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2015년 5월 27일에 쓰인 글입니다.
천성이 배배꼬인 난 위의 그림 두 장을 볼 때마다 심기가 살짝 뒤틀린다. 신분당선 강남역에 걸린 대형그림들로 보다시피 싸이의 히트곡 ‘강남스타일’을 테마로 하고 있다. 각각의 작품명은 〈희망가〉와 〈큰 소나무〉. 전자엔 여러 나라의 국기가 나부끼는 가운데 신명 나게 말춤을 추는 모습이, 후자엔 유명한 연예인 및 운동선수와 정치인 들의 얼굴이 담겨 있다.
날 거북하게 만드는 건 함께 전시된 작가의 코멘트다. 아래와 같은 문구가 있다. 교정 없이 그대로 옮긴다.
그는 분명 거대한 소나무처럼, 자유로운 물고기처럼 때로는 호랑이 발자국처럼, 비상하는 고구려 삼족오처럼 이 땅을 사랑하며 세계로 뻗어나가 “나는 한국인”이라고 외칠 것 같다. 많은 젊은이들과 서민들이 그를 보며 희망을 꿈꾸고 이주 노동자와 다문화 가정은 모국땅에 울려퍼질 그의 노래를 생각하며 위로받길 빌고 싶다.
첫 문장에 가득한 오글거리는 감성은 차치하자. 이 정도는 그러려니 넘길 수 있다. 문제는 두 번째 문장이다. 앞쪽도 맘에 안 들고 뒤쪽도 맘에 안 든다.
먼저 앞쪽. 젊은이들과 서민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는데 난 그저 헛웃음만 나온다. 타인의 큰 성공을 가리키며 희망을 이야기하는 그 사고가 꽤나 고리타분(=골이 따분)하지 않나?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도 희망을 품고 열심히 노력하라고? 아니면 한국인이 해냈으니 자랑스러워하며 미래를 꿈꾸라고? 둘 다 싫다. 민족주의 테마의 촌스러운 변주를 들고 타인에게 건네는 훈계는 사절이다.
게다가 희망을 이야기하며 제시하는 대상이 왜 죄다 연예인, 운동선수, 정치인이란 말인가? 그림이 전시된 신분당선을 주로 이용하는 이들은 서울과 경기도를 매일같이 오가며 흔히 ‘평범하다’고 수식되는 일상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부류다. 그들에게 저런 인물들이 과연 희망의 표본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우리에게 있어 희망은 저렇게 웅장하고 화려한 무언가가 아니다. 우린 그보다 한결 소소할지라도 보다 실질적인 무엇들이 일상을 채워나가길 원한다. 그조차도 사치로 여겨지는 시대니까. 타인의 화려한 성공에 도취되어 두 주먹 불끈 쥐고 희망을 품을 이들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다음은 이주 노동자와 다문화 가정을 이야기한 뒤쪽. 얼핏 읽으면 박애주의에 근거한 것처럼 보이지만 다소 위험한 지점도 없잖아 있다. ‘모국’이라는 두 글자가 누군가를 소외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라는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자 하는 이들, 특히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주민 2세들이 바로 그렇다. 그들은 ‘모국’이라는 단어를 통해 선을 긋는 것을 거부하는 입장이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에 ‘대한민국이 우리나라입니다’라고 답하곤 한다. 그런 이들에게 모국에서 울려퍼지는 강남스타일로 위로를 받으라고 말하는 건 기만일 수 있다. (‘위로’라는 단어 또한 비슷한 관점에서 논할 구석이 있어 보이지만 생략하겠다.)
작가에게 공격적 의도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선의에서 그리 기술했다고 확신한다. 난 다만 언어 사용이 다소 신중하지 못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특히 공공장소인 지하철역에 걸리는 문구이기에 더욱 그렇다.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걸어둔 그림 두 장임을 안다. 즐거워하는 이들도 분명히 꽤 많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그림들에서마저 메시지를 뽑아내며 요모조모 따져대는 내게 병적인 구석이 다분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이상한 거겠지? 늘 그랬듯이.