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2.0의 시대, 세계 유일 전세 시스템의 미래는?
무려 353주 연속 올랐다고 한다. 무슨 블루칩 주식 얘기는 아니고 전셋값 얘기다. 역대 정부 출범 후 3년간 전셋값 상승률은 노무현 정부 1.6%, 이명박 정부 15%, 박근혜 정부 18%. 아래 KB국민은행의 집계를 보면 꽤 확연히 드러나는데, 이에 따르면 2009년 2억짜리 전셋집은 단 6년 만에 3억 5000이 됐다(5억짜리 집이 가격이 그대로 유지된 경우 가정). 실제 통계를 찾아보니 같은 기간 매년 물가는 2%, 임금은 4% 올랐는데 전셋값은 7% 정도 상승했다. 주변에서 그동안 전셋값이 몇천이 올랐다, 몇억이 올랐다며 쓴 술잔을 삼키는 걸 봐오면서 전셋값 상승에 대해 짐작은 했지만 통계로 살펴보니 꽤나 놀라웠다.
다락같이 오르는 전셋값 마련에 전전긍긍하며 집주인 전화에 마음이 철렁, 가슴 졸이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전 국민의 45%다. 자기 집이 없는 사람들이다. 꽤 먹고살 만한 OECD 국가의 자랑스러운 국민으로 허리사이즈는 1인치씩 늘어나지만 오히려 1인치씩 줄어드는 마음의 여유는 왜일까? 직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라는 핀잔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월급은 제자리, 정년은커녕 10년 근속하기도 힘든 고용여건이 앞에서 쪼여오고, 물가는 거침없이 뒤에서 압박해오는 건 엄연한 오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다른 물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덩치는 크면서 3배나 빠른 속도로 쪼여오는 전세, 너는 대체 뭐냐?
창조경제의 아버지, 전세 제도
전세 제도는 지난 30-40년의 개발 시기 동안 경제, 법률, 사회적 자본, 금융 시스템의 부족을 민간차원에서 해결한 한국인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발명품이었다. 남미의 어떤 동네에 비슷한 제도가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전 세계 세 번째 크기 수도권에서 전 국민이 믿고 따르는 KS마크 붙인 ‘전세’제도의 보편성과 규모에 비할 바는 안 될 테니, 전세는 전 세계 유일무이한 임대형식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생각된다. 위키피디아에 보면 전세는 고려 시대로 기원이 올라간다고도 한다.
한국에만 있다는 건…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우리는 태고부터 백의민족이었고 늘 쌍방울 하얀색 내의만 입었는데 알고 보니 전 세계인들은 모두 빨간색 내의를 입는다는 걸 알게 됐다면 어떨까? 하얀색 내의가 얼마나 위생적이고 좋은데 물 건너 미개한 사람들이 빨간색 내의를 입는다고 처음에는 펄쩍 뛰겠지만 이내 곧 적잖이 혼란스러울 것이다. 왜 우리만 쌍방울이지? 일단 우리의 하얀색 내의가 빨간색 내의보다 좋다는 걸 무조건 우기기보다는 우리가 왜 흰색 쌍방울을 입게 됐는지부터 생각해보고, 지금의 환경에서 하얀색과 빨간색 중 무엇이 맞는 선택인지를 생각해보는 게 좋겠다.
그럼 쌍방울에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한국에만 있는 전세의 배경은 무엇일까? 필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봤다.
전세와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
첫째, 돈이 귀하던 시절 은행의 문턱이 높아 줄 댈 곳이 있든지 서슬 퍼런 권력이 있어야 이용 가능했던 제도권 금융 이용이 힘들자 자체적으로 사람들끼리 모여서 민간금융, 사금융으로 해결하여 높은 투자수익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 전세다. 개발 시기에는 높은 경제성장률, 물가상승률 덕에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만 있다면 앉아서 돈 벌 수 있는 껑충껑충 시대였다. 정부에서도 도로 깔고 집 짓고 하려니 늘 돈이 모자란 시기였고 시중에서도 돈에 대한 수요가 넘쳐났으니 돈값, 즉 이자 역시 매우 비쌀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집이나 땅을 사놓으면 몇 배씩 오르던 시기였으니 돈(cash)만 있다면 돈(profit) 벌기는 수월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전세를 통해 목돈을 확보하면 이점이 많았다. 왜냐하면 이때의 ‘목돈’은 순진하게 이자율과 수익률 몇 퍼센트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미래의 기회에 대한 승선 티켓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서럽고 배고팠던 과거야 빠이빠이, 구겨진 인생을 빳빳하게 다림질하고 팔자 고칠 수 있는 기회,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투자기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종잣돈, 목돈이 필요했다.
둘째, 한국에는 강력한 등기시스템으로 보호되는 법률시스템이 있었기에 거액의 자금을 집주인에게 맡길 수 있었다. 신용사회의 기반이 되는 신용이라고 하는 사회적 자본이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담보’의 중요성이 클 수밖에 없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줄 때 담보를 잡고 빌려주듯이, 세입자도 전세금을 맡길 때는 ‘전세권설정 또는 확정일자’와 같은 보호장치가 필요한데, 한국에는 매우 저렴하고 신속하고 간단하게 담보설정을 가능케 해주는 법무사 소장님과 등기시스템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집주인의 입장에서도 신용사회의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집을 빌려주기보다는 전세금을 받아놓고 있으면 적어도 임대료 떼이는 염려는 막을 수가 있었다.
셋째, 세금이다. 이 부분은 민감한 사안이고 길게 쓰지 않지만 보증금은 비과세, 월세는 과세라면 세금 내는 길과 세금 안 내는 길이 있는데 어느 누가 눈 뻔히 뜨고 세금 내는 길로 가겠는가.
넷째, 모두가 전세를 쓰기 때문에 전세의 시스템은 견고히 유지될 수 있었다. 모두가 카톡을 쓰고 있는데, 혼자만 라인을 쓰거나 카톡을 안 쓰는 사람들이 있다. 스스로는 불필요한 연락 안 받아서 편하고 좋겠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 사람만 따로 연락해야 해서 피곤해질 수밖에 없고 굳이 카카오에서 시키지 않더라도 끊임없는 갈굼(?)과 협박, 회유로 그 사람을 카톡의 세계에 앉혀 놓으려고 할 것이다.
전세도 마찬가지로 블록을 쌓듯이 세입자가 나가면 목돈을 다음 세입자에게서 받아서 줘야 하고 날짜까지 정확하게 맞아야 하는데, 이 대세의 흐름과 견고한 짜임새를 깨뜨리기는 쉽지 않다. 원하는 때 원하는 매물을 못 찾거나 원하는 임차인을 못 찾기 때문이다. 전 국민 참여 시장인 주택시장에는 은행 돈은 죽어도 안 쓴다는 철칙을 가지고 무조건 전세만 놓으려는 사람, 행여나 정부 세금의 타깃이 될까를 두려워하는 임대인까지 다양한 사람이 있는데 이들이 묵묵히 기존 방식만 고수하고 이들이 수건돌리기 중간중간에 포함되어 있어서, 전세는 꽤나 오랜 기간 유지될 수 있었으리라.
전세와의 예고된 이별
100미터 달리기의 속도로 마라톤을 뛸 수는 없는 노릇. 껑충껑충 옴팡지게 무서운 속도로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의 반열에 들어서며 한국도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숟가락 놓기 전에 집값이 팔딱팔딱, 정부에서 집값을 억누르기 위해 손발을 꽁꽁 묶어놔도 헐크처럼 풀어 제끼고 기어코 부동산 불패신화를 이어오던 지난 시기 동안 집주인, 세입자에게 모두 이득이 되는 것이 전세였는데 이제는 경제적 현실도, 사회도,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첫째, 돈이 귀하질 않게 됐다. 요즘 누가 시중 은행에 가서 집을 담보로 돈을 빌리고 싶다고 하면 곧바로 지점장실로 모셔가서는 따뜻한 커피와 온화한 미소의 지점장님이 직접 나와 ‘얼마나 필요하시냐’고 친절과 정성으로 대해주는 ‘빚 권하는 사회’가 됐다. 설령 담보가 없더라도 ‘돈이 좀 필요한데요’라고 하면 하루에도 10번씩 전화와 문자를 쏟아대며 애정을 과시하는 상냥한 목소리의 그녀 ‘신한 파이낸스 김 팀장’도 있고, 어려울 때 도와주는 진짜 친구, 캐쉬 들고 러쉬 뛰는 ‘무과장’도 있으니 말이다.
둘째, 돈이 흔해지니 돈이 돈을 벌어주질 못하게 되었다. 지금의 초저금리 시대에는 1억 은행 넣어놓으면 한 달에 손에 쥐는 이자는 10만 원밖에 안된다고 한다. 3억 전세금 받아서 은행에 넣으면 한 달에 30만 원 손에 쥐는데 이 돈 받아서는 집 한 채 임대주고 대학생 아들 학교 앞 고시원에 보내더라도 창문 있는 방은 비싸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창 없는 방에나 겨우 들어가는 웃긴 상황이 연출된다. 그래서 반전세(보증부월세)가 나왔다. 3억 전세를 쪼개 1억은 보증금으로 받고 2억은 전세환산율을 적용해 월세로 매달 따박따박 현금으로 받는 거다.
전세환산율(전·월세전환율)
보증금 1억을 월세 얼마로 바꿔주는지의 일종의 환율이다. 그런데 집의 크기와 동네마다 이 비율이 주먹구구식으로 달라서 어느 동네 큰 평수는 5%, 다른 동네 작은 평수는 7%로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한다. 예전에는 월세를 대부분 1부(연 12%)로 환산했다고 하는데 지금 저금리 시대로 넘어오면서부터 각자가 과하다 싶으면 좀 줄이고 적다 싶으면 좀 더 붙이는 식으로 각자의 처지에 비추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다. 국토부에서 지역별, 평형별 환산율을 공표하고 있지만 어쨌든 은행이자보다는 적어도 2배 이상 높으니 임대주는 월세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셋째, 정부에서 주택임대에 대해 월세든 전세든 세금을 걷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동안 집이라고 하는 재화는 사고 팔 때의 시세차익(양도소득)이 너무 커서 양도소득에만 세금을 제대로 물려도 정부에서는 섭섭지 않았고, 괜히 국민님들의 소중한 표를 깎아먹을지도 모르는 임대소득은 건드려봐야 실익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집값이 껑충껑충 뛰지 않아 양도소득이 줄어들면 세금도 줄게 되는데 나라 곳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임대소득이라도 탈탈 털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미 3주택 이상에서는 세금을 물리고 2주택도 전세 수입에 대해 과세를 시도하고 있으며 월세는 이미 과세 중이다. 나중에 정히 세금 걷을 데가 없어지면 1주택의 임대수익에도 세금을 매기려 할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 남은 속옷 한 장을 지키려는 납세자들의 거센 조세저항을 뚫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넷째, 우리 사회는 신용사회의 근간이 되는 ‘신용’이라는 사회적 자본을 활용할 수 있는 OECD의 꽤 번듯한 일원이 됐고 과도기적인 반전세로의 국면 전환이 급격히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미 전체 임대 시장의 절반 이상이 보증부 월세이며, 그중 18%는 순수 월세다. 종국에는 한국도 글로벌 스탠다드인 순수 월세로 한 걸음씩 바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당장은 쉽지 않다. 현재 한국에도 강남권 오피스텔에서는 ‘풀옵션’이라고 해서 가구를 갖춰놓고 한 달 치 보증금만 받고 한 달씩 계약하는 집들이 있는데 임차인들이 월세를 안내서 애를 먹는 경우가 있어 이러한 임대 형식에 건물주들은 부정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들 단기주택은 기천만 원의 보증금 마련이 어려운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하므로 앞으로 과도기를 넘어서면서 우리 사회가 점차 신용사회로 갈수록 보증금은 다른 모든 나라 수준(몇 달치 월세)으로 점점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된다.
평생 행복하게 널 책임질게? 속는 줄 알면서…
전세가 점차 서울시 역사박물관 한 귀퉁이의 ‘옛날엔 요로코롬 살았어요’ 전시 부스에 박제가 돼서 전시될 운명이란 건데… 그럼 지금의 전세는 왜 이렇게 올랐을까? 그리고 전세가 없어지면 세입자는 훨씬 비싼 월세를 내야 하는데 결국 세입자만 손해 보는 게 아닌가? 라는 질문이 나올 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 의견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계부채 문제로 불안불안해진 집값
천재들이 드글드글 살고 있는 한국에서 다시 엘리트를 뽑아 관료가 돼서 그런지 우리나라 행정부의 정책을 보고 있자면 마치 당구의 쓰리쿠션을 보듯 한 템포 지나 감탄을 자아내는 경우가 있다. 하우스 푸어 문제로 사회가 시끄럽던 몇 년 전, 연일 가계 부채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상황에서 집값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부 입장에서는 돈 없다 아우성치는 가계에 돈을 풀었다가는 집값이 부채총액보다 내려가는 깡통주택이 속출할 거 같고,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뒀다간 여기저기 집들이 다 경매에 넘어갈 판이었다. 게다가 집값 떨어지는 것을 막는 것도 급선무였다. 국민은 전 재산에 해당하는 집값을 팍팍 올려줄 수 있는 머슴(?)을 뽑아놨는데 오히려 집값이 떨어지니 정치인들은 푹푹 가슴이 타들어 갔고, 행여나 집값이 폭락하면 한국에 제2의 IMF가 찾아오지 말란 법도 없음이었다.
뜬금없는 정부의 전세 대책
이때 정부는 집값 대책으로 뜬금없이 전세 자금 정책을 갖고 나왔다. 집주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데 세입자들에 대한 대책이 나왔으니 왼쪽 다리에 모기가 물려서 간지러워 죽겠는데 오른쪽 다리에 물파스를 바르는 격이었다. 하지만 사실 이 정책은 집주인들로 하여금 은행이 아닌 세입자에게서 돈을 빌리도록 한 것이다. 일단, 정부가 저리로 돈을 빌려주는 정책을 쓰면 세입자들의 전세금 부담이 줄어든다. 이때 금리를 낮추게 되면 목돈 굴려봐야 손에 쥐는 게 없어진 집주인들이 전세금을 올려 달라고 할 수밖에 없고, 세입자들은 두둑한 전세자금을 언제든 이용 가능하기 때문에 “3000만 원 올려줘도 한 달 이자는 10만 원밖에 안 되네?”하면서 전세금을 쉽게 올려줄 수가 있다. 아니, 오히려 속으로는 “예전 같았으면 이자가 두 배는 비쌌을 텐데 이거 완전 땡 잡았는걸?”하면서 반 토막 난 이자를 알뜰히 챙겨 쓴 자신을 합리적인 금융소비자라고 스스로 대견하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전세금 폭등과 저금리 덕에 살아난 부동산 시장
그런데 몇 년간 이런 식으로 전세금이 올라가자 오른쪽 다리에 바른 물파스가 신비스런 약 빨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저금리 덕에 전세가가 치솟으면서, 이에 발끈한 수많은 30-40대 가장들이 더럽고 치사해서 돈을 왕창 빌려 집을 사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꺼져가던 부동산 시장에 훈풍이 돌기 시작한다. 대기업 건설사들마저 중환자실에 뉘어놓고 ‘올해를 넘기기 힘들 거 같습니다’라면서 마음을 준비하고 있을 정도였는데, 부동산 시장의 바이털 사인들이 급격히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2014년 봄부터 건설사들은 그동안 억눌러왔던 분양물량을 한꺼번에 토해내기 시작했다. 역대 최고 물량 45만 채의 아파트가 2015년에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역대 최저금리 앞에 구매자들은 역사상 가장 좋은 조건으로 대출서류에 사인하면서 집을 사기 시작했다. “이렇게 저금리에 대출 안 받으면 그게 바보지.” “그래도 이제 집값 폭락할지도 모른다던데 집을 사면 어떡해?”라며 젊은 부부들은 밤새 옥신각신 썰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이불을 덮자마자 눈앞에 맴도는 4 Bay 신평면 새 아파트를 어찌 외면할까. ‘행복이 가득한 집’의 표지모델이라도 된 듯 얼굴 가득 미소 띤 가족들이 꿈속에서 나지막이 속삭인다. 30평 같은 20평 마법의 신평면 아파트, 집값의 70%를 2.5%에 빌려주는 찬스까지… 어차피 집은 하나 깔고 살아야 할 텐데… 평생 이런 기회가 또 생길까? 잃을 것도 없지 않나? 이 정도 삘이 꽂히게 되면 대부분 ‘아 몰랑~ 도장 꽝~!’으로 이어지게 마련일 터.
썸 타던 정부의 나쁜 남자 드립과 서먹해져 버린 시장
이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전셋값은 집값의 허리에서 가슴까지 올라가고 ‘집값 대폭락론’을 점치던 전문가들을 머쓱하게 만들며 집값은 3단 점프를 해 예년의 최고치마저 경신하는 단지가 쏟아져나왔다. 강남 재건축이 맞물리면서 전세난도 가중되기 시작했다. 한편 가계대출이 연일 사상 최고치를 찍으며 과열되자 여기저기 빨간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언론, 학계, 심지어 국제기구에서조차 한국의 가계부채 문제를 걸고넘어지자 결국 정부에서도 대출 규제를 시작한다. 그동안 담보(집)만 든든하면 집값의 60-70%까지 빌려줬었는데 이제는 소득 수준을 꼼꼼히 살펴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돈을 빌려주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그동안은 이자만 몇 년 내다가(거치) 원금은 서서히 갚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젠 처음부터 (1년 후) 원금을 같이 갚으라고 단단히 시장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불과몇 달 전만 해도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주면서 돈을 빌려줄 것 같던 은행과 정부는 한순간 뒤돌아 서버렸고 로맨틱? 하던 시장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썸 타다가 입 싹 닦고 우린 그냥 친구였다며 다른 여자로 갈아타듯 ‘정부는 한 번도 빚내서 집 사라고 한 적 없다’는 공식입장을 내놓으며 나쁜 남자 드립을 쳤는데, 이때부터 집값은 정체하고 전세는 계속 오르면서 전셋값은 집값의 80%를 넘보게 됐다.
난 너와 함께 행복한 줄 알았다
집값의 절반 정도의 전세금만 있으면 집에 거주할 수 있었던 것이 전세인데 이제 이런 저렴한 옵션이 사라지면서 세입자들은 마치 물고 있던 막대사탕을 빼앗긴 아이와 같이 심각한 박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나라님께서 백성들을 어여삐(?) 여기시고 세입자들의 살림살이 좀 나아지라고 전세 지원을 해주시니 성은이 망극한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로는 풍부해진 자금 덕에 전셋값만 올라버렸고, 저금리 때문에 집주인들이 월세로 돌아서면서 아예 전세금을 아무리 올려준다 해도 전세 물건 자체를 찾기가 어려워졌으니 ‘전세대책’을 정부에 촉구하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Why 전세 is 세입자의 friend?
근데, 왜 세입자는 전세를 원하고 집주인은 월세를 선호할까? 세입자 입장에서 보통 전세자금 대출 금리는 3%인데 반해 전월세 환산비율은 6% 정도다. 쉽게 얘기하자면 전세금 3억 원을 은행에서 빌려 이자를 은행에 줄 때와 집주인에게서 빌려 집주인에게 이자를 줄 때 각각의 이자율이 2배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즉 같은 금액을 은행에서 빌리면 대출이자가 한 달에 75만 원인데 월세 환산금은 150만 원이 된다. 왜 세입자들이 눈 시뻘겋게 뜨고 전세물건을 찾아다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입장을 바꿔 건물주 입장에서는 3억을 전세로 받아놓고 그 돈을 은행에 넣어두면 이율 1.5%밖에 안 된다. 거기서 세금까지 떼면 한 달에 남는 돈은 30만 원뿐이다. 그런데 이 집을 월세로 놓으면 한 달에 들어오는 돈이 100-150만 원이 된다. 당연히 집주인에게는 월세가 유리하고 세입자에게는 전세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여기까지 보면 그렇다.
과연 전세는 세입자의 친구일까
개인적 소견임을 밝히고 얘기하자면 누가 전세 제도의 최고 수혜자인지 그 복잡한 실타래의 끝은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전세 제도의 가장 큰 피해자는 세입자라는 것이다.
전세의 전제
애당초 집주인은 왜 5억짜리 집을 3억만 받고 빌려줬을까? 즉 5억짜리 집에 3억 원의 전세금만 받으면 나머지 2억은 자신의 돈을 투자한 셈이다. 이 그림의 퍼즐이 맞춰지기 위해서는 이 투자에 대한 수익이 집주인에게 어떻게든 돌아가야 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 쉽게 보면 2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첫째는 집값이 오르는 경우다. 5억짜리 집이 6억이 되는 경우 집주인은 2억을 투자해서 1억의 집값 상승을 기대할 수 있다. 집값이 5억에서 6억으로 20% 상승했지만 실제로는 2억을 투자해 1억을 벌었으니 50%의 수익이 발생하는 레버리지 효과를 누릴 수가 있다(물론 세금 및 비용을 빼면 수익은 좀 줄겠지만). 하지만 집값이 내려가는 경우 집주인은 큰 손해를 보게 된다. 레버리지가 오히려 독이 되어 역 레버리지(reverse leverage)가 되기 때문이다. 5억짜리 집이 4억이 되면 집주인은 2억 투자금이 1억으로 줄어 50%의 손실을 입게 된다. 따라서 전세의 가장 큰 전제조건은 ‘집값이 올라야 한다’는 것이다.
전세와 세입자
집은 투자수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필수재화이다. 누구나 자리 펴고 누울 수 있는 공간, 가정을 꾸릴 공간이 필요하기에 세입자들은 잠정적인 ‘주택 매수자’로 언젠가는 집을 사야 한다. 집값이 안 오를 거 같아서 집에 투자하지 않는 결정을 한 사람들이나 이민이나 이사 등으로 삶의 터전을 만들지 않으려는 사람들 정도는 예외일지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가정을 꾸리고 가족이 생기면 자녀를 안정적으로 교육시킬 수 있는 삶의 터전은 경제적 가치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입자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오르는 전세금을 맞춰낼 수 있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집을 장만하는 것이다. 그런데, ‘집값 상승’을 전제로 한 전세 제도가 유지되었다는 말은 세입자는 2년 후 전세 계약이 끝날 즈음에 내 집 마련의 꿈에서 그만큼 더 멀어져 있게 됐다는 것이다.
당장에는 곶감이 달다고 상대적으로 적은 부담으로 전세로 들어가게 되니 세입자의 부담이 적은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2년 후 세입자가 집을 사서 나가려고 할 때 집값은 더 올라갔을 테고, 다른 집으로 전세를 가려고 해도 집값이 오른 만큼 전세도 올랐을 것이다.
전세와 집주인
최근에 전세금 인상과 월세로의 전환이 이어진 배경에는 예전처럼 집값 상승에서 재미를 볼 수 없게 된 집주인들이 임대소득에서 부족분을 만회하려는 메커니즘이 녹아 있었다. 애초에 집주인은 집값이 떨어질 수도 있는 리스크를 지고 투자에 임했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요구수익률은 임대소득으로 돌려받든 집값 상승으로 돌려받든 은행이자보다는 높을 수밖에 없고, 실제로 세입자가 부담해야 하는 임대료는 앞의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연 7%(동기간 물가상승은 2%)씩 올라왔다. 집값이 기대한 수준만큼 오르지 못하면 집주인은 어떤 방식으로든 기대했던 수익을 보존 받으려 할 것이다.
전세를 통해 당장에는 내 주머니에서 돈이 덜 나가니 이득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풍선의 한쪽을 누르면 반대가 부푸는 제로섬 게임이라면 어떻게든 피해를 보는 건 세입자가 될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집 가진 사람은 집이 돈을 벌어다 주지만 세입자는 오르는 전세금만큼 열심히 현금을 구해서 집주인에게 갖다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올라탄 사람은 땀 뻘뻘 흘리면서 다음 정류장까지 뛰어왔다가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 그다음 정류장으로 뛰어가는 사람과는 경기가 안 될 것이다. 뭐, 버스에 올라타더라도 그 이후에 빚을 갚느라 정신없이 뛰기는 매한가지겠지만 자기 페이스대로 빌린 돈을 꾸준히 상환해 나가는 것과 예측할 수 없이 들쑥날쑥하는 전셋값을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전세는 나쁜 거란 말이야?
전세의 기본 가정이 집값 상승이라면 전세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집값 상승을 바라는 가수요가 많다는 얘기가 된다. 즉 집에 투자해 돈을 벌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가수요가 많으면 집을 정말로 필요로 하는 실수요자들은 더 비싼 가격에 집을 사야 한다. 전세는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냥 한국만의 임대형태일 뿐이지만, 그 형태가 존속되기 위해서는 실수요 세입자들이 희생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한국의 주택시장이라 생각된다. 그동안 껑충껑충 개발 시기 동안 높은 집값 상승과 전세를 통한 레버리지 투자를 통해 따따불 수익의 맛을 본 투자자들은 ‘투자를 하면 이 정도는 벌어야지’라는 고기 맛을 봐버렸다. 그런데 그 고기 맛을 잊지 못하고 무리수를 쓰다 보니 나중에 결국 하우스푸어로 전락하거나 뒤탈이 나는 사람들이 생기곤 했었다.
이제 본격적인 저성장 저금리가 시작되면 본격적인 투자의 시대가 열리는데, 전세 끼고 집 사서 조금씩 평수를 넓혀가던 고전적 투자방식은 한계를 드러낼 듯하다. 앞으로 실수요 위주의 주택시장으로, 전세에서 자가로 주택시장이 변화해야 할 텐데,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집에 투자하던 투자자들은 이제 각자의 길을 가야 할 듯하다.
그동안 달달한 인스턴트 봉지 커피에 길들었던 한국인의 입맛이 어느새 로스팅 원두의 깊은 맛을 논하게 될 만큼 세련되어진 것처럼, 앞으로 투자자의 입맛도 점차 흰밥에 고깃국이 아니라 다양한 식재료와 조리법을 논하는 식으로 점차 성숙해지고 각자가 자신만의 독특한 투자철학을 논하는 시기가 머지않아 올 듯하다.
원문: 남성태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