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 연휴가 끝난 1월 31일, 교육부는 국정 역사교과서 최종본을 공개했다. 이영 교육부 차관은 지난해 11월 발표한 검토본에서 드러난 수백 건의 오류를 수정했다고 밝혔지만, 가장 큰 비판을 받았던 박정희 대통령 관련 기술은 거의 그대로다. 또한, 1948년을 ‘대한민국 수립’이라고 표기한 것도 바뀌지 않았다. 다만, 올해 개발하는 검정교과서 집필기준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표기도 허용하겠단다. 이렇게 ‘눈 가리고 아웅’ 식의 기준에 학계와 정치권의 반발이 거세다.
2015년 9월부터 박근혜 정부가 밀어붙인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편향된 시각의 저술 때문에 손가락질을 받았다. 숱한 반대 여론과 시국 선언도 이어졌지만 정부는 무리하게 국정화를 강행했다. 이에 대해 김육훈 역사교육연구소장은 최근 출간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시민과 지식인에게 길을 묻다>에서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이제 돌아보니, 국정화 결정 과정은 한 해 먼저 터진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 소장의 말마따나,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공공연하게 주장하자 처음에는 소극적인 여당과 교육부가 나섰고, 그들은 잘못된 시스템에 기계적으로 영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금씩 자신의 일을 정당화하더니, 아예 상식적인 반대자들을 매도하고 공공연하게 국정화 반대 진영을 공격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정부 여당을 보고 있노라니 부전녀전, 평행이론이 따로 없다.
비단 김 소장의 표현을 빌리지 않아도 국정 단일 교과서란 그 자체로 민주공화국의 가치에 반한다. 아마 최순실 덕분에 모든 국민이 새삼 외우게 된 문장이 있다면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일 것이다. 민주와 공화는 매우 상식적인 단어들이다 보니 두 단어를 이해하는 스펙트럼이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나 공화주의를 개념적으로 정의하기보다 역사적으로 접근하면 또 다른 맥락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흔히 해방 이후 미국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배웠다고 오해를 하곤 한다. 과연 그런지 역사를 돌이켜 보자.
프랑스는 1848년 남성 보통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했다. 아편전쟁 이후 유럽과 아시아의 교류가 크게 확대됐고, 그 무렵에는 많은 프랑스 선교사가 조선에서 활동했다. 더욱이 1880년대 이후 서울에 많은 외국인이 상주했고, 교류의 폭도 크게 넓어졌다. 당시 조선사람들이 서양과 그들의 정치 제도를 이해한 결과는 실학자 최한기의 여러 책에도 잘 나와 있다. 이렇듯 미국으로부터 민주주의가 전래됐다는 인식은 우리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한국 민주공화제를 그저 서구에서 이식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국가의 근본과 관련된 것인데, 어느 날 하루아침에 뿌리내릴 수 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김육훈 소장은 책에서, ‘민주공화국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그것이 한국에서 현실화되는 역사적 과정에서 비로소 제대로 의미 부여가 된다고 강조했다. 즉, 민주공화제는 프랑스 혁명처럼 역사 속에서 여러 번의 변혁을 거치며 확립된다는 것이다.
1970년대에 역사학자 강만길도 비슷한 말을 했다.
독립운동의 역사는 ‘누가 어떻게 싸웠다’의 역사이면서 ‘싸우면서 우리 후손들과 함께 살아갈 국가의 구상이 어때야 하는가’ 치열하게 토론하는 과정이었다.
이런 토론의 과정은 임시정부 헌장을 거쳐 1948년의 제헌헌법에 고스란히 담겼다(헌법을 기초한 유진오가 2017년의 대한민국을 보면 뭐라고 할까?)
공화국이란 원래 로마인들이 자기들의 국가를 규정하기 위해 사용한 말로서 ‘공공적인 일res publica(public thing)’이란 뜻을 담고 있었다. 풀이하자면, 국가란 공공적 기구요, 국가가 수행하는 일 역시 공공적 업무라는 것이 공화국이라는 이름 속에 담긴 뜻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공화국의 참뜻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공공적publicus’이라는 형용사는 원래 인민을 뜻하는 ‘포풀루스populus(people)’라는 명사에서 파생됐다. 그러니까 공화국이란 한마디로 ‘인민의 것’이다.
고대 로마인들이 쓰던 공화국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바로 ‘레스 프리바타res privata(private thing)’으로 ‘사사로운 일’을 뜻한다. 사사로운 일이란 구체적으로 집안일, 곧 가정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로마인들이 생각한 집안일은 재산과 관련된 일이었다. 그러니까 로마인들이 ‘레스 푸블리카’와 ‘레스 프리바타’를 개념적으로 엄격하게 구별한 것은 자기 집안의 재산을 불리는 일을 나랏일과 뒤섞지 말라는 정치적 지혜의 표현이었다.
공공적인 일과 사사로운 일을 구분하지 못하고 직무가 정지된 박근혜 대통령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 같다. 기어이 국정교과서를 밀어붙이고, 헌법재판소에 간 변호인단은 사퇴 운운하며 지연 전략을 펼치니 말이다.
이처럼 반성을 모른 채 구치소에 있는 최순실에게, 또 관저에서 혼밥을 즐기고 있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를 읽도록 권하고 싶다. 노동자, 활동가, 지식인 100여 명의 인터뷰가 실렸는데, 다 읽기 힘들다면 여성학자 정희진의 인터뷰만이라도 꼭 읽어보시길.
민주공화국은 뻔뻔한 사람이 없는 사회지 뭐 별건가요.
원문: 북클라우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