뇌가 마비됐다는 둥, 라디오, TV, 인터넷, 게임, 스마트폰… 나올 때 마다 중독 걱정하는 것도 과하다고 본다. 역시 균형의 문제일 뿐 두려움에 위축되는 건 난감한 일이다.
“우리 모두 확신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걸 재조명하고 재건해야만 한다. 개발방식과 사회모델과 더불어 우리가 원하는 문명을 선택하는게 중요한 문제”라고,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사르코지가 말했구나.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 “기술은 역사적으로도 평등한 적이 없었다”는 트레바리 친구 홍진채 님의 말도 기록해둔다.
기술은 인류가 문명을 만들고 쌓아오는 데 언제나 기본이었다. 더 빨라지고 현란하게 발달한다고 해서 쫄지 말자. 시행착오는 있을 수 있겠지. 평등하지 않은 문제도 있을 수 있겠지.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많아진다. 최소한 교육은 더 확장되어야 한다.
원문: 마냐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